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14화
제22장 무룡지몽(武龍之夢) (1)
쾌청한 하늘 아래, 늘 무공을 익히는 기합성만 가득했던 무산학관에 색다른 소음이 생겨났다.
망치로 정을 치는 소리, 인부들의 고함 소리와 자재를 옮길 때 나는 굉음들이 학관의 평온을 깨뜨렸다.
무산학관의 학생들은 그 소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미리 교관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다만 삼삼오오 모였을 때 수군대며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어째 점점 더 시끄러워지네. 저거 이름이 뭐랬지? 구룡각이었나?”
“맞아. 구파…… 아니, 팔파일방에서 교관이 한 명씩 온대. 구룡각이 다 지어지면 그분들이 저기에 묵으면서 무공을 가르친다던데?”
“최고다……. 진짜로 무산학관에 오길 잘한 것 같아.”
“그러게. 무관이 되는 지름길인 줄 알았는데 저런 상승 무공까지 배우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근데…….”
“왜?”
“화산파가 빠진 건 좀 아쉽다.”
“쉿! 교관님들이 그러는데 함부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대.”
“매화검은 멋있잖아.”
“그렇긴 하지. 크흠! 그나저나 앞으로 무산학관에 오기 위한 경쟁이 더 치열해지겠지?”
“당연하지. 너 학관 정문에 가 봤어?”
“아, 거기? 요즘도 입학시켜 달라고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
“문전성시(門前成市)래.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매일같이 찾아오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이젠 그 사람들한테 음식을 파는 사람들도 생겼다던데?”
“우와. 엄청나네.”
“학관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건물도 새로 많이 짓고……. 너무 일찍 입학해서 시간이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정도야.”
“그래. 앞으로 배울 게 점점 더 많아질 것 같은데. 우린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는 나가야 하니까…….”
“올해 신입생들이 가장 복 받았지. 안 그래? 내년부터는 입학시험이 더 힘들어질 거 아냐?”
“그야 그렇지만, 좋은 것만은 아닐 거야. 생각해 봐.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온 애들이랑 비교당하지 않겠어? 후배들을 계속 신경 쓰면서 수련해야 할 걸?”
“으으. 상상만으로도 싫다.”
삼 년차가 지난 무산학관의 학생들이 소소한 불만을 토해 내며 멀어져 갔다.
찬성도 있고 반대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변화하는 무산학관에 대해 모든 이들이 기뻐하는 편이었다.
새로운 건물과 새로운 학풍(學風).
무산학관은 환골탈태하듯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
“후우.”
소호는 최대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폐부 속의 모든 것을 내뱉는다는 심정으로 숨이 턱 막힐 만큼 모든 것을 비워 냈다.
일체개공(一切皆空)이다.
굳이 반야경의 불학(佛學)까지 가지 않더라도, 비워 내면 다른 것으로 채워지는 것은 만고의 진리일 터.
텅 비워 낸 곳에 새로운 기운이 크게 들어서는 것을 느끼며 소호는 내면의 그릇을 점점 키워 보려 애썼다.
내공 수련이라는 것은 맨손으로 단단한 흙벽을 파내는 것과 같다.
단번에 눈에 띄는 성과가 나지 않고 지지부진한데, 한편으론 하루라도 빼먹으면 해야 할 일을 안 한 게으른 사람이 된 것처럼 찝찝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소호는 내력을 이용한 대주천을 끝마치고 호흡을 정돈하면서 살며시 눈을 떴다.
“후우우.”
“스읍―.”
수련실에서 함께 내공을 연마하던 나머지 두 사람은 아직 호흡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조서인은 들숨과 날숨이 일정했고, 백설지는 들숨을 한 번 마시고 나니 날숨이 나올 때까지 한참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내공이 진짜 깊구나.’
소호는 감탄하면서 백설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주변에는 살짝 푸른빛을 띤 서늘한 기운이 커다란 원을 형성하고 있는 상태였다.
들숨을 마시면 주변의 기운이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고, 날숨을 내쉬면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와 주변을 둘러쌌다.
소호는 그 모습이 어딘가 신기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백설지는 반각가량 더 호흡을 지속한 뒤, 천천히 푸른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남의 연공을 바라보는 건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야, 소호.”
백설지는 소호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당황하다가 시선을 옆으로 회피했다.
소호는 배시시 웃었다.
“설지 선배는 신기하네요. 어떻게 하면 자연에서 서늘한 음기(陰氣)만 모을 수 있어요? 그것만 모을 수 있는 비법이 있는 거예요?”
“그게 우리 가문의 비기(祕技)인데.”
백설지는 그걸 가르쳐 달라는 것이냐며 어이없어했다.
“원리만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비기인 부분 빼고요.”
“안 돼.”
“궁금한데…… 알겠어요. 어쩔 수 없죠.”
소호는 아쉬운 표정이었다.
백설지는 잠시 고민했지만,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결국 이야기해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극음(極陰)의 지역에서 살면 어느 순간 극음의 기운 중에 생기가 넘치는 따뜻한 기운만을 골라서 들이마시게 돼. 우리의 몸은 적응력이 뛰어나서 살기 위해 변화하거든.”
“몸이 변하는 거예요? 극음의 기운을 걸러내도록?”
