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72화 (301/686)

7권 22화

제22장 무룡지몽(武龍之夢) (9)

“유준, 나의 검! 그대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 싸움을 해 주었죠. 그대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승리는 없었을 거예요. 저는 항상 감사하고 있답니다.”

왕진은 언제나 그렇듯 나긋나긋한 말투로 칭찬해 주었다.

사해의 무림 문파를 모두 평정한 자.

황실의 명이라는 미명하에, 흑시부대의 무시무시한 무력(武力)으로 무림 강호를 제패한 자답지 않은 친근한 태도였다.

사천에서 개봉부까지 구주(九州)를 평정한 사실이 소문으로 퍼져, 이젠 무림 강호에 왕진이란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왕진이 유준을 대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흑색 섭선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 그는 정말로 유준을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럴 게 아니지. 선. 어서 가서 맛있는 차와 다과를 가져오렴. 마차 안에 보관해 두었던 그게 좋겠다. 가장 큰 것으로 내와야 해.”

왕진은 항상 곁에 두는 선이라는 이름의 소동을 내보냈다.

그는 유준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 줘야 한다는 듯이 행동했다. 설령 그게 가식일지언정 사람인 이상 그런 태도가 고맙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준은 포권을 취하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과찬의 말씀.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왕 공공.”

“후훗. 아니에요.”

왕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해서 일을 그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준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인정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라? 안 믿는군요? 예를 들어 볼까요? 알다시피 얼마 전에 나는 화산에 갔었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싸우는 길을 택했어요. 무림맹주가 절대로 싸우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말이죠.”

“아…….”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처음부터 나를 공손하게 대하기만 했다면 그냥 화산파의 무공 절반만을 받고 지나쳤을 테죠. 그런데 그 쉬운 일을 못했어요. 화산이.”

왕진은 우습다는 듯이 섭선으로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그런 거예요. 세상은 생각보다 더 혼돈에 빠져 있어요. 그래서 저한테는 맡은 바 임무를 사심 없이,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소중하답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그래서 모든 게 잘 풀린 지금, 저는 그대에게 상을 내리고 싶네요. 갖고 싶은 게 있나요?”

“갖고 싶은 것……?”

유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오르지만 그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후훗, 유준,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나네요.”

왕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걸었다.

들고 있던 섭선이 마치 꼬리처럼 흔들거렸다.

“처음 봤을 때, 그대는 길을 잃은 어린아이 같았죠. ‘산적 소굴’의 도적들을 고작 십 대 초반의 나이에 모두 베어 버린 영웅임에도 말이에요. 마당에 희생자 모두를 묻어 준 채 멍하니 서 있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네요.”

“…….”

“그대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내가 그때 갈 곳이 있냐고 물었을 때, 그대는 지금과 똑같이 답했답니다. ‘딱히 없는 것 같다.’라고.”

유준은 호의에 익숙지 않은 편이었다.

그가 태어난 어촌에선 호의를 베풀기보다는 어떻게든 외지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내 살아가야 한다는 것만을 가르쳤다.

그런 마을이니 약자에 대한 분위기는 어땠겠는가.

맹인인 유준은 밥값을 못한다며 얻어맞고 괴롭힘당하는 놀림의 대상이었을 뿐, 애정을 받은 기억이 전혀 없다.

추묵환이라는 사람을 만나 자신의 가치를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사람 취급을 못 받았으니 말이다.

유준은 그 시절, 살아남기 위해 시종일관 웃어야 했던 것만 기억했다.

“산적 소굴……. 예, 그랬죠.”

과거에 왕진은 유준을 보자마자 말했었다.

너는 지금 어촌이 아니라 ‘산적 소굴’을 소탕한 거라고.

어린 나이에 큰일을 해냈으니 자신이 더욱 크게 키워 주겠다고 말이다.

“저는 그때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였을 뿐입니다. 왕 공공께서 키워 주셨죠.”

“후훗, 뿌듯하군요.”

“저는 당신의 검입니다. 딱히 무언가를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런.”

왕진은 그 대답이 틀렸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나요, 유준?”

“누굽니까?”

“대가가 필요 없는 사람이에요. 그들은 윗사람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죠. 돈이나 욕망으로 통제할 수가 없거든요. 어떤 ‘신념’에 부합해야만 따르는 자들이니 그만큼 까탈스럽고 거슬리는 자들도 없답니다. 반대로 말하면 신념에서 어긋나면 적이 된다는 것이겠죠?”

왕진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황실의 꼬장꼬장한 영감 같은 말은 하지 말고, 솔직하게 바라는 걸 말해 주세요. 그래야 내 맘이 편해요, 준.”

왕진의 목소리에 힘이 담겼다.

이번엔 정말로 뭐든지 말하라는 듯했다.

“음…….”

유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원하는 게 딱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왕진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두 명’이 문득 궁금해졌다.

유준은 가혹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왕진이 아무리 잘 대해 주더라도 그는 왕진의 잘 드는 ‘검’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위치를 알고 있다.

그게 왕진과 유준이 서로 간에 암묵적으로 지켜오던 ‘선’이었다.

“왕 공공, 그들은 왕 공공의 새로운 검입니까?”

“검이라…….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네요.”

