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67화 (296/686)

7권 17화

제22장 무룡지몽(武龍之夢) (4)

마지막이란 무엇일까.

유준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인적이 드문 부둣가에서 조개를 꿰어 만든 팔찌나 팔며 살아가던 시절. 온갖 폭력과 학대를 관심으로 여기며 살아오던 한 꼬마는 진정으로 그에게 따스한 눈빛을 보내 준 한 노인을 만나 세상을 알게 되었다.

하찮은 맹인 소년을 인간으로 대해 준 건 노인이 처음이었다. 투박했지만 인간미가 있었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주변의 그 누구보다 그릇이 컸다.

그는 잠깐의 인연으로 보법과 무공을 가르쳐 주었다. 여러 가지 일들을 시킨 뒤 따뜻한 목소리로 유준이 검술(劍術)에 재능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유준의 머릿속에선 그때의 느낌, 감정, 충격들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가치를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추묵환은 유준에게 말해 주었다. 가슴을 펴고 살아가도 된다고, 눈도 잘 안 보이는 맹인 애물단지가 아니라 유준이란 소년은 재능이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것을 그가 가르쳐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유준이 검술에 미친 듯이 빠져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로지 검술만이 그를 숨 쉬고 살게 만들어 주었다.

모든 것이 좋았던 그 날.

하지만 인연은 추묵환과 유준을 이어 주지 않았다.

이별 후의 정(情)이라는 것은 저주였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고 웃음이 나오지만, 지금은 그가 곁에 없다는 것을 떠올리면 북풍한설을 맨몸으로 맞는 것처럼 시리도록 차가운 감정이 온몸에 사무친다.

육신의 아픔은 언젠가 낫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다.

한번 알아 버린 이상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바로 정(情)이다.

그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유준은 스스로 나서서 행동했다.

그저 하루하루 추묵환을 기다리며 어쩔 수 없이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없이도 심장이 뛰는 삶을 살기 위해.

유준은 자신의 검으로 과거의 삶에 마지막을 고했다. 모든 것을 잘라내고 왕진을 따라나섰기에 지금의 ‘백귀(白鬼)’ 유준이 있다.

“추 대인. 왕 공공은 당신과는 달라요. 그는 대인처럼 따뜻하진 않지만…… 저의 외로움을 이해해 주거든요.”

유준은 집기가 아무것도 없는 살풍경한 방 안에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잔잔한 바람처럼 시작된 검술이 거센 파도를 닮은 해풍이 될 때까지.

천변만화의 묘리를 담은 검술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떨 때는 바다를 지배하는 해왕(海王)의 기예가 되었다가, 어떤 때는 하늘을 노니는 창궁(蒼穹)의 검술을 닮아 갔다.

지나온 시간, 검으로 겨루면서 적들에게 배운 온갖 검술들이 부둣가에서 배웠던 ‘해풍’이라는 기본공 하나에 다 담겼다.

지난 오 년간의 성과.

그야말로 유준이 지금껏 걸어온 삶의 흔적이 무공에 녹아 있었다.

“후우.”

유준은 오늘도 해풍 초식을 일천 번 반복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항상 갖고 다니던 하얀 천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 냈다.

“이걸로 이천 번째. 드디어 이천 일이 지났네요. 오늘 하루도 자신을 지키고, 적은 참(斬)하겠습니다.”

유준은 추묵환이 해 주었던 말을 경전처럼 읊조린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대로라면 이제부터 명상을 하며 살기가 넘치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하지만, 오늘은 그 과정을 생략했다.

때로는 승리를 위해 살기를 품어야 할 순간이 있었다.

오늘 있을 한 소년과의 싸움이, 바로 그 순간이다.

“소호.”

유준은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소년을 떠올렸다.

“너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지.”

부모, 행복한 가정, 절친한 형제, 우애 깊은 친구들.

그리고, 추묵환.

“하지만 내겐…… 오로지 검 하나뿐이야.”

밖으로 나아가는 그의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강자는 강자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어. 그렇기에 살아남는다.”

유준은 무룡전의 싸움을 향해 나아갔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점점 강렬해지는 유준의 기세가 무서운 살기를 품고 내부로 집약되었다.

다듬어지고, 다듬어지고.

최후에는 주변으로 아무런 기세도 흘리지 않으며 유준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

소호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마음이 들뜨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은자촌에서 지루한 나날들을 보내다가 방문자의 기척에 놀라 황급히 달려 나갔던 그때가 생각났다.

소호의 삶은 일정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공과 같았다.

배진화라는 남자가 이름이 기옥이라는 건방진 소년과 함께 은자촌을 찾아오고, 그 뒤로 벌어진 여러 가지 일들이 운명처럼 소호를 이곳 무산학관까지 이끌었다.

‘드디어 이 날이 왔어. 무산제전이야.’

소호는 아이들이 주변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이유를 절절히 공감할 수 있었다.

무산학관의 존재 의의는 기본적으로 무(武)에 있었다.

무를 닦는 자, 무인이다.

무인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강해지길 원한다.

하찮은 인생을 살기 위해 무예를 수련하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입신양명이든, 자신의 도를 닦기 위해서든.

다른 그 누구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가기 위해 각자 절차탁마의 마음으로 수련하는 존재가 무인이었다.

무산학관은 그런 무인들만을 모아 두었다.

그것도 이백여 명의 어리고 자부심이 강한 소년, 소녀들이다.

경쟁을 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기숙사끼리의 다툼?

학생들끼리의 분쟁?

