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74화 (303/686)

7권 24화

제22장 무룡지몽(武龍之夢) (11)

“소호.”

유준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라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한 흰색 무복을 입고, 차분하게 서 있는 소년의 얼굴에는 우수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유준의 주변으로 어두운 장막이 쳐져 있는 듯했다.

“유준 선배.”

소호는 본래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의 유준에게는 다가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왠지는 몰라도 소호의 본능이 끊임없이 경종을 울렸다.

‘거리가 멀어 보여. 평소랑은 너무 다르네? 왜지?’

고작 열 걸음도 안 되는 거리가 어째선지 멀게 느껴졌다.

“약속을 지켰구나. 대단해. 왠지 너와는 이렇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어.”

“저도 그래요. 왠지 이렇게 될 것 같았어요.”

소호와 유준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유준은 심정이 복잡해 보였다.

창백한 낯빛으로 지그시 눈을 감고 서 있으니, 더욱 분위기가 깊게 가라앉았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관객들도 점차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유준과 소호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왜 저렇게 분위기가 심각한지에 대해 의논하는 말들이 들렸다.

“크흠!”

소호는 애써 헛기침하며 자세를 낮췄다.

“그럼 시작할까요?”

“그 전에.”

유준은 잠시 기다리라는 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소호,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저한테요?”

“그래.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네?”

“무산학관에 왔다. 그걸로 끝이야? 여기서 교육이 끝나면? 그다음엔 무엇을 할 거지? 넌 네 인생을 무엇을 위해 바칠 거냐?”

“엥?”

소호는 뜬금없이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 당황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여기서?”

“나한텐 중요하다.”

“어어…… 음…….”

유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소호는 고민했다.

대충 대답하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진지하게 질문하는 유준에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호는 부모님과, 은자촌 사람들에게 배운 모든 것들을 떠올린 후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여행을 떠날 거예요.”

“……뭐?”

“세상은 넓잖아요? 평생 돌아다녀도 다 보지 못할 것투성이인데, 한 곳에만 머물면서 사는 건 좀 아깝지 않아요?”

소호는 어깨를 으쓱한 뒤 담담하게 유준을 바라보았다.

“인생을 무언가에 바치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평범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건 축복이라고…… 저희 아버지가 늘 말했어요.”

유준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창백한 얼굴로 미간을 좁히고 있는 그는 화가 난 것인지 고민을 하는 것인지 구별을 하기가 힘들었다.

“여행……? 여행이라니……. 인생을 무언가에 바치고 싶지 않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혹시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객잔이라도 차려 볼까요? 아버지가 하시는 걸 보니 재밌어 보였어요. 손님도 많이 오잖아요? 나중에 여기 무산학관 친구들도 찾아오고 그러면 좋겠어요.”

소호는 생각을 거듭할수록 즐거워져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깨끗한 객잔.

원래 알던 사람들과,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뒤섞여 손님으로 찾아오는 곳.

지루할 틈이 없는 삶이야말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소호가 꿈꿔 왔던 모습이다.

“후우…… 객잔……? 하핫. 그렇구나. 그랬어.”

유준은 깊은 고민 끝에 한숨을 푹 내쉬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오늘은 내가 이겨야겠다.”

유준은 지팡이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

소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다.

검을 뽑는 순간부터 유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칼날이 울부짖는 듯했다.

섬뜩한 쇳소리가 소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검의 이름은 백령. 얻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나도 아직 잘 다루질 못해.”

유준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검을 정면으로 향했다.

날카로운 검 끝이 정확하게 소호의 미간을 겨냥했다.

“그러니 조심해라.”

소호는 유준의 검 끝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른 그림자가 소호의 주변을 잠식하는 듯했다.

진심 어린 살기였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검이 날아와 목을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유준 선배, 진심이구나!’

소호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어째서일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공포가 아니라 호승심.

승부욕이 들끓어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기분을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시작!”

철표 교관의 시작 선언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먼저 공격을 시도한 것은 유준이었다. 그는 미끄러지는 듯한 발놀림으로 순식간에 다가와 검을 내리그었다.

쩌엉―.

소호는 박도를 뽑아 날아오는 검격을 옆으로 비껴 냈다. 검은 쳐 냈는데 손끝에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유준은 종이 인형처럼 옆으로 순순히 튕겨지더니, 온몸에서 수십 개의 검을 뽑아내듯, 한 자루 검을 쾌속하게 휘둘렀다.

쩌저저저정―.

소호가 휘두르는 박도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정면으로 검과 도가 맞부딪치는데 어느 한 쪽도 밀리지 않았다.

각자의 무기에 실린 힘은 비등했다.

백중세.

순식간에 수십 번의 초식을 겨룬 뒤, 소호는 역근경 진기를 사용해 뒤로 몸을 튕겨 냈다.

유준은 놓치지 않고 따라붙었다.

집요한 모습.

평소의 소탈하고 냉랭했던 싸움 방식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독이 잔뜩 오른 짐승처럼 소호의 뒤를 집요하게 쫓아왔다. 그러면서도 휘두르는 검 동작은 섬뜩할 만큼 깔끔했다.

‘우와아! 격렬하다.’

소호는 처음에 무산학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준과 처음으로 겨뤘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유준도 강했지만, 지금의 그는 그때와 딴판이었다.

마치 소호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격렬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도 싸울 줄 알았구나, 유준 선배. 그래도 슬슬 눈에 익기 시작했어.’