왕진은 빙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덩치가 큰 사내는 석상처럼 묵묵히 서 있었고,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아 보이는 약간 마른 몸매의 사내는 한쪽 눈썹만을 삐딱하게 올린 채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호기심인지 적대감인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유준을 탐색하는 만큼, 유준도 그들을 탐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들은 나와 뜻을 함께하는 동료랍니다. 대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 수 있는…… 진짜배기 동료들이죠.”

왕진의 말투가 의미심장했다.

“나도 솔직히 말할게요. 그래도 되겠죠, 준?”

“예.”

“나는 준도 이들과 같은 동료가 되길 원해요.”

유준은 왕진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왕진이 여전히 뒷짐을 지고 있다는 걸 기감으로 알았다. 왕진은 내심을 감출 때 섭선으로 얼굴을 가린다.

유준은 왕진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지금도 저는 왕 공공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동료가 아닌지요?”

“아니죠. 그건 그냥 검이에요.”

“…….”

“황제 폐하를 모시는 금갑(金鉀)을 입으세요. 나와 뜻을 함께 하되, 폐하의 아래에서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하세요. 그게 제가 보고 싶은 동료의 모습이랍니다.”

유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황실의 친위대인 금의위도 금갑을 입지는 않는다.

그런 걸 입는다면 단 한 명.

과거에 영락제의 곁을 숨어서 지켰다는 신수 백택만이 금갑을 입었었다.

“왕 공공의 말씀은, 제가 신수가 되라는 것이군요.”

“맞아요. 그대가 갖고 싶은 게 따로 없다면 나는 신수의 자리를 선물하겠어요.”

“……”

유준은 침묵을 지켰다.

놀라지는 않았다.

선물을 준다고 해 놓고 자신이 원하는 걸 말하는 왕진은 논할 거리도 안 된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알고는 있었다.

어쩌면 어촌에서 왕진과 처음 만났던 그 순간, 그는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만 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진행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준은 적어도 무산학관을 나오고, 집혼기의 힘을 어느 정도 모으고 난 후의 이야기가 될 줄 알았었다.

“집혼기가 걱정이라면 문제없어요. 지금까지 얼마나 모였나요? 백? 이백?”

“이백 정도……. 그 정도 될 겁니다.”

“적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이번에 무림 강호를 돌면서 얻은 성과가 있거든요.”

왕진은 뒤쪽의 두 사람을 섭선으로 가리켰다.

“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강한 무인은 혼의 크기가 다르다더군요. 집혼기를 수백 명, 많게는 천여 명의 분까지 한 번에 채우는 모양이에요. 그 덕에 지금 여기 두 사람은 무림행을 하기 전보다 훨씬 강해졌답니다.”

왕진의 뒤에 있는 두 사람은 분명 절정의 경지를 초월한 듯 강해 보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기세, 안정된 자세에서 숨겨진 살기가 미미하게 흘러나왔다.

유준은 자연스럽게 그의 기억 속 최강자인 무쌍귀, 장기린을 떠올렸다.

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자.

그 강력한 기세.

만전의 경험으로 단련된 무적자와 저들을 비교했다.

‘무쌍귀만큼은 아니야. 그래도 강해. 내가 전력을 다해도 이기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쓰는 검술로는…… 상처를 주기 힘들겠어.’

유준은 판단을 내린 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흑시부대의 무림행은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끝났지요.”

“그러면 앞으로 집혼기는……?”

“강호 무림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어요. 이제 막 정도 문파만 정리했을 뿐이잖아요?”

“예? 잠깐, 설마.”

“이제는 사파. 아니면 마교 쪽을 정리하는 것도 좋겠네요. 치안의 확립은 황실이 꼭 해야 할 일이죠. 그렇죠?”

“아……!”

“어쩔 수 없네요. 한동안은 흑시부대를 더 사용해야겠어요. 황실에서 상소를 올려야겠네요.”

왕진은 가벼운 말투였으나, 그 의미는 지옥 나찰만큼이나 무시무시했다.

사파와 마교를 정리한다니.

그 말은 무림 강호에서 또 한 번의 혈사를 일으키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우웅―.

유준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호안석 목걸이를 손으로 매만졌다. 무언가에 공명하는 듯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왕 공공.”

“아! 선, 왔군요. 수고했어요.”

여덟, 아홉 살 정도의 나이밖에 안 되는 꼬마아이가 커다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그 위에 다과를 얹은 쟁판을 얹은 채 들고 왔다.

왕진은 기특하다는 듯이 쟁반을 받고 소년의 머리카락을 만져 주었다.

그는 나무 상자를 받아 유준에게 건네주었다.

유준은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나무 상자를 열어 보았다.

“지팡이……? 지팡이랑 무공 비급 두 개……?”

유준은 손끝으로 더듬어서 상자 안에 든 게 무엇인지 알아냈다. 지팡이로 보이는 나무 막대 하나를 꺼내 들고, 그 밑에 놓인, 그 낡은 감촉이나 냄새만으로도 세월이 느껴지는 비급 두 개도 꺼내 들었다.

유준은 알 수 없었으나 비급 두 개에는 각자 이름이 쓰여 있었다.

태극혜검.

오행매화검.

“태극혜검과 오행매화검이에요.”

유준은 말을 잊을 만큼 놀랐다.

“신수는 두 종류가 있어요. 지난번에 말해서 알고 있죠, 준?”

“……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네요. 둘 중 어떤 신수가 될 것인지. 그리고, 소호는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하면 될지.”

왕진이 다가와 유준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가 결정해요, 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