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63화 (292/686)

7권 13화

제21장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13)

“크크큭. 키하아!”

무인이라면 본디 명경지수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은 마음과 사태를 명확히 판별할 수 있는 냉철한 지성이 함께해야 하거늘.

도철은 그 말을 모르는 듯했다.

광기 어린 눈빛.

짐승 같은 신음 소리.

이지를 상실할수록 도철의 몸놀림은 점점 더 빠르고 위협적으로 변했다.

펄쩍 뛰어올라 악중광을 덮치는 도철은 마치 대호(大虎)처럼 강맹했다.

양손에 낀 철조에선, 마치 검을 열 자루 들고 있는 듯, 날카로운 검강이 제각각 뿜어져 나왔다.

까앙―.

반면에 매화신검은 그야말로 무인의 표상이었다.

무심하고 차갑다.

허공에서 덮치는 도철을 응시하는 시선은 지극히 냉정했다. 단천열화검의 내력이 실린 검은 거침없지만 합리적이다.

“그만 쓰러져라, 짐승이여.”

키잉―.

검명이 떨쳐 울고, 열화 같은 살기가 담긴 매화검이 패력을 담아 도철을 내리찍었다.

꽈앙―.

이번에도 도철은 매화신검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다시 한 번 청석 바닥에 금이 가며 파편이 튀어 오른다.

도철의 발이 청석 바닥을 다시 파고들기 시작했다.

울컥 내뱉는 핏물.

도철의 양팔과 다리에 막강한 힘의 여파로 자잘한 생채기들이 생겨났다.

아까와 같다?

아니다.

도철의 입에서 괴성이 튀어나왔다.

“크아아아!”

쩌저저정―.

“……!”

도철은 양손, 양발에 착용한 네 개의 철조를 모조리 사용했다.

도철의 가슴 언저리.

하단전의 살짝 윗부분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까가가가강―.

수십 번의 굉음이 터져 나왔다.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강기를 뿜어내는 철조로 매화신검의 검을 끊임없이 두드렸다.

막아 낸다.

나무꾼의 연이은 도끼질에 거목이 쓰러지듯, 매화신검의 단천열화검이 서서히 힘을 잃고 스러져 갔다.

악중광은 방식을 바꿨다.

쿵― 하고 다시 한 번 내딛는 오행매화보, 이번엔 산뜻한 바람처럼 매화검이 다가왔다.

도철의 눈빛이 번뜩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까드득―.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위로 튀어 올라 날아오는 검을 잡아챘다.

“……!”

도철은 양손 철조를 손깍지 끼듯이 교차시켰다.

매화검의 시퍼런 강기와 철조의 붉은빛 강기가 단단하게 얽매였다.

꽃봉오리가 만개하기 전에 미리 잡아챈 셈이다.

악중광에게는 꽃잎이 폭발하는 듯한 매화검을 전개할 틈이 없었다. 그가 검을 잡아당겨 봤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캬하핫!”

곧바로 허리를 튕겨 올린 도철이 허공에서 날카로운 각법을 펼쳐 냈다.

악중광이 황급히 상체를 뒤로 뺐다.

그의 턱 밑에서 날카로운 쇠 발톱이 불쑥 튀어 올랐다.

치솟는 강기.

붉은빛이 번뜩이더니, 그의 자랑스러운 백색 수염이 일부 잘려 나갔다.

“이놈……!”

악중광의 순백색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몸을 뒤로 빼는 것에 조금이라도 망설였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다시 양손으로 검을 붙잡고 자하신공의 신묘한 진기를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우우웅―.

검극이 떨리며 매화검을 중심으로 노을빛 강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기(技)가 묶였으니 힘으로 짓눌러 버리겠다는 심산이다.

도철은 황급히 검을 놓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찰나의 선택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꽈아아앙―.

도철이 막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굉음과 함께 청석 바닥이 일자로 쩍 하니 갈라졌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사람이 있었다면 반으로 갈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가루가 될 듯 짓뭉개졌으리라.

“크윽…… 큭큭.”

도철은 웃음을 터뜨렸다.

숨이 거칠다.

눈빛도 조금 탁해져 있었다.

“세긴 한데. 그런 걸로는 놀라지 않아. 늙은이, 나는 이미 무쌍귀의 막강한 일격을 겪어 봤거든? 그보다 강한 걸 보여 줄 수 있겠어?”

도철은 씩 웃더니 양손의 손목을 한데 붙였다.