“비슷해. 그러다 보면 극음의 진기를 강하게 느끼게 되고, 반대로 극음의 기운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럼 몸에 극음의 기운을 축기 할 수도 있게 돼.”
“와아.”
소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신기하네요. 살기 위해 피하려던 것을 오히려 가까이하고 다루게 되다니.”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모순적이네.”
“지금 이곳에도 극음의 기운이 있어요?”
“……있어. 많지는 않지만.”
“와아.”
소호는 자신도 극음의 기운을 느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백설지는 그런 소호의 생각을 알아챈 듯 단호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극음의 진기를 찾아서 축기하려 하지 마.”
소호는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지!”
“얼굴에 다 드러나.”
“으음, 그런데 어째서요?”
“이 세상 삼라만상은 모두 끊임없이 흐르고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거야. 극음(極陰)이든 극양(極陽)이든 방향만 다를 뿐이지. 다 똑같은 이 세상 기운이잖아? 그런데 그중에 극단으로 간 기운을 억지로 가둬서 몸 안에 쌓기 시작하면…… 큰 힘이 되지만, 반드시 그 대가가 와.”
“대가?”
백설지는 섬섬옥수처럼 매끈한 손을 들어 올렸다.
“후우우우.”
그녀가 숨을 길게 내쉬자 입김이 하얗게 흘러나왔다. 새하얀 살얼음이 그녀의 손등 위를 덮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자꾸만 주변의 기운을 끌어모아 얼어붙고 커지더니 마침내 크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쩍― 하고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얼음 조각은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소호는 놀랐고, 백설지는 당연한 일인 듯 태연해 보였다.
“이게 극음진기야. 얼음이 어는 것은 물론이고 흐르는 기(氣)도 얼어붙어. 칭하는 이름은 많아. 북해빙공이라고 하기도 하고, 극음신기라고 하기도 하고.”
“어? 북해빙공이라는 이름을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몇 번 무림 강호에 나온 적이 있으니까. 익히기는 어렵지만……. 무공이 극성에 이르면 이 세상에 적수가 없다고 해.”
“강력한 무공이네요.”
“그런데 단점이 있어. 극음의 진기는 몸의 진원진기를 갉아먹어. 결국 극음진기를 쌓을수록 생기를 잃게 되는 거야.”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감돌았다.
“극음진기에 단련된 내 가족들 중에도 진원진기가 상한 사람이 있을 정도야. 절대로 우습게 봐선 안 돼.”
백설지는 살얼음이 얼어 있던 손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남아 있던 살얼음을 털어낸 뒤, 다시 매끈해진 손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극음진기가 강해지면 아이도 낳기 힘들어져. 양기와 음기의 조화가 깨지고 생기를 빨아들이거든. 그래서 북해에는 자식이 귀해. 나도 극음진기 수련은 조심해서 하고 있어.”
“…….”
“왜 얼굴이 빨개졌어?”
백설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아니에요. 그냥…… 어. 크흠! 사레가 들어서요.”
소호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친 뒤,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백설지는 의아해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무룡전 때문에 초조하겠지만 그래도 극음진기에는 손대지 마. 태생적으로 음기에 단련된 사람이 아니면 위험해.”
“으음. 알겠어요.”
“조화를 이루는 게 제일 좋은 거야. 특히 너의 내공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안정적이야. 다른 걸 탐낼 필요가 없어.”
소호가 걱정되었는지 백설지는 드물게 말을 많이 했다.
지그시 소호를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에는 평소와 다른 염려의 빛이 가득했다.
소호는 쑥스럽기도 하고 뭔가 고맙기도 해서 그저 환하게 웃었다.
“알겠어요. 극음진기는 탐내지 않을게요.”
그때쯤 가장 늦게까지 집중하던 조서인이 눈을 뜨고 호흡을 마무리했다.
소년은 소호와 백설지를 보며 깜짝 놀랐다.
“웬 얼음이야? 그 비싼걸!”
바닥에 떨어진 얼음을 아까워하는 서인을 보며, 소호와 백설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
달이 중천에 떠오른 밤.
아무도 없는 수련실에 홀로 앉아 있던 소호의 곁에 한 남자가 다가왔다.
평범한 갈색 무복에 회색 장포를 입은 남자.
이립의 나이가 되어 세상을 알 만큼 알았음에도 여전히 소년 같은 치기가 가득한 사내다.
“진구 삼촌!”
소호는 진구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진구 역시도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성큼 다가와 소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우아아. 하지 마요, 삼촌.”
“하지 말라고? 싫어. 날 못하게 하려면 십 년은 멀었다, 이 녀석아.”
“십 년 뒤면 삼촌은 나 못 이길 건데?”
“그동안 나는 노냐? 꿈도 아무지구나.”
“으익!”
소호와 진구는 잠시 툭탁거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요 귀여운 녀석아. 생각은 좀 해 봤냐?”
“으음…….”
어두운 밤에 두 사람이 몰래 만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진구가 학관에 온 날부터 이어져 왔으며 그동안 소호는 진구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워 왔다.
그리고 소호의 문제점을 알아챈 진구가 어제 숙제를 하나 냈던 것이다.
“으음…… 그게…….”
소호가 망설이며 답을 하지 못하자, 진구가 수련장 한편에 놓인 십팔반병기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은 너의 성명병기를 정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