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62화 (291/686)

7권 12화

제21장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12)

키잉―.

신선 같은 풍모로 내리치는 검격에 하늘을 가를 듯한 패기(覇氣)가 담겼다.

화산에 존재하는 무수한 무공들 중의 일부는 너무나 위험해서 무공을 익힌 지 이십 년이 된 후에야 배워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다.

대표적으로는 단천열화검이 있다.

하늘을 가를 만큼 날카로우니 단천이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필살의 기세를 품어서 열화다.

안 그래도 화산파 무인들은 보통 사람이 보면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차가운 예기(銳氣)를 흩뿌리는데 거기에 열화같이 뜨거운 필살의 기세까지 사용하다니.

금지되는 것이 당연할 터.

심지어 그 무공을 선인지경에 오른 검선이 사용했다.

실제로 하늘이 잘리고, 살기가 불꽃처럼 뿜어지는 일격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까아앙―.

“큭?”

맹견처럼 달려들던 도철이 공격을 막아 내려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도철은 강대한 파괴력을 다 해소하지 못하여 발바닥이 땅에 푹― 하고 박혀 버렸다.

단단한 청석 바닥이 진흙처럼 뭉개졌다.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떨어 댔다.

거대한 거인이 손바닥으로 내리찍는 듯했다. 검의 압력이 도철을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크윽!”

입꼬리를 말아 올린 도철은 신음을 하는 건지 즐거워하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크큭, 크크크. 이래야지. 이래야 싸울 맛이 나지!”

막강한 패력을 맞아 정신이 나가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도철은 광자처럼 미친 듯이 웃더니 갑자기 살기를 번뜩였다.

까드득―.

도철은 철조를 낀 양손으로 내리치는 매화검을 움켜쥐었다.

옷고름이 헐겁게 묶여 있는 가슴팍에서 은은하게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새빨간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도철은 허리를 튕겨 허공으로 솟구쳤다.

마치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올라가는 듯한 몸놀림이었다.

가볍게 뛰어오른 몸.

뻗어 내는 각법이 강렬하다.

양발에도 어느새 착용한 건지 무쇠로 만들어진 발톱이 끼워져 있었다.

쉬이익―.

허나 매화신검은 약간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수평으로 찔러 오는 검격.

불꽃이 피어오르듯 확― 하고 덤벼 오는 검을 향해 도철은 날갯짓을 하듯 양팔을 수십 번이나 휘둘렀다.

까가가강―.

검 날과 철조가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도철의 잔상이 수십 개나 만들어지며 매화신검의 주변을 둘러쌌다.

다리를 노리는 조격.

머리를 노리는 각법.

둘 중의 한 곳을 막으면 다른 한 쪽은 내줘야 하는 공격이었다.

도철은 매화신검 악중광에게 선택을 강요했으나, 악중광은 영리하게도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환검인가?”

악중광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나이와 경험은 허투루 먹는 것이 아니다.

악중광은 망설임 없이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위도, 아래도 막지 않았다.

방어는 하지 않고 오히려 검을 날렸는데 그 속도와 시점이 절묘해 먼저 공격을 가한 도철이 무시할 수가 없었다.

뿜어지는 진기.

막강한 힘이 불꽃처럼 뿜어진다.

도철은 황급히 양손을 모아 상체를 보호했다.

깡!

매화검과 철조가 닿는 순간, 그 안에 실린 막강한 경력이 도철의 내부를 진탕시켰다.

주변을 공격하던 잔상이 사라졌다.

도철의 몸은 조약돌처럼 가볍게 튕겨져 방패병들 사이로 파묻혀 버렸다.

“잘 피하는군.”

악중광은 성큼 다가갔다.

바닥을 구른 도철의 앞에 방패병들이 서 있었다.

쿵.

강하게 내딛은 한 발은 오행의 변화를 품고 있는 오행매화보.

하늘을 가르며 내리치는 검격은 열화 같은 살기를 담은 단천열화검이다.

쩌저정―.

푸확―.

방패병의 방패가 쪼개졌다. 놀란 듯이 부릅뜬 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는 자신의 가슴이 갈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봐야만 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털썩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병사.

그의 눈빛이 급격히 흐려졌다.

흑시부대 중의 첫 희생자.

압도적인 힘에 의해 벌어진 첫 피해였다.

“이…….”

“무슨……!”

방패를 든 병사들의 눈에 혼란이 가득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충격이 주변을 짓눌렀다.

쿵.

매화신검 악중광이 한 걸음 더 다가온다.

일보에 일검.

막강한 검격이 내리쳐지려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있지 마!”

날카롭지만 선명한 외침이 흑시부대원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왕진이 일갈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대로 더 당했을 터였다.

“방패를 들어요! 뭉쳐! 멍하니 있지 마! 공격을 가해! 걱정 마라. 우리에겐 신수들이 있다!”

왕진의 지시는 절박했고, 합리적이었다.

흑시부대원들은 다급하게 모여 방패를 함께 들어 올렸다.

쩌저정―.

“흠!”

벼락같은 검격은 곧바로 떨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아까 전과 달랐다.

쇠로 된 방패가 절반만 쪼개졌다. 옆에서 다른 병사도 방패를 겹쳐서 도와준 덕분이었다.

악중광은 절반만 쪼개진 방패를 힐끗 쳐다봤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무심한 모습.

허나 공격의 방식이 바뀌었다.

이번엔 검을 꼿꼿이 세우더니, 천변만화하듯 화려한 모습으로 검을 허공에 흩뿌렸다.

미끄러지는 듯한 발놀림.