철조를 낀 열 개의 손가락이 마치 꽃잎처럼 활짝 벌어졌다.

천천히.

손가락이 굽어지자 열 개의 손가락은 거대한 짐승의 날카로운 이빨이 되었다.

“용생(龍生).”

고오오오――――.

마치 도철의 머리 위에 커다란 용이 한 마리 재림한 듯했다.

명치 부근의 붉은빛이 이제는 눈이 부실 듯 강렬했다.

막대한 내력이 도철의 가슴팍에서 시작되어 그의 손바닥 사이로 모여들고 있었다.

“흠!”

처음으로 악중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황급히 전력을 다해 단천열화검을 전개했다.

키잉―.

극성의 성취가 담긴 단천열화검이 하늘을 가르며 도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꽈앙―.

까가가강―.

도철의 몸이 회전했다.

쥐를 잡으려는 뱀이 몸을 비틀듯, 기괴(奇怪)하게 상체를 뒤튼 도철이 용의 입으로 악중광의 단천열화검을 물어뜯었다.

한순간이지만 도철의 존재감은 악중광도 긴장할 만큼 강렬했다.

마치 실제로 용이 강림한 듯, 이빨로 단천열화검을 깨물고, 부수고, 비틀어서 떨쳐내더니 뱀처럼 비스듬하게 몸을 꺾어 악중광을 향해 달려들었다.

푸확―.

거센 충격과 함께 산산조각 난 돌조각들이 바닥에서 튀어 올랐다.

뿌연 흙먼지가 가라앉자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도철이다.

그는 온몸이 피범벅이었다.

입고 있던 무복은 멀쩡한 부분이 하나도 없이 너덜너덜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좌측 어깨와 우측 허벅지에 깊은 상처가 보였다. 거세게 흘러나온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반면에 반대쪽 악중광은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다만 한 곳.

검을 잡고 있던 오른쪽 팔뚝 위가 맹수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옷자락과 함께 살점이 움푹 패어 뼈가 보이고 있었다.

싸움을 지켜보던 군웅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림오존 중 검선과의 싸움 이후로 생채기조차 입은 적이 없었거늘.

매화신검이 상처를 입다니,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큭큭큭…….”

도철은 웃음을 터뜨렸다.

비틀거리는 육신, 당장이라도 넘어질 듯 그는 좌우로 휘청거렸다.

“내 거야. 내 거라고. 내가 물어뜯을 거야.”

도철은 탁한 눈빛으로 악중광, 아니 악중광 너머 다른 누군가에게 말했다.

“뺏어가지 마. 내 거라고. 알았어?”

“……!”

장내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악중광의 뒤에 거구의 사내가 한 명 서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검은색 천으로 온 몸을 둘둘 감아 눈이나 입도 밖으로 내놓지 않았는데, 특이하게도 오로지 양손만을 드러냈다.

기괴할 정도로 크고 새하얀 손이 천천히 악중광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흡!”

악중광조차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옆으로 물러나는 동작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암향표. 검을 세운 채 몸을 회전시키는 동작은 오행매화보의 변화를 정확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야말로 화산 무공의 총아.

화산의 수호신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다.

악중광은 깊은 상처를 입은 오른팔에서 왼팔로 검을 바꿔 잡았다.

냉철한 그의 눈빛은 상대가 둘로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상처투성이가 된 채 숨을 헐떡이는 도철과 묵묵히 서서 새하얀 입김을 내뱉는 기괴한 거구의 사내를 지그시 응시했다.

나이가 든 탓일까.

천명을 읽을 수 있기에 더욱, 지금이 바로 그 때임을 알아챘다.

“곽청!”

악중광의 냉철한 목소리가 화산파를 향해 울려 퍼졌다. 저 멀리, 화산의 장문인인 곽청이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는 모습이 보였다.

“화산의 자존심은 나만으로 충분하다!”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서지 마라. 내가 쓰러지면 더 이상 싸우지 말라.

매화신검의 뜻을 어떻게 알아듣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모두 의분을 억누를 수 없어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양손을 꽉 움켜쥘 뿐이었다.

“검극매화 오행합일.”

백발백염의 노신선(老神仙)이 왼팔로 검을 든 채 두 명의 짐승을 향해 먼저 달려들었다.

매화신검은 강했다.

도철과 궁기.

초절정의 경지를 넘은 두 사람을 상대로 이백 합이 넘게 버텨 냈다.

