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1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1)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강호 무림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해?”
“엥? 어려운 질문인데?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그냥. 알고 싶기도 하고.”
“사실 나도 똑같은 걸 전에 생각해 본 적이 있어.”
“그래서? 답은 나왔어?”
“응.”
“뭔데?”
“정의(正義). 강호는 정의로워야 해.”
잘 다져진 흙길을 마차 한 대가 삐걱거리며 지나갔다. 마차의 주변엔 말을 탄 무인이 다섯, 두 발로 걸어가는 호위병이 스무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모두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단단한 갑주를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들었건만,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 듯 작은 동물처럼 계속해서 두리번거렸다.
전후좌우, 어느 쪽을 둘러봐도 황량한 지역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 한 그루 존재하지 않아 지평선 끝까지 잘 다져진 길만 놓여 있는 상황이다.
호위병들은 땅바닥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조차 의심하며 조심하고 있었다.
사람이 숨을 만한 바위가 보이면 두 사람이 먼저 뛰어가 살펴보고, 그 뒤에 일행이 계속 전진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다.
뒤에서 떠드는 ‘한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한 침묵을 유지했을 것이다.
“나는 무산학관 관도가 될 거예요. 진짜. 꼭이요.”
“어어……? 그래? 그렇구나.”
“거긴 남자든 여자든 재능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대요.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대륙 최고의 무공들을 뭐든지 배울 수 있다구요. 그러니 얼마나 좋아요?”
나이가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체구가 작은 소녀였다. 명문 귀족 가문의 딸답게 새빨간 비단 경장을 입고 화려한 꽃신을 신은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소녀는 좋게 말해 쾌활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사람들을 귀찮게 만드는 열정을 지녔다.
본래는 마차 안에 얌전히 있어야 했는데 답답하다면서 부득불 우긴 탓에 호위대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말에 타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또 대답 안 한다. 아저씨, 그렇죠? 대단하죠? 무산학관 좋죠?”
“어어, 그래. 맞아. 무산학관 좋지.”
“어물쩍 대답하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아버님이 그러셨어요. 허리를 쭉 펴고, 항상 당당하게 대답해야죠.”
“어……어?”
“허리를 펴라구요. 쭉!”
소녀는 마차 옆에 붙어 있는 짐마차를 끄는 청년에게 억지로 말을 붙이고 있었다.
많이 심심한 모양이었다.
짐마차를 끌던 청년이 힐끔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호위대장은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 구해 주지 않았다.
애초에 귀족 소녀와 반말로 대화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을 때부터 이런 보모 역할이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청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 그래, 무산학관은…… 크흠! 대륙에서 가장 유명하잖아?”
“바로 그것이에요!”
소녀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좀 영악하긴 했지만 나이에 걸맞은 치기 어린 열정이 소녀를 빛나게 했다.
“팔파일방의 무공을 모두 모아 놓은 명실상부 강호 무림 최고의 학관! 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영웅이 될 거예요. 시험도 얼마나 어려운데요?”
“으응, 요즘 특히 시험이 어렵다고는 하더라…….”
“맞아요. 정말이지. 태어날 때부터 역근경으로 호흡해서 내공을 쌓은 수준이 아니면 합격하기 힘들대요. 이게 말이나 돼요? 일 년에 이백 명은 뽑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나 어렵다니?”
“어? 어엉?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사실이래요. 내가 다 들었어요. 작년에 거기에 합격한 사람 중에 아는 언니가 있거든요. 그 언니가 어엄청 어릴 때부터 비싼 무공 교관을 초빙해서 잠도 안 자고 수련하던 언니거든요? 그랬더니 합격을 한 거예요! 대단하죠?”
소녀는 마치 그게 자신의 큰 자랑인 양 콧대를 높였다.
짐마차를 끌던 청년은 부스스하게 묶은 머리와 순박해 보이는 얼굴로 애매하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어어, 그래? 작년에 합격했구나…….”
“네. 근데 그렇게나 열심히 했는데도 간신히 들어갔대요. 간당간당한 점수였다나 뭐라나. 등수도 뒤에서 세는 게 빠를 정도라더구요. 우리 동네에선 아무도 못 따라가는 대단한 언니였는데. 세상엔 대단한 사람들이 많은가 봐요.”
“그렇구나. 나도 그 맘 잘 알지. 세상엔 대단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작년에 합격한 뒤쪽 등수라니…… 소애? 아니면 모용청……?”
청년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소녀는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양 볼을 부풀렸다.
“알긴 뭘 알아요? 아저씨는 하오문에서 온 사람이잖아요?”
“하오문……? 아아, 그랬지. 응, 맞아. 하오문이지.”
“뭐예요? 어색하게. 아무튼 그 언니처럼 평생을 노력하다가 조금 간당간당하긴 했어도 ‘무산학관’에 합격한 거랑은 다르지 않아요?”
“어어, 그런가?”
“그런 거예요.”
소녀는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깐깐한 말투, 영악한 표정이 열 살 소녀 같지가 않았다.
“어쨌든, 나 서유림은 무산학관에 꼭 들어가고 말 거예요. 들어가서 일대여걸이 될 거라구요.”
“그래. 그래. 잘 되면 좋겠네.”
“또 어물쩍 대답한다!”
“아냐, 진짜야. 잘되면 좋겠네.”
청년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순박한 얼굴로 씩 웃었다.
