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73화 (302/686)

7권 23화

제22장 무룡지몽(武龍之夢) (10)

“제가 결정하라고요……?”

유준은 쉽게 답하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신수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사흉과 사신.

그 둘은 만들어지는 방법은 비슷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훗날의 쓰임새라고 예전에 왕진이 말한 적이 있었다.

‘사흉은 암중의 검, 사신은 드러난 황실의 장수……였던가?’

유준은 갑작스레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에 당황했다.

그는 선택하는 자가 아니었다.

쓰이는 자.

강한 자의 손에 쥐어져 휘둘러질 때 진가를 발휘하는 명검이다.

“그대에겐 어려울까요? 하지만 결정해 주세요. 기간은…… 무산제전이 끝나면 돌아오기로 하였으니 그때까지로 하죠. 괜찮죠?”

왕진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다시 내가 준 선물 이야기로 돌아가죠. 태극혜검과 오행매화검이에요. 후훗, 그대가 화산파에 있었다면 놀랐을 거예요. 그때 육모담이라는 자가 그 오행매화검을 기가 막히게 잘 쓰더군요. 혼자서 흑시부대를 반 시진 가까이나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니까요?”

“강했나 보군요?”

“꽤 강했어요. 화산파를 살릴 만큼 강하진 못했지만요. 그만큼 버틴 건 그 오행매화검이라는 무공 덕분이 아닐까 싶네요.”

왕진은 어깨를 으쓱한 뒤, 검은색 섭선을 얼굴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무당파의 상징 같은 무공과 화산의 비전절학이라니. 무림인들이라면 그 두 개의 비급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크게 놀랐겠죠?”

왕진은 웃음을 터뜨리며 섭선을 두드렸다.

“준. 화산은 불탔지만 이건 그중에 살아남은 무공이에요.”

“으음, 그렇지만…….”

유준은 머뭇거렸다.

선물 받은 무공이 비급이라는 게 문제였다.

유준은 낡은 종이 냄새가 나는 비급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어떻게 말을 꺼낼지 망설였다.

다행히 왕진은 눈치가 빨라 유준의 내심을 알아채 주었다.

“아! 비급이라서 걱정하는 건가요? 읽지 못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조만간 여기에 있는 선과 다른 소동 한 명이 그 비급을 읽어 주러 갈 거예요. 도움을 받아 함께 익히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왕진은 세세한 것까지 이미 생각해 둔 듯 대답에 거침이 없었다.

“참고로 뒤에 두 사람은……. 뭐였더라? 그래요. 맞아. 도철은 낙화추영장과 매화권을 택했어요. 화산에서 매화신검과 싸운 기억이 꽤나 인상 깊었던 모양이더라고요. 반면에 궁기는 일보신권과 태극권 비급을 택했죠.”

유준은 자신의 손에 들린 두 개의 무공을 만져 보았다.

태극혜검과 오행매화검이라니.

둘 중 하나라도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 무림에서 혈사가 벌어질 법한 무공이었다.

도철이나 궁기가 익히고 있다는 무공 또한 그러하다.

집혼기를 이용한 신수의 힘.

그리고 흑시부대를 통해 황실이 모은 구파일방의 무학이 합쳐졌다.

유준은 자신이 미친 듯이 달리는 마차에 올라타고 있음을 알았다.

이제 마차에서 내릴 방법은 없었다.

이 길의 끝이 황금으로 점철된 화려한 궁전일지,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벽일지.

끝까지 타고 있는 것밖에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지팡이는 제가 황실의 야장에게 직접 부탁해서 만든 거예요. 한번 뽑아 보겠어요?”

유준은 지팡이의 끝부분을 잡아 보았다.

잘 무두질된 가죽에서 은은한 가죽 냄새가 났다. 처음으로 잡는 것임에도 마치 오랫동안 만져 온 물건인 듯 손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있었다.

“아……!”

스릉―.