소호는 아지랑이 같은 몸놀림으로 살짝 상체를 숙여 뒤로 물러섰다.

날카로운 수평 일격이 소호의 앞머리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소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위로…… 두 치. 다음은 옆으로 세 치.’

소호는 궁보를 사용해 살짝 아래로 몸을 피한 뒤, 옆으로 몸을 반회전했다.

상단 수직 일격.

중단 수평 일격.

유준의 검이 종이 한 장의 틈을 남겨두고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섬뜩한 소리가 들리며, 지켜보던 관객들의 입에서도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소호는 멀쩡했다.

옷자락도 긁히지 않았다.

철저하게 소호의 계산대로.

몸을 낮춘 소호의 눈에 유준의 표정이 굳는 모습이 보였다.

쒜에엑―.

유준은 낮은 자세로 순식간에 소호에게로 가까워졌다.

짓쳐 드는 살기.

소호가 휘두른 박도와 유준의 검 날이 허공에서 수십 번의 불꽃을 튀겼다.

까가가강―.

소호는 박도를 쥔 손이 저릿저릿한 것을 느꼈다.

살기가 짙어질수록 유준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유준.

쩌엉―.

수직으로 내리치는 일격을 막아 내자, 유준의 움직임이 급격한 변화를 선보였다.

파라라락―.

넓은 소맷자락이 소호의 시야를 가렸다.

성급해 보일 정도로 급박했던 움직임이 갑자기 박자가 느려졌다.

정면으로 찌르는 일격은 모든 동작이 훤히 보일 정도.

한데 그 동작이 묘했다.

왼편에서부터 넘실넘실 부드럽게 움직이며 검 끝이 파도 같은 물결을 그렸다.

쒜에엑―.

‘해왕십삼기!’

소호는 고개를 살짝 젖혀 검을 피하면서 반격할 기회가 찾아왔음을 알아챘다.

반가울 지경이었다.

해왕십삼기라니.

추묵환 할아버지가 많이 보여 줬던 무공이 아닌가.

“후웁.”

소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가 살짝 몸을 튕겨 올리면서 박도를 내리쳤다.

쩌어엉―.

“으럇!”

도끼질 하듯 전력을 다해 내리친 일격이었다.

그 강맹한 일격.

유준의 검로를 망가뜨려야 마땅하나, 불패검의 내공은 의외로 심유하고 깊었다.

소호의 일격을 버텨 낸 채로 계속해서 넘실넘실 파도 같은 움직임으로 소호를 압박했다.

다시 한 번 내리치는 일격.

이번엔 유준의 힘이 더욱 강했다.

쩌엉―.

강한 파도에 휩쓸리듯, 해왕십삼기의 경력에 소호의 손에서 박도가 날아갔다.

“아앗!”

“우왓!”

지켜보던 사람들이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칼을 놓치다니.

그걸로 승부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넘실넘실.

소호를 향해 다가가던 검의 움직임이 더욱 격렬한 기세를 실었다.

그런데 소호는 웃고 있었다.

휘리릭―.

텅!

소호는 바닥에 손을 짚고 땅을 휩쓸며 유준의 발을 걷어찼다.

의외의 일격이었는지 유준은 피하지 못했다.

퍽― 하고, 발끝에 닿는 감각이 묵직했다.

유준은 다리를 채여 넘어질 뻔했지만 겨우겨우 중심을 다시 잡았다.

소호는 곧바로 일어설 것처럼 움직이다가 갑자기 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멈춰 섰다.

허리의 힘이 많이 필요한 자세였음에도, 소호는 놀라울 만큼 유연했다.

소호는 그 자세 그대로 반 호흡을 기다렸다.

그러자 휘청거리던 유준에게서 검 날이 치솟았다.

쉬익―.

반격을 대비한 유준의 검이 소호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

소호가 공격을 피해 낸 것에 놀란 듯 눈썹을 꿈틀거리는 유준의 얼굴이,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소호는 그제야 다시 제대로 몸을 튕겨서 일어났다.

파라라락―.

허공에서 몸을 회전하자, 소맷자락에서 격렬한 바람 소리가 났다.

부드럽게 휘돌린 다리가 허공에서 유려한 원앙각을 펼친다.

유준은 검을 잡지 않은 왼손으로 황급히 원앙각을 옆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퍽―.

둔탁한 소음과 함께 유준이 다시 한 번 인상을 썼다.

원앙각에 실린 힘이 제대로 유준의 팔목을 시큰거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호의 움직임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원앙각을 차 내자마자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지는 박도의 손잡이를 발끝으로 툭 찼다.

딱 좋은 높이에 떠오른 박도를 손에 쥐고, 곧바로 비스듬하게 참격을 내리그었다.

촤악―.

일단의 흐름은 마치 준비된 곡예수의 무용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유준의 앞섶이 잘려 나가 천 조각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상처는 없었다.

찢어진 무복 사이로, 탄탄하게 단련된 상체와 목에 걸고 있던 노란빛이 도는 호안석이 살짝 드러났다.

“미안해요, 선배. 새 옷인데.”

소호는 양손으로 박도를 강하게 움켜쥔 채 빙긋 웃었다.

“후우.”

유준의 얼굴은 심각했다.

소년은 지팡이 검을 한 바퀴 회전시켜 다시 정면을 겨눈 채, 왼손을 품 안에 넣어 호안석을 붙잡았다.

“넌…… 아무것도 몰라, 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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