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71화 (300/686)

7권 21화

제22장 무룡지몽(武龍之夢) (8)

태성천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말문이 막힌 듯,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멍하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름답군.”

태성천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상처를 따라 쭉 내리그었다.

송골송골 맺혀 있던 핏물이 손끝에 살짝 묻어났다.

모든 상처의 깊이가 일정했다.

깊거나 얕은 부분 없이, 모든 부분이 똑같은 깊이로 베여 겉에 살짝 피가 맺힌 정도를 유지했다.

“완벽한 투로에 귀신같은 힘 조절……. 아름다울 정도다.”

“어……. 감사합니다?”

“더 베려면 벨 수 있었겠지.”

소호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너는 검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랬지?”

태성천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태성천뿐만이 아니다.

대결을 지켜보던 모두가 소호의 대답에 집중하고 있었다.

“검기요?”

소호는 별다른 고민 없이 답했다.

“으음, 필요한가요? 박도의 길이가 충분해서. 굳이 쓸 필요가 없었는데.”

“……하핫. 하하핫.”

태성천은 눈을 부릅뜨며 놀라더니,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가. 그런 거였군. 길이가 충분하면 검기란 필요치 않은 거군. 그래. 네 덕분에 큰 걸 알게 되었다.”

“어…… 내가 틀린 건가? 이상해요?”

“그건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겠지.”

태성천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일정한 깊이로 벨 수 있게 된 게 나는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너는…….”

태성천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너는…….”

그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목 끝까지 올라온 단어를 내뱉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뒤로 이어질 단어는, 이 싸움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떠오른 말과 같았다.

―천재.

이해할 수 없는 존재.

불가해(不可解)하기에 신(神)처럼 경외심이 들고, 또한 요괴(妖怪) 같아 거부감이 드는 존재였다.

“나는 무룡전에 참가하면서 불패검만을 생각했는데, 그 전에 발목을 잡힐 줄은 몰랐다. 그것도 신입생에게.”

스릉―.

태성천은 검을 다시 집어넣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찢어진 옷은 어찌할 수 없었지만 허리띠는 남은 부분만을 다시 묶어 앞섶을 추슬렀다.

소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끝이에요?”

“더 해서 뭘 하게. 창피를 더 당하라고? 됐다. 그리고 나는…… 내년이 있다.”

철표 교관에게 신호를 보내는 태성천에게선 절망이 느껴지지 않았다.

패배하였으나 받아들였고, 또한 여전히 승부욕을 간직한 채 내년을 기약한다.

분하지 않은 건 아닌 듯했다.

돌아선 뒷모습.

검병을 쥐고 있는 왼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태성천은 강한 소년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건방지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청룡방의 많은 학생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것이다.

“명심해라. 먼저 가는 것만이 멀리 가는 길은 아니다.”

태성천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철표 교관이 중앙으로 나와 소호가 승리했음을 알리는 동안에도, 그는 뒤돌아보는 법 없이 처음과 똑같은 걸음걸이로 연무장 밖을 빠져나갔다.

환호성은 없었다.

지켜보던 무산학관의 학생들은 아직도 충격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모두 같은 길을 걸어가는 무인으로서 이 상황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학생들에게 들불처럼 번졌다.

“도대체…….”

“태성천이 지다니……!”

잠시 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을 때, 백호방의 아이들만이 소리치며 환호했다.

“잘했다!”

“역시 대단하다! 신입생 수석!”

“백호방 최고! 소호 최고!”

“역시! 오라버니!”

소호는 그를 응원하는 익숙한 목소리에 웃어 주다가 힐끗 옆을 바라봤다.

연무장의 옆에 지어져 있는 이 층 전각 위, 옥석이 달린 검은색 주렴이 드리워져 있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아서 무룡전을 관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숫자는 다섯 명 정도 될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중에 유난히 덩치가 큰 한 사람만큼은 정체가 짐작이 됐다.

‘철우 학관장님인가?’

소호는 왠지 모르게 그쪽이 신경 쓰인다고 생각하며 단상에서 내려갔다.

백호방 아이들이 환호하는, 자신이 돌아갈 곳으로.

***

“후훗, 대단하네요. 청룡방의 태성천도 장래가 기대되는 뛰어난 친구였는데, 그를 고작 열두 살의 꼬마가 꺾는다? 저 친구는 장래에 얼마나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을까요?”

옥석이 달린 검은색 주렴 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인물이 나긋나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환관 왕진은 즐거워 보였다.

연신 웃는 얼굴, 목소리는 들떠 있기까지 했다. 그는 소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학관장?”

그런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무산학관의 학관장, 가면철왕 철우는 연무장 위에 있는 소호를 보며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학관장!”

왕진이 두 번을 더 부르자 철우는 그제야 대답을 해 주었다.

“으음. 그렇소. 뛰어나군. 무척 뛰어나. 뛰어나긴 한데…….”

“흐응?”

왕진은 흥미롭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가면철왕이 이렇게 얼빠진 모습은 처음 보는군요?”

“그런가.”

“그 정도로 특별한가요?”

왕진이 되묻자 철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더 이상 말이 없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저 소년에게 함부로 손을 뻗으면 큰 코 다칠 것이오.”