곧바로 뽑아 드니 사방으로 예기(銳氣)가 번뜩였다.

유준은 손가락 두 개를 모아 검 날을 쓸어 보았다.

차가우면서 섬뜩한 느낌.

매끈하게 단련된 강철에 흉포한 살기가 몸을 낮추고 숨어 있는 듯했다.

자세를 낮추고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러 보았다.

쉭―.

중심이 잡힌 검 특유의 안정적인 느낌이 유준을 만족시켰다.

유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더욱 마음에 드는 검이었다.

“맘에 드나 보네요. 좋아요. 잘됐어요. 끝부분에 새겨진 글자가 느껴지나요?”

“끝부분이라면……?”

유준은 지팡이의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도톰하고 매끈한 가죽 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백(白)……령(靈)?”

“그 검의 이름이에요. 어때요? 마음에 드나요?”

백령.

새하얀 영혼.

유준은 검을 지팡이 모양의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웅웅거리는 떨림이 마치 검이 그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왕 공공. 잘 쓸게요. 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후훗, 그 말로 충분해요. 선물을 건넨 보람이 있군요.”

왕진은 푹신한 보료에 다시 앉으며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

“자, 이제 다과를 즐기도록 하죠. 무산학관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거기 생활은 어떻죠? 사신회는 어떤 생활을 하고 있나요?”

“그곳의 생활은…….”

유준은 왕진과 마주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랜만의 회포를 풀고 있었다.

***

무룡전은 그동안의 대회들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나름대로 학관에서 이름을 떨치는 인물들이 모두 의외의 상대에게 고전하거나 패배하면서 이변이 속출했던 것이다.

특히 올해 무룡전의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히던 청룡방의 태성천이 신입생인 장소호에게 패배를 선언하고 나가 버린 일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대사건이었다.

학관의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일 때마다 그때의 이야기를 했다.

그때의 소호가 얼마나 정교하게 움직였는지.

양의검의 묘리를 살린 태성천의 검술은 얼마나 뛰어났는지.

각자의 의견이 모두 달라 아이들이 모일 때마다 격론이 벌어질 지경이었다.

물론 장소호가 화제의 중심에 있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래도 이 대회의 백미는 따로 있었다.

바로 작년도 무룡전의 우승자인 유준과 현무방의 방장이자 최강자인 이태산의 일전이다.

두 사람의 승부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커다란 철곤을 든 이태산은 철저하게 검의 거리 밖에서만 유준을 공격했다.

겉으로만 봐서는 둔할 것 같은 거구의 몸인데 이태산의 움직임은 마치 날짐승처럼 날렵했다.

십육 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완성에 가깝게 단련된 육신.

거기에 사용하는 무공은 곤법천종(棍法天宗)이라 불리는 소림사의 곤법이다.

왼쪽 손으로 때때로 반장의 예를 취하는 모습이, 평소에 깐깐하게 규율을 지키던 모습과 잘 어울려 마치 진짜 승려 같았다.

까앙―!

비등하던 승부가 반전된 것은 유준이 살기를 내뿜기 시작하면서였다.

유준은 이태산이 강하게 찌른 철곤을 검 끝으로 비스듬히 비껴 내면서 손목을 뒤집었다.

따다다당―.

날카로운 검 날이 이태산의 철곤을 뱀처럼 타고 올랐다.

유준은 단 한 번의 걸음으로 이태산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퍽― 하고, 미처 해소되지 못한 철곤의 경력이 유준의 왼쪽 귓불을 찢었지만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똬리를 트는 듯한 움직임.

독이 잔뜩 오른 독사처럼 치솟은 검 날이 이태산의 손목을 노렸다.

꾸웅―.

“갈(喝)!”

이태산은 사자후를 내지르며 제자리에서 철곤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승모근이 잔뜩 부풀었다. 그는 강한 진각과 함께 바닥을 내리찍었다.

