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19화
제22장 무룡지몽(武龍之夢) (6)
태성천이라는 이름은 무산학관 학생들을 흥분시켰다.
청룡방의 최강자.
가면철왕이 태성천을 보고 다음 세대의 검성이라고까지 평했다는 실력자.
무공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모두 이견이 없는 만큼 그의 등장에 학생들이 열광하기도 쉬웠다.
특히 청룡방 학생들이 모여 있는 쪽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오오! 청룡방의 힘을 보여 주자!”
“불패검에 질 수 없다!”
유준이 한 수를 보여 주었으니 태성천도 한 수를 보여 줘야 한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단상의 우측에 위치해 있던 학생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한 소년이 걸어 나왔다.
십오 세 정도의 소년이다.
입고 있는 푸른색 비단 무복은 구김 하나 없이 깔끔했다. 적당한 체구에 팔다리가 길고 손가락도 길어서 타고난 검사라는 느낌을 주었다.
소년의 하얗고 매끈한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길게 기른 머리를 뒤쪽으로 늘어뜨린 채 사뿐사뿐 걷는 모습에선 기품이 흐르는 듯했다.
“와아아!”
“태성천! 태성천!”
아니나 다를까. 주변의 반응은 뜨거웠다.
남녀를 불문하고 태성천을 연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차분한 걸음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차가운 눈빛으로 정면만을 보는 모습은, 왜 사람들이 태성천에 기대를 거는지 알 수 있게 만든다.
그는 한 자루의 ‘검’이 생명을 얻은 것 같았다.
유준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화려하고 고고한 검이다.
“어……. 그러니까.”
“새로운 걸 배웠네요.”
조서인은 말문이 막혔는지 머뭇거렸고, 섭주해는 갑자기 뭔가를 고심했다.
“인상……이라는 건 중요하군요. 소호 형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인상 깊게 만드는 게 좋겠어요…….”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호 형. 일단 잘 다녀오세요. 이길 수 있으시죠?”
주해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별로 고민도 하지 않은 말투였다.
반면에 화들짝 놀란 것은 조서인.
그는 잔뜩 당황한 얼굴로 주변에 혹시 들은 사람이 없는가 두리번거렸다.
“야야, 그런 말은 조용히 좀 하면 안 되냐?”
“왜죠? 서인은 소호 형이 이기지 못할 것 같은 가요?”
“어? 어어? 아니, 그건…….”
조서인은 한 대 얻어맞은 듯 우왕좌왕하다가 이내 진지한 얼굴로 고민했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태성천 선배는 엄청나다고 듣긴 했는데……. 차세대의 검성이니 뭐니……. 근데, 신기하네. 이상하게도 소호가 지는 모습은 상상이 안 돼.”
마침내 조서인이 확신이 가득한 얼굴로 소호를 바라봤다.
“그래. 소호가 이길 거야.”
“맞아요. 소호 형은 승리의 상징이 되어야 하거든요.”
소호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슨 소리야, 그게. 나도 질 때는 져. 그래도 응원해 주니 고맙네.”
소호는 어깨를 으쓱한 뒤 앞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대미미가 소매를 한 번 잡아당긴 뒤 힘내라는 듯 양팔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잘 다녀와, 오라버니!”
소호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야야.”
“아파?”
대미미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힘 조절을 잘못했나……?”
“아냐, 아냐. 괜찮아.”
소호는 손을 내저었다.
“원래 멍이 좀 들어 있어서 그래. 신경 쓰지 마, 미미야.”
“어? 정말? 소호 오라버니. 멍이 왜 들었어?”
“엊그제 대련하다가 그랬어. 괜찮아. 고마워, 미미야.”
소호는 길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졌다.
모두가 응원해 준다.
소호가 패배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 모습이 조금 부담스러우면서도, 마음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다녀올게!”
소호는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단상 가까이에 있던 학생들이 자연스레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맨 앞에 있던 두 사람이 소호의 어깨를 툭 두드려 주었다.
“봉천 선배, 철웅 선배.”
두 사람 모두 똑같은 무룡전 출전자였다.
팔다리가 길어서 유술과 체술에 뛰어난 봉천과 스스로 ‘일대 다수 개싸움’에 능하다고 표현하는 철웅.
두 사람 모두 소호를 기특하다는 듯이 웃어 주었다.
“결승에서 만나자고 하고 싶긴 한데……. 우리는 대진표에 이태산이 있더라.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소, 소호는 할 수 있을 거야. 자, 잘 다녀와.”
“그래. 저 이야기 속에서 나온 것 같은 미남 검객한테 한 방 날려 줘.”
두 사람의 따뜻한 응원까지 받으니 소호는 자신이 백호방의 대표가 된 것처럼 힘이 나는 것을 느꼈다.
“네. 다녀올게요.”
힘차게 대답하고 단상 위로 올라섰다.
단상 위는 다른 세계 같았다.
위로 올라서자마자 사방에서 시선이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호기심, 적의, 기대.
온갖 종류의 평가하는 듯한 시선들이 무형의 압력을 갖고 쏟아졌다.
“으음.”
소호에게 있어 타인의 시선들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선들은 이전에도 몇 번이나 겪어 보았다.
그보다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소호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 아는 것들을 떠올렸다.
‘태성천. 사신회의 한 사람. 섬세하고 정확한 검술의 소유자. 유준 선배가 인정한 강자.’
안면이 있는 사이였지만 그 실력은 솔직히 말하면 모른다. 유준이 강하다고 말했으니 강할 것이다. 애초에 사신회에 속해 있다면 왕진이라는 황실의 거인이 인정한 소년들 중 하나라는 뜻이니 약할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그뿐이다.