전부 싸우고 싶어서 핑계를 대는 것일 뿐이다.

예의로 치장하여 조심할 뿐이지, 결론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바는 다 똑같다.

모두의 머리를 짓밟고 올라서서 최강자의 칭호를 얻는 것.

그것만이 무인의 바람 아니겠냔 말이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도전할 수 있는 날이 왔다.

무산제전.

무룡전과 군룡전으로 이루어진 학관의 축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후우.”

소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 학생들의 분위기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무산제전은 모두가 참가자이며 또한 관객이기도 한 축제였다.

그들은 모두, 앞으로 벌어질 싸움들을 기대하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올해 무룡전은 기대되네. 그거 알아? 사대방장들이 다 무룡전에 출전한 거? 이건 무산학관 개관 이래 최초라고. 한번 말해 봐. 우승은 누구일 것 같아?”

“우승? 누구긴 누구야. 이태산이지. 현무방의 방장은 막강하잖아?”

“무슨 소리야. 청룡방이지. 태성천이야말로 무림 강호에 나가면 검성이 될 인물이야.”

“검성이라니. 웃기는 소리. 불패검도 못 꺾은 사람이 검성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어.”

“불패검…….”

“쯧, 백호방은 응원하고 싶지 않은데.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래. 불패검 유준은 강하잖아. 인정해야 해.”

“유준은 강한데 어째서 정이 안 갈까?”

“차가워서 그래. 웃으면서 친절하게 굴지만 어딘가 벽이 있잖아.”

이백여 명의 무산학관 학생 총원은 연무장에 모여 있었다.

이윽고 학관장 철우의 연설을 시작으로 무룡전이 개최되었다.

현재의 무림 정세가 어쨌니 저쨌니 하면서 올해가 지나고 나면 학관은 큰 변화가 이뤄질 거라면서 몇 가지를 이야기했지만…….

소호는 솔직히 듣고 있지 않았다.

한 사람.

무대 위에 있는 소년을 응시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소호야. 오늘 유준 선배 분위기가 엄청나다. 보고만 있는데도 느낌이 이상해.”

조서인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손바닥으로 자신의 팔을 마구 비볐다.

“이상하다. 특별히 바뀐 건 없는 것 같은데…….”

“아니.”

소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유준을 바라보다가 한 가지를 알아챘다.

“새 옷 입었네. 유준 선배, 기분 좋은가 보다.”

“응? ……어어? 그래? 아니 그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소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했으나 조서인은 눈이 동그래져서 소호를 바라보았다.

“저걸 어떻게 구분해? 그냥 평소에 입던 흰옷이랑 똑같은데?”

“아냐 달라. 어깨 부분이 빳빳하고 더 하얗잖아. 그보다 유준 선배가 첫 번째 시합이지?”

“으응.”

소호는 얼떨떨해 보이는 조서인으로부터 다시 유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준 선배. 잠시 안 본 새에 더 강해졌네요. 게다가 자제를 하지 않아서 살기가 슬금슬금 새어 나와요.’

소호는 유준의 옆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지만, 서 있는 자세, 내부에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기운만으로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따가 저런 사람이랑 싸운단 말이지.’

소호는 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유준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누가 이길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하다니.

‘최고의 대결이네.’

소호는 소리 내어 웃고 싶어졌다.

툭툭.

그때 옆에서 소호의 소맷자락을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소호 오라버니. 나는? 나는 새 옷 입은 것 같아?”

대미미는 작은 새처럼 입을 앙 다물고 소호를 힐끔거렸다.

소호보다 덩치가 더 큰 미미가 새빨갛고 윤기가 흐르는 고급스러운 비단 무복을 입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는 양 갈래로 정갈하게 땋아 두고 붉은색 장포를 맵시 있게 걸치니 매우 잘 어울리면서도 인상이 강렬했다.

“응. 미미도 새 옷 입었네? 진한 홍색도 잘 어울려.”

“헤헤, 다행이다. 할아버지가 보내 주셨어.”

“연 할아버지가?”

“응!”

“그래서 붉은색이었구나!”

소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연사독은 끊임없이 대미미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전에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진 짐꾼이 옷이라면서 미미의 방에 갖다 주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입은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응?”

“오라버니가 더 강해.”

대미미는 배시시 웃었다.

아무런 걱정도 없는, 순수한 시선이 소호를 향해 믿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맞아.”

소호는 주문처럼 되뇌어 보았다.

“나는 강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들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발판 삼아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유준 선배의 첫 번째 상대가 좀 수상하네요.”

병약해 보일 만큼 얼굴이 새하얀 소년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소호에게 말을 건넸다.

“수상하다니? 상대방이?”

“네. 솔직히 강한 사람들끼리 첫 번째에 붙어서 떨어져 버리길 바랐는데요. 그건 안 되더라도, 그렇다고 해도 너무 이렇게 대놓고 순서를 짜다니.”

“응?”

한데 모여 있는 교관들과 각 기숙사 방장들을 노려보는 섭주해는 책사다운 눈빛으로 상황을 살폈다. 그의 눈에는 뭔가 이상한 것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유준 선배의 첫 번째 상대가 누군데?”

“소호 형도 아는 사람이에요.”

섭주해는 조서인을 바라봤다.

조서인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나?” 하고 되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서인과 싸웠던 사람이요.”

“아……!”

“어? 아하! 그 개 몽둥이 쓰는 친구 말이지? 이름이…… 명로? 명로 맞아?”

“네.”

섭주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상대는 주작방의 신입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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