쩌어엉―.

거대한 종을 망치로 두드린 것 같은 진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단단한 청석 바닥이 진흙처럼 뭉개지고, 주변의 바닥에도 거미줄 같은 흔적이 새겨졌다.

강렬한 기세에 막강한 힘이었다.

“스읍―.”

유준은 자신을 밀어내는 힘에 저항하지 않았다.

하늘 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연처럼 옆으로 순순히 튕겨나간 뒤,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낮은 자세로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몸놀림이었다.

유준이 이태산의 뒤를 잡았을 때, 그는 이제 막 바닥을 내리찍었던 철곤을 회수하는 중이었다.

쉬이이익―.

쏜살같이 찌른 검이 이태산의 척추를 노렸다.

충천하는 살기.

피 냄새가 나는 듯한 잔인한 한 수였다.

이태산은 몸을 돌릴 틈도 없이 뒤를 향해 철곤을 내찔렀다.

자연스럽게 몸을 반 회전시키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강인한 일격을 터트렸다.

파앙―.

공기가 터져 나가고, 저릿저릿한 기파가 유준을 덮쳤다.

유준은 찌르기를 중단하고, 갑자기 오른쪽 다리를 쭉 펴고 왼쪽 다리를 굽혀 몸을 낮췄다.

궁보에 이은 부보.

마치 탄퇴(潭腿)를 펼칠 것 같은 자세였다. 유준은 그 자세에서 몸을 튕겨 올렸다. 그림으로 그린 듯, 아름다운 호선이 위로 솟구쳤다.

우웅―.

“……!”

거대한 초승달 같은 잔상이 이태산의 턱을 쪼갤 듯 치솟았다.

이태산은 이번엔 피하지 못했다.

몸을 반 회전시키며 뒤로 찌른 철곤을 미처 회수하기도 전인 것이다.

멈춰서는 철곤.

석상처럼 굳어진 이태산의 턱 밑에, 눈을 지그시 감은 유준의 검 날이 파르라니 빛났다.

격렬하던 대련이 한순간에 끝이 났다.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이태산은 사나운 눈빛으로 유준을 노려봤다.

“그럴 줄 알았지.”

이태산의 목소리엔 분노가 내재되어 있었다.

“이건 무공(武功)이 아니다. 살인술(殺人術)이다.”

“미안하네요. 평소대로라면 제대로 겨뤘겠지만……. 약속한 게 있어서요. 여기서 힘을 많이 소모하고 싶지 않네요.”

유준은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빙긋 웃는 얼굴이었다.

“패배 선언을 해 주시죠?”

“흥.”

이태산은 자세를 똑바로 한 뒤 철곤을 수직으로 세워 바닥을 한 번 내리쳤다.

꾸웅―.

“나의 패배다.”

이태산은 철표 교관에게만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한 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 버렸다.

떠들썩한 소란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무산학관의 학생들은 다시 한 번 열광했다.

이변이 또 한 번 벌어졌다.

무산학관의 최강자로 손꼽히던 이태산과 태성천이 각각 백호방의 소년들에게 패배한 것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자존심은 상하지만 인정하자는 분위기의 대화가 오고 갔다.

승패는 정직했다.

누가 봐도 올해의 무룡전은 백호방이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결승은 반 시진 후에 시작하겠다. 백호방의 유준, 백호방의 장소호. 시합을 준비하도록.”

철표의 선언은 학생들 모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사상 초유의 사태.

오직 백호방만의 결승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

소호는 천천히 연무장으로 올라섰다.

소호 자신보다 더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조서인, 섭주해, 대미미, 그리고 백호방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러 주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칠 할 정도는 긍정적인 응원과 기대였고, 삼 할 정도는 질시와 적대감인 듯했다.

소호는 자신이 온갖 기대와 흥분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같이 느껴졌다.

나아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연무장 위로 뻗어 있는 길의 끝.

그곳에 유준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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