매화신검이 검을 휘두르니 단정하게 묶은 백발이 명필가의 달필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화산하면 매화.

매화하면 화산.

단천열화검, 천류신화검 같은 천고의 절학이 있지만, 그래도 화산의 근간인 검법이라면 누가 뭐라 해도 매화검일 터.

악중광의 매화검은 육모담이 전개하던 폭발하는 듯한 파괴력의 매화검과는 전혀 달랐다.

육모담의 오행매화검이 이제 막 활짝 피려는 아름다운 꽃봉오리라면, 악중광의 매화검은 만개하여 낙화하기 직전의 매화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하늘하늘 다가와, 방패 사이로 검 끝을 집어넣는 순간 만개하여 꽃잎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퍼퍼퍼퍽!

“……!”

가장 앞에 있던 병사 한 명이 셀 수 없이 많은 검격에 찔려 비틀거리며 물러서다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멍하니 정면을 쳐다보는 그의 몸에서 가느다란 핏줄기 수십 개가 앞으로 뿜어졌다.

“쿨럭.”

갑옷마저 뚫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검술이었다.

병사의 눈에서 순식간에 이지의 빛이 흐려졌다.

“후퇴! 뒤로 물러나세요!”

왕진이 지시를 내리는 것과 동시에 후열에 있던 흑시부대가 산공독을 뿌리면서 검은색 화살로 공격을 가했다.

차르릉―.

악중광의 검이 검명을 토해 냈다.

지척에 있던 병사들은 콧속으로 향긋한 매화향이 느껴지는 듯 느꼈다.

검향지경(劍香之景).

지고한 경지의 매화검이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고목이 잔가지를 흔드는 듯했다. 검 끝에서 피어난 꽃잎들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며,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아 냈다.

까강―.

매화신검의 검술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몸을 살짝 움츠린다 싶더니, 옆으로 반 바퀴 회전하며 검을 수평으로 휘두르자 거대한 흐름이 생겨났다.

후웅―.

허공에서 터진 산공독과 매화검으로 쳐 낸 화살들이 한꺼번에 한쪽으로 휩쓸려 바닷속 물고기 떼처럼 멀리 사라졌다.

악중관은 다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초연한 신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정면을 바라보는 눈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심함.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무감각한 눈이 흑시부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쿵.

악중광이 다시금 한 발을 내디뎠다.

오행매화보.

천변만화하는 검술이 근처에 있던 흑시부대 두 명을 또다시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속수무책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악중광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화들짝 놀라 뒤로 똑같이 한 걸음을 물러났다.

두 명씩 짝을 지어 들던 방패가 이젠 세 명이 되었다.

일부 무리에서는 다섯 명이 한데 모여 충격을 대비했다.

싸움을 지켜보던 군중들은 환호했다.

역시 화산의 신검(神劍).

화산을 수호하는 수호신.

온갖 찬사를 내뱉으며 악중광을 칭송했다. 그들이 보기에 천인의 경지에 오른 매화신검 악중광에게는 적수가 없었다.

“이래서 우리에게 신수가 필요한 것이랍니다. 보고 있나요. 선?”

뒤쪽의 인간 가마 위.

푹신한 보료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던 왕진이 씁쓸하게 웃으며 그의 소동에게 탄식했다.

“네. 보고 있어요, 왕 공공.”

“희한한 일이에요. 절정의 경지까지는 아무리 고수라도 사람의 모습인데.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자들은 저렇게…… 어느 순간 뭔가 벽을 넘어선 것처럼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 버리죠.”

“엄청 강한 것 같아요. 청성과 아미를 상처 없이 휩쓸던 흑시부대가 벌써 몇 명이나 죽었어요.”

“그래요. 이래서 절세 고수가 무서운 거예요. 똑같은 경지의 고수가 없다면 무책. 만나면 무조건 퇴각밖에 답이 없죠.”

왕진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궁기? 그만 먹고 일어나요. 일해야 할 시간이에요.”

왕진의 보료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거구의 사내는 산발이 된 금발 머리카락을 지녔다.

푸른색 보석 같은 눈동자는 초점이 없이 이지가 흐려졌고, 입가에서 시작해 전신이 피범벅인 모습에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섬뜩함이 존재했다.

“아직. 소화. 못한다.”

“괜찮아요. 그보다 상황이 급해요. 매화신검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네요. 도철만으로는 부족하겠어요. 이대로 두면 피해가 커져요.”

궁기는 느릿하게 몸을 돌려 전장을 바라봤다.

“도철. 약하다.”

“후훗, 약하진 않아요. 그저 아직 발전 중인 것이죠.”

“발전해도. 약하다.”

“당신과 비교하면 안 돼요. 당신은 사흉이 되기 전에도 강했으니까. 지금의 당신에게 적수가 있기는 할까요?”

궁기는 수긍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왕진은 우측을 힐끗 살펴보았다.

벽력검을 잃은 종남파의 태을검객들은 궁기와 흑시부대에게 전멸했다.

정면의 화산파는 시야를 가린 방패병들 때문에 아직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니 저렇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환호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어쩌면 기회네요. 도철이 다시 일어나면……. 후훗, 말이 씨가 되는군요.”

방패병들 사이에서 환호성과 함께 강인한 기세가 들불처럼 번졌다.

“캬아앗!”

어느새 몸을 회복하고 일어난 도철이 들개처럼 달려가 다시 한번 악중광에게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궁기?”

왕진이 그 이상 말을 꺼내기도 전에, 궁기는 몸이 살짝 흔들리는 듯하더니 가마에서 사라져 버렸다.

왕진은 나직하게 웃었다.

싸움은 두 번째 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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