깐깐한 소녀라도 차마 그 얼굴에는 화를 낼 수 없는지, 대번에 화가 풀려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요. 내가 잘되면, 아저씨한테 무산학관을 꼭 구경시켜 줄게요.”
“……하핫, 고맙네.”
“하아, 말이 나와서 얘긴데 너무 아쉬워요. 무산학관을 꼭 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 가 봤나 보구나? 요즘은 무산제전 때 누구나 들어와서 볼 수 있지 않아?”
“맞아요! 역시 하오문, 여러 가지 소식을 잘 알고 있군요?”
소녀는 안타까움에 가슴을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시봉심(西施捧心)이라더니.
서시처럼 가슴을 움켜쥐고 눈살을 찌푸리는데도, 분위기가 생기기는커녕 웃음만 나왔다.
“그냥 찾아가 봤자, 하루 종일 줄만 서 있다가 연무장이 잘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구경해야 한대요. 제대로 보려면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초대장이 있어야 하는데……. 아아! 우리 아버님이 그걸 받았는데! 받았는데……!”
소녀는 기절이라도 할 듯 뒤로 몸을 젖혔다.
청년이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 받아 줘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정작 그녀를 말에 태우고 있는 호위대장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인 듯했다.
“……아버님은 저를 데려가지 않으셨어요. 네가 볼 게 아니라면서. 이게 무슨 말이죠? 내가 무산학관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소녀는 언제 휘청거렸냐는 듯 다시 허리를 세우고 또랑또랑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봤다.
“어……. 그랬구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있죠!”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르륵 내뱉었다.
“재작년이었으면 철탑패웅(鐵塔覇雄) 이태산이나 섬전검객(閃電劍客) 태성천도 보고 싶었을 거예요. 빙혼수(氷魂手)나 투웅(鬪熊)도 괜찮구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약관의 나이를 넘어서 학관에서 나갔잖아요? 이제는 단 한 명뿐이에요.”
“어어…… 되게 잘 아는구나? 생각보다 정말 많이 알고 있네. 그래? 그게 누군데?”
“누구긴 누구겠어요. 천무공자(天武公子)지! 아아! 무산제전, 특히 무룡전의 꽃은 그분뿐이죠!”
서유림의 표정은 마치 상사병에 빠진 소녀 같았다.
청년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짐수레를 돌아보았다.
야숙을 대비해 실어 둔 모포와 건량들 너머로 말의 움직임에 맞춰 까딱거리고 있는 발이 한 쌍 보였다.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소녀가 말이 많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곧바로 수레에 숨듯이 드러누운 게 벌써 한 시진 전이다.
자는 건지 빈둥거리는 건지.
그 탓에 소녀의 넋두리는 청년이 혼자 받아 주는 중이었다.
“그분은 이미 전설이라구요. 무산학관에 수석으로 입학해서, 첫 해에 바로 출전한 무룡전에서는 준우승. 그 후에는 어째선지 한 해를 쉬었지만…….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무룡전 우승을 놓치지 않았어요. 사연패예요. 그 복마전 같은 곳에서 무려 사 년째 무룡전의 우승을 차지하고 있다고요!”
서유림은 손등을 이마에 얹고 다시 한 번 기절할 것처럼 뒤로 몸을 휘청거렸다.
이번에는 청년도 잡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아! 한 번이라도 그분을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언니 말이 신입생들끼리는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대요. 구파 세대랑 팔파 세대의 차이라나요?”
“……어? 그건 처음 듣는데?”
“구파일방일 때 무산학관에 들어온 세대랑, 팔파일방일 때 들어온 세대랑은 전혀 다르다는 거예요. 애초에 몰려드는 인재의 수가 다르잖아요?”
“으음…… 그랬구나. 모르겠네. 동문끼리 꼭 그렇게 나눠야만 하나?”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다들 말은 못해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대요. 그런데! 그런데도 정말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재들은 정작 팔파 세대에는 거의 없대요. 천무공자, 그리고 무산철공주랑 낙일창도 꽤나 유명하더라구요.”
“어? 크흠!”
청년이 갑자기 당황하며 헛기침을 했다.
수레 쪽에서 크큭― 하고 웃음을 참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는 게 아니었다니?
청년은 화가 나서 괜히 말고삐를 한 번 잡아당겼다. 말이 놀라서 앞발을 들며 멈춰 서자, 덜컹거리는 수레 뒤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어? 왜 그래요?”
“……아냐. 벌레를 본 것 같아서.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고삐를 당겼네.”
“으윽, 벌레는 싫어요.”
서유림은 질겁을 하며 청년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것처럼 몸을 옆으로 뺐다.
청년은 씁쓸하게 웃었다.
뒤를 힐끔 보니 발 한 쌍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누워 있던 자세를 바꾼 모양이었다.
“잠깐.”
그때 호위대장이 손을 들어 올려 무리를 멈춰 세웠다.
그는 날카롭게 치켜뜬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쉿!”
호위대장은 무서운 기세로 서유림을 조용히 시킨 뒤,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주변의 호위병들도 무기를 잡고 방진을 형성했다.
허허벌판을 지나, 커다란 바위들이 꽤나 많은 지역에 들어온 상태였다.
화창한 하늘에 까마귀 떼와 독수리가 몇 마리 날아다녔다.
무거운 침묵도 잠시.
가야금을 튕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위 너머에서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습격이다!”
호위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마차 주변으로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