“후훗, 저 소년의 아버지 때문에요?”

“그렇소.”

검은색 항우 가면 사이로 철우의 눈이 엄중한 경고의 빛을 띄었다.

“잘 알고 있어요. 천하에 짝이 없는[無雙:무쌍] 그 사람 때문에 저도 항상 한 번 더 고민하고 행동하거든요.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학관장은 모를 거예요.”

“으음.”

“후훗, 걱정하지 말아요. 소호 저 친구한테는 이미 말해 두었으니까.”

“뭐라고 말했소?”

“함께 큰일을 해 보고 싶긴 한데, 본인이 잘 고민하고 선택하라고 말해 두었어요. 학관을 졸업할 때쯤 선택하겠죠. 후훗, 그래도 놓치기 싫기는 하네요.”

왕진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철우의 눈빛은 여전히 진지하다.

그는 침중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경고했다.

“왕 공공, 무림을 일통하다시피 한 그대의 무명(武名)은 사해를 떨쳐 울리고 있소. 그렇다 한들,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은 존재하오.”

“알아요, 알아. 그를 아는 자들은 늘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리고 저도 직접 만나 본 결과……. 비슷한 생각이에요.”

왕진은 탁, 소리가 나게 섭선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항상 그와 ‘공통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싶네요. 대답이 되었나요?”

“으음.”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적이 되고 싶지 않아요.”

철우는 그리 만족스러워 보이진 않았으나, 그쯤하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요?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요. 저 친구는 학관장이 놀랄 만큼 특별한가요?”

철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그렇소. 그런데 좀 지나친 것 같기도 하군.”

“지나치다?”

“재능 말이오.”

철우의 목소리엔 염려가 가득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은 하늘이 빠르게 가져간다지.”

“흐응.”

왕진은 검은색 섭선을 흔들었다.

“한낱 미신이에요.”

“글쎄.”

“미인박명이니 하늘의 뜻이니, 천벌이니……. 믿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죠.”

“천벌이라. 말투가 의미심장한데. 어디서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소?”

툭 던지듯 내뱉은 말에 왕진의 얼굴이 굳었다.

“흥, 학관장은 본 공공을 놀리는군요.”

“그럴 리가. 구파일방을 팔파일방으로 만들고, 강력한 무림 문파들을 모조리 무릎 꿇린 흑시부대의 주인을 어찌 놀리겠소.”

“후후후훗.”

왕진의 웃음이 나지막하게 깔렸다.

“그거 아나요, 학관장? 당신이 조금만 무능했더라면 지금 그 말을 이유로 목을 쳤을 거예요.”

“못할 거요. 나는 그렇게 버리기엔 너무 유명하고 유능하거든.”

철우는 왕진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목숨을 내놓고 사는 자.

배를 쨀 테면 째 보라는 식의 막무가내였다.

왕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철우를 응시하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천하제일 무산학관의 명망 높은 학관장? 가면철왕은 무슨.”

“왜? 문제 있소?”

“객잔 파락호나 다름없는 이 모습을 강호 무림이 알아야 할 텐데.”

“후하핫! 그걸 알면 강호 무림인들은 욕할 만한 이유가 늘어서 더 좋아할지도 모르지. 지금도 미움을 꽤나 받고 있는데 말이오.”

왕진과 철우.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은 채 정면만을 바라봤다.

흑시부대와 무산학관.

시작할 때는 먼 미래를 보고 이해관계를 함께한 사이였으나, 이젠 온갖 일이 겹쳐서 복잡해진 두 사람이다.

특히 이번에 팔파일방의 무공이 무산학관으로 모이면서 그 복잡함은 극에 달했다.

차마 왕진을 욕하지는 못하는 무림인들이, 비겁하게도 모두 무산학관의 학관장인 철우를 비난했다.

“맹주는 잘 지내나요?”

“……모르겠소. 최근엔 마음이 안 좋은지 농사만 짓고 계셔서.”

“흥! 이겨 내라고 하세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

“으음…….”

“현명한 결정을 해 놓고 이제 와서 고민하다니. 쓸데없는 짓.”

왕진은 일축해 버린 뒤, 푹신한 보료에 몸을 묻었다.

“빨리 결승을 보고 싶네요.”

철우는 왕진의 등 뒤에 시립해 있는 검은 복면의 두 사람을 힐끔 바라봤다.

맹수가 목줄이 묶인 채 엎드려있는 듯한 묘한 위압감을 가진 두 사람이다.

철우는 그들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한 익숙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꼈지만, 미간을 좁히고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파란을 일으킨 소호의 경기가 끝나고, 무룡전은 결승을 향해 진행되고 있었다.

***

유준은 그가 가장 기대하던 경기 중의 하나였던 소호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상상이 된다.

정교함을 겨루는 듯한 섬세한 대결.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역시, 너뿐이구나. 소호.”

유준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집혼기를 꺼내 들었다.

소호는 모르지만 유준이 가진 집혼기에는 비밀이 있었다. 노란빛이 감도는 호안석. 주변을 감싼 은판의 문양은 소호가 가진 것과 똑같은 형태였다.

유준은 얼마 전의 왕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