무공이란 직접 겨뤄 봐야만 아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은 태성천도 똑같은 듯했다.
“백호방의 작은 호랑이.”
태성천이 입을 열자 주변의 관중들이 조용해졌다.
“아직 덜 자란 몸, 학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생에 불과하지만, 불패검이 인정할 만큼의 재능을 지녔다던데.”
태성천의 눈빛은 차가웠다.
유준과 만났을 때 보였던 특유의 승부욕은 보이지 않았다.
“그 실력을 한번 보겠다.”
스릉―.
날카로운 광채가 흐르는 청강검을 뽑아 정면을 겨누는 자세에 조금도 허점이 없다.
십오 세의 소년은 이미 성인에 가까운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서서 검을 세우니 정면 어디로든 공격해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소호는 웃었다.
예상대로다.
사신회의 일원은 약하지 않았다.
지닌바 재능으로는 무산학관, 아니 명나라 최고의 재능들만 모아 놓은 곳이 사신회니까 말이다.
‘태성천 선배는…… 방심은 하지 않지만, 나를 눈 아래로 보고 있네.’
소호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오연함이 느껴졌다.
그 순간 가슴에서 왠지 모를 호연지기가 샘솟았다. 수백 번의 대련을 하는 동안 진구에게 들었던 조언들이 떠올랐다.
“상대가 날 우습게 본다? 그건 그럴 만하니까 우습게 보는 거야. 내가 만만해 보일 만한 실력이라는 거지. 우습게 보면 허점이 나오니까 좋지 않냐고? 그건 어중간한 놈들한테나 통하는 거야. 그런 놈들은 날 우습게 보든, 어렵게 보든 이길 수 있어. 문제는 진짜 강한 놈. 강한 놈들은 상대가 약할수록 더 과감하게 몰아치거든. 만만하게 보이지 마. 만만하게 보는 것 같으면 오히려 도발을 해. 흥분하게 만들어.”
‘그래.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소호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한 뒤,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 전력을 다해 주세요. 저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서요.”
“약속?”
“네. 유준 선배랑 결승전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뭐?”
“방심하는 사람을 이기고 올라가면 멋있지가 않잖아요?”
소호가 햇살처럼 빙긋 웃어 주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태성천의 말문이 막힌 것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던 학생들도 할 말을 잃고 굳어 버렸다.
“하하하핫!”
웃음을 터뜨린 건 단상 가까이에 있던 철웅뿐이었다.
“저 봐.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걸물일 줄 알았다니까!”
잔뜩 신이 난 목소리의 철웅을 봉천이 황급히 말렸다.
단상의 우측에 몰려 있던 학생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특히 앞쪽에 있던 청룡방의 주목받는 후기지수, 원형주가 얼굴이 벌게진 채 외쳤다.
“건방진 놈!”
그 말을 시작으로 모든 이들이 시장통처럼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태성천 따위는 안중에도 없구나! 장하다! 장소호!”
“배포만으로는 천하제일이구만! 신입생 주제에!”
“그래도 너무 건방져!”
“소호야! 당당해서 좋다!”
비율은 거의 반반.
자기들끼리 싸울 것 같은 기세로 응원의 목소리가 경쟁하듯 커져만 갔다.
철표 교관이 나서서 대련의 시작을 알리고 종을 치자 그제야 간신히 조용해졌다.
‘성공했어.’
소호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태성천은 얼굴이 잔뜩 굳어져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입꼬리가 한쪽만 위로 올라가 있었다. 사납게 곤두선 눈빛이 소호에게로 쏟아졌다.
“말은 청산유수군.”
흥분한 태성천은 검 끝으로 소호의 미간을 겨누었다.
“삼 초식 안에 무릎 꿇리겠다.”
“그래요?”
스릉―.
소호도 무기를 뽑아 들었다.
칼날이 뭉툭하게 서 있는 박도였다.
오른손으로 칼을 들고, 몸을 비스듬하게 돌렸다. 하체는 살짝 굽혀서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힘들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는 소호는 얄미울 정도로 순수한 표정이다.
태성천이 낭랑한 기합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쒜에엑―.
태성천은 온몸의 탄성을 한곳에 모은 듯했다. 허공을 찌르는 청강검. 바람 소리가 갈라져 아찔한 소음을 냈다.
소호가 옆으로 살짝 고개를 젖혀 피해 내자 태성천의 눈빛이 번뜩였다.
피슈슉―.
소리는 한 번만 찌른 것처럼 났지만, 두 번의 찌르기가 소호의 머리 옆을 관통했다.
소호는 다급하게 몸을 두 번 젖혀 검을 피했다.
눈앞에서 검 끝이 지나갔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피부가 베였을 일격이다.
거기서 끝인가?
아니다.
연속으로 세 번을 찌른 태성천은 곧바로 손목을 한 번 돌리며 부드럽게 검을 회전시켰다.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리치는 참격.
소호는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움직임으로 태성천의 옆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살짝 늦었던 모양이었다.
스윽―.
검 끝에 맺힌 예기(銳氣)의 여파로 소호의 왼쪽 어깨 옷자락이 베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소호는 살짝 시선을 내려 옷자락이 잘린 모습을 확인했다.
한 치 반.
손가락 한 마디가 조금 넘는 길이의 옷이 베여 있었다.
‘빠르다! 태성천 선배 강하네. 반 박자? 아니, 반의반 박자 정도 더 빨라야겠어.’
막강한 패기는 없으나, 태성천의 검술은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걸로 일 초.”
소호는 훌쩍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빙긋 웃는 소호.
태성천의 눈에선 불꽃처럼 격렬한 감정이 타올랐다.
소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 초식 남았네요.”
쿵.
태성천은 말을 섞지 않고 거칠게 진각을 밟으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