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75화 (304/686)

7권 25화

제22장 무룡지몽(武龍之夢) (12)

뭔가가 바뀌었다.

소호는 그 점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호안석을 붙잡은 유준과, 붙잡기 전의 유준은 천지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안석이 노란색으로 빛나는 듯했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 순간부터 유준의 주변에서 회오리치는 내력이 심상치않다는 점이었다.

유준의 내력이 갑자기 몇 배나 크게 불어난 것만 같았다.

꾸욱―.

소호는 오른손으로 박도를 감아쥐고, 왼손은 등 뒤로 돌렸다.

언제든 대응할 수 있게 발뒤꿈치를 살짝 띄우는 건 기본이었다.

소호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뭔가가 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느낌이 온다.

몸서리치게 강력한 공격이 소호의 목을 노린다.

쒜에에엑―.

유준은 예비 동작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소호는 옆으로 피했다. 삼 척 반이 넘는 긴 검이 반월(半月) 모양의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동작이 컸는데도 그 뒤의 공격이 이어지는 속도가 빨랐다.

쒜엑―.

소호가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유준의 검이 다시 한 번 날아왔다.

이번엔 피할 수가 없어 박도를 들어 올렸다.

쩌엉―!

소호는 밀어내는 힘을 버티기 위해 양다리에 잔뜩 힘을 줘야만 했다.

아직 덜 자란 몸이 이렇게나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팔다리가 길었다면…….

조금만 더 온몸에 근육이 붙어서 힘이 있었다면…….

그런 아쉬움이 계속해서 생겼다.

쩡!

“윽.”

박도가 부서질 것처럼 떨렸다.

유준의 검 주위로 은은한 노란빛 검기가 단단하게 뭉쳐져 있었다.

검기가 실낱처럼 흘러나오는 검기의 경지와, 단단하게 뭉쳐지는 검강의 경지 사이로 보였다.

십 대 중반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놀라운 성취다.

‘와아, 너무하네.’

안 그래도 빠른 검술을 지닌 유준이 파괴력까지 갖춘 셈이다.

단 한 번 검과 도를 부딪쳤을 뿐인데, 그 일격의 여파로 바닥에서 뿌연 먼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소호는 곧바로 몸을 숙였다.

궁보니 부보니 하는 보법을 취할 틈도 없었다.

후우웅―.

머리 위로 섬뜩한 공격이 스쳐 지나갔다.

소호는 나려타곤에 가깝게 바닥을 굴러 위기를 벗어났다.

반 호흡이라도 늦었다면 검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잘려서 나풀나풀 흩어지는 머리카락이 그 증거였다.

피잉―.

유준의 검이 허공을 한 번 짚고, 마치 도움닫기를 하듯 그곳에서부터 소호를 향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세 치, 아니. 두 치.’

서걱―.

바닥을 한 바퀴 구른 소호는 자신의 어깨 부근 옷자락이 잘렸음을 깨달았다. 잘려 나간 옷자락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이번만큼은 자신이 잘 피한 건지, 유준이 상처를 입히지 않고 봐준 건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유준의 공격을 완전히 시야에서 놓친 탓이다.

피슉―.

쿵.

쿵.

두 번 더 날아온 검격이 소호 근처의 바닥을 꿰뚫었다.

소호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단단한 청석 바닥이 움푹 팬 모습을 보니, 직접 검에 맞으면 어떻게 될지 충분히 상상이 된다.

“훗.”

유준의 공격이 멎었다. 그는 섬뜩한 살기를 유지한 채 차갑게 비웃었다.

“미안하네. 혹시 그건 새 옷이야?”

조금 전 소호가 했던 도발에 대한 반격이다.

소호는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한 것을 느꼈다.

마치 성격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유준이 도발을 한다.

그리고 그건 분명 효과가 있었다.

“흐음!”

소호 역시 열두 살의 소년.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건 소년이 아닐 터.

소호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기억도 잘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성실하게 쌓아 온 내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두근― 두근―.

쿵. 쿵. 쿵.

소호의 몸에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소호의 정신이 맑아지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검이 너무 빨라. 따라가야 해!’

위기는 소호의 정신을 각성시켰다.

예전에 아버지와 삼촌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들이 떠오른다.

소호는 적들보다 항상 한 박자 빠르게 살아야 한다는 그 말이 옳았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또래이면서 강력한 적.

소호보다 빠른 상대를 만나니 그 한 박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소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고, 말이 반복될수록 머릿속이 맑아졌다.

박자가 쪼개지고, 쪼개진 박자가 다시 한 번 쪼개졌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마저 빨라진 박자에 맞춰지는 듯했다.

온몸의 피가 빠르게 흘렀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특히 연무장의 주변.

소호를 응원하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힘내!”

“소호야, 힘내라!”

“소호 형! 할 수 있어요!”

“힘내라, 백호방의 기대주!”