한 자루 검을 통해 줄줄이 선보이는 것은 화산 검공의 절정.

이백 합이 넘어선 뒤에야 악중광의 매화검이 부러졌다. 궁기의 극음진기를 버텨 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그 후로도 화산의 절개가 꺾이지 않음을 몸소 보여 주었다.

피를 토해 혈향이 짙게 배어 든 수염을 휘날리며 선보인 것은, 화산의 무공 중에 주목을 받지 못했던 절정의 매화권(梅花卷)과 낙화추영장(落花追影掌)이었다.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화산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의 비급 같은 존재였다.

맨손으로 오십 합을 더 겨룬 뒤, 그는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도철의 부러진 철조가 양쪽 허벅지에 모두 박혔고, 궁기의 극음진기가 실린 왼손이 어깨를 꿰뚫어 좌측 반신을 얼렸다.

“곽청은…… 보기보다 자존심이 강하지.”

울컥.

피를 토해 낸 악중광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저 멀리, 가마 위에 앉아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왕진을 바라봤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했었지……. 너는 틀렸다.”

회광반조일까.

죽음을 앞둔 악중광은 현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소인유어리(小人喩於利)라.”

낭랑한 일갈을 끝으로 악중광의 두 눈에서 서서히 빛이 사라졌다.

까드득―.

가로막던 자하진기가 없어지니, 궁기의 극음진기가 악중광의 몸을 순식간에 꽁꽁 얼려 버렸다.

화산의 수호신은 사라지고, 차갑게 얼어붙은 노인의 시신만이 남았다.

“아아…….”

화산파의 제자들은 두 눈으로 보면서도 그 광경을 믿지 못해 탄식했다.

바늘을 떨어뜨려도 모두에게 들릴 법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한 방 먹었군요. 그것도 화산파의 도인에게 공자의 논어로.”

왕진은 황급히 섭선을 펄럭거렸다. 얼굴에 떠오른 씁쓸한 미소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군자유어의, 소인유어리라. 군자는 도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감히 이 왕진을 소인이라고 부른 것이군요. 매화신검.”

왕진은 입안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텁텁한 심정이 되었다.

“화산파 장문인. 곽청 진인?”

곽청은 자신을 불렀음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서서 꽁꽁 얼어붙은 매화신검의 시신만을 응시했다.

“어찌하겠나요? 항복할 건가요? 항복하겠다면 지금이라도 모든 비급을 내놓고 무릎을 꿇도록 하세요.”

잠시 후, 곽청은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왕진을 노려봤다.

“우리 화산은…… 죽을 때 죽더라도, 불의에 굴하지 않는다.”

곽청은 다시 한 번 외쳤다.

“우리는! 화산의 무인이다!”

결기로 가득한 곽청이 검을 뽑아 들며 달려 나왔다.

주변에 있던 모든 화산의 제자들도 같은 심정인 바.

그들은 결사의 각오로 각자의 신법을 펼치며 왕진과 흑시부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타깝군요. 매화신검의 생각대로라니……. 그럼 교섭 결렬이네요. 좋아요. 이왕 소인이 된 거. 끝까지 소인이 되어 보죠.”

왕진은 푹신한 보료에 다시 주저앉았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없었다.

“모두 죽이세요. 화산파는 불태우는 게 좋겠네요.”

흑색 섭선을 아래로 내리쳐 신호를 보내니, 도철과 궁기, 흑시부대 전원이 짧은 함성과 함께 전투를 시작했다.

그날의 해가 지기 전, 싸움을 멀리서 지켜보던 하오문은 대륙 전역의 각 무림 문파에 화산파가 멸문했음을 알렸다.

매화신검 악중광, 화산파 장문인 곽청의 머리는 효수되어 화산파의 산문에 걸렸다.

후에 화산대혈사라고 이름 붙은 이 사건은 인근의 도인들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화산파 문도들과 그날 모여 있던 섬서성 무인들의 시신을 모으니 그 숫자는 무려 칠백여 명.

화산파가 멸문한 그날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문파는 황실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을 포기하였다.

화산에 적을 든 대부분의 무인들은 사망하였으며, 남아 있다고 한들 동창의 감시가 삼엄했기에 무림 강호에서 떳떳하게 화산의 무공을 쓸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에 화산의 절개를 흠모하던 호사가들은 더 이상 무림 강호에 ‘매화검’은 없다며 한탄하였으나, 그들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칠백여 구의 시신들 중, 오매검협 육모담의 시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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