하나같이 익숙한 목소리들이다.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대미미, 조서인, 섭주해, 마희희, 윤지관.

같은 시기에 들어온 모든 백호방의 친구들은 형제나 다름없이 친해졌다.

은위군은 아직 덜 친해졌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관객들 역시도 소호를 응원하고 있었다.

“힘내라, 신입생!”

“불패검을 꺾어 버려!”

“저 도도한 장님을 쓰러뜨려라!”

오오오―!

어째서일까?

듣는 소호가 민망할 정도로 환호성과 응원은 명백하게 소호에게로 몰려 있었다.

다시 정면을 보니, 유준도 가만히 서서 주변의 반응을 듣고 있는 듯했다.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묵묵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역시, 너는 안 되겠다.”

“네?”

“아니, 내가 안 되겠다고 해야 할까?”

유준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소호는 골똘히 고민해 보았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난 어릴 때부터 그랬지. 사람들은 내가 인상을 찌푸려도 싫어하고, 웃어도 싫어했어. 내게 있어 가장 힘든 일은 사람의 호감을 얻는 일이다. 차라리 검술이 쉬워.”

스릉―.

유준의 검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뒤, 다시 중단을 겨누었다.

“그러니. 승리라도 챙겨야지.”

예비 동작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 내리긋는 참격은 여전히 빠르고 강력했다.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빠르게 내려치는 검격에서 소호가 베여 죽더라도 상관하지 않을 것 같은 살기가 느껴졌다.

‘세 치.’

후웅―.

몸을 돌린 소호의 왼팔 옆으로 유준의 검이 스쳐 지나갔다.

‘가슴 쪽 찌르기 두 치, 좌로 오는 참격 세 치.’

소호는 뒤로 상체를 쭉 뺐다가, 왼쪽으로 몸을 낮추며 유준에게로 파고들었다.

모든 것이 소호의 예측대로 흘러갔다. 유준의 검은 일부러 소호를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공만을 베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소호는 눈을 빛내며 박도를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쩌엉―.

절묘한 한 수였지만 유준의 검에 막혀 공격을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막기 힘들 것 같은 우측 다리를 노렸는데, 그럼에도 유준은 자연스럽게 공격을 막아 냈다.

“아으.”

소호는 안타까움에 신음했다.

공격이 먹힐 것 같았는데, 유준의 벽은 아직 단단했다.

서로 간의 경력 차이가 명백히 드러났다.

목숨을 건 실전을 경험한 자 특유의 여유로움이 유준에게는 있었다.

쩌엉! 쩌저정!

유준의 검은 노란색 검기에 휩싸여 강력한 힘을 발하고 있었다.

순수한 박도의 칼날로 막아 내려니 소호의 입장에선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소호는 아직 검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힘의 집중이 필요했다.

칼과 도가 부딪치는 순간, 그 순간에 전력을 다해 박도에 내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칼날이 떨렸다.

“역시.”

유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짙어졌다.

“검기를, 그렇게, 막아 내다니!”

말을 하는 와중에도 세 번이나 검격이 떨어졌다.

쩌엉―!

소호는 간신히 막아 낸 뒤, 폴짝 뒤로 뛰어올라 유준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후우.”

소호의 이마에서 땀이 맺혀 흘러내렸다.

소호는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검술, 내력, 실전 경험.

세 가지 모두 유준이 소호보다 뛰어났다.

정면으로 맞부딪치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유준과 겨뤘던 이태산이 유준의 검술을 보고 무공이 아니라 살인술이라고 욕을 할 만했다.

철저하게 실전적인 검로.

초식과 초식을 겨루는 게 아니라, 누가 먼저 죽일 수 있을지 겨루는 무자비한 실전 같은 느낌이다.

소호가 이기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무공의 응용력과 뛰어난 거리감을 이용해 일격에 승부를 보는 것.

실제로 소호는 자신도 있었다.

항상 그 두 가지로 지금껏 승리해 왔으니까. 심지어 아버지와의 내기에서도 그걸로 이긴 적이 있지 않은가.

채앵―.

쩡! 쩌정!

유준과 오십 번 정도의 초식을 주고받았을 때, 비로소 소호가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유준의 검이 좌측에서부터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움직임을 띄었다.

해왕십삼기.

녹림수로삼십육채의 주인이자, 장강용왕이라 불렸던 추묵환의 독문 무공.

소호에게는 그 어떤 무공보다 익숙한 무공이 다시 한 번 펼쳐졌다.

‘지금!’

소호의 눈이 빛났다.

해왕십삼기는 한 번 막으면 더 강한 공격이 덮치고, 그걸 막으면 더욱 강력한 공격으로 몰아치는 무공이었다.

한 번이라도 해왕십삼기의 검을 막기 시작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발을 들이는 것과 같다.

소호는 상체를 뒤로 급격하게 젖히며 왼손으로 허리띠를 풀어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에 차고 있던 두툼한 요대가 거대한 나선의 원을 그렸다.

“……!”

유준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관객들이 숨이 멎는 듯한 탄식을 토해 냈다.

무산학관의 관도를 상징하는 철 요대가 소호의 손에 들리니 무기로 재탄생된 것이다.

유준의 해왕십삼기 일격은 소호가 시전한 ‘불주연사’에 휘말려 모든 경력이 위로 튕겨져 버렸다.

후와악―.

주변의 공기가 위로 빨려나가는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철 요대는 유준의 검에 뱀처럼 휘감겼다.

소호는 웃었다.

낭인 사내에게서 보고 익힌 무공은 꽤 쓸 만했다.

소호는 궁보에 이은 궁신탄영의 한 수로 순식간에 유준의 오른쪽으로 다가갔다.

파라락―.

소호의 소맷자락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유준의 검은 불주연사의 경력에 휘말려 위로 떠 있는 상황.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는 유준은 이미 시큰거리고 있는 왼손으로 소호를 막으려 들었다.

소호는 승리가 코앞에 있음을 느꼈다.

온몸에 탄력을 살려 전력으로 박도를 내리그었다.

쩌정!

“……!”

그런데 그 순간 유준의 허리춤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소호의 일격을 막았다.

“하?”

아까와 똑같은 상황.

사람만 반대로 바뀌었을 뿐이다.

유준은 어느새 요대를 풀어 그걸로 소호의 박도를 막은 상태였다.

철 요대는 은은한 노란빛에 휩싸여 검처럼 꼿꼿하게 세워져 있었다.

놀라운 응용력이다.

소호의 방식을 보고, 곧바로 똑같이 응용하고 있었다.

스르륵―.

어느새 유준의 검을 휘감았던 소호의 요대는 힘을 잃고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

소호는 빠르게 판단했다.

박도를 강하게 감아쥐고 천근갑의 묘리를 사용했다.

극도로 집중된 힘이 유준의 검기를 뚫고 요대를 잘라 낼 것처럼 파고들었다.

휘리릭―.

유준은 요대를 손에서 놓아버리고, 양손으로 자신의 백령을 붙잡았다.

허리띠가 없어지니 입고 있던 흰색 무복이 날개처럼 뒤로 펼쳐졌다.

곧바로 내리 긋는 참격.

새하얀 검 날이 반월형의 잔상을 남기며 소호를 향해 비스듬하게 그어졌다.

‘세 치 반.’

소호는 본능적으로 검의 거리를 계산했고, 그에 맞춰 다섯 치 정도 뒤로 물러났다.

소호는 계획을 세웠다.

검이 지나가면 곧바로 공격할 것이다. 무산학관에서 배운 기본 검술을 박도로 응용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푸화악―!

“아……?”

소호는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삐― 하고, 주변 세상이 시야에서 멀어지며 턱이 덜컥 흔들렸다.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비스듬하게 갈라진 앞섶 사이로, 불그스름하게 생채기가 난 가슴팍이 보였다.

상처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소호의 몸 내부로 파고든 검기가 심맥을 강하게 때려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태극……혜검……?’

돌고 돌아 태극.

유준의 검은 잠시 번뜩였을 뿐이지만, 소호는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깊은 조화의 경지가 담긴 그 검술은 소호가 잘 아는 모습이었다. 거리를 격하고 타격을 주기에 검의 거리는 상관이 없다. 확실했다. 둘째인 부운화 삼촌이 보여 준 적이 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으…….”

폐부가 아파 왔다. 머릿속이 아찔했다.

“후우…….”

유준은 창백한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백령을 지팡이 모양의 검집에 집어넣었다.

“너무 정확한 거리 감각은 오만함을 부르지. 역시, 넌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유준은 바닥에 떨어진 요대를 소호에게로 던져 주었다.

툭― 하고 요대가 몸에 닿는 순간, 소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소호!”

“오라버니!”

푸른색 하늘이 시야를 한가득 채웠다.

주변이 시끌벅적했지만, 어째선지 유준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늘이 내린 재능, 백호방의 작은 호랑이. 하지만…… 넌 내게 패했어. 기억해라, 소호. 넌 아직 많이 부족해.”

유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소호는 다시 일어서고 싶었다.

아직 더 싸울 수 있는데.

아직 지지 않았는데……!

“아아…….”

낑낑거리던 소호는 결국 드러누워 버렸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인정해야만 했다.

제대로 겨뤘고, 소호는 패배했다.

그날, 무룡전의 우승자인 유준은 무산제전의 끝을 보지 않고 무산학관에서 사라졌다.

불패검이라고까지 불리던 유준이 사라진 것에 대해 학생들은 궁금해하고 수군거렸지만, 학관장이든 기숙사의 방장이든 그 누구도 정확히 답을 주지 않았다.

소호는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나날이 규모가 커지고 발전하는 무산학관의 가르침을 흡수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렇게, 육 년의 세월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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