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77화 (306/686)

8권 2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2)

“꺅!”

호위대장은 서유림을 번쩍 들어서 마차 안으로 집어 던지다시피 밀어 넣었다.

분위기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날아온 화살들은 분명히 마차를 노리고 있었다. 화살이 퍽퍽 박혀 들 때마다 놀란 말들이 앞발을 들며 허둥댔다.

“말을 진정시켜라! 대열을 갖춰!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라! 화살이 적은 걸 보니 숫자는 별거 아냐! 정면에서 싸울 준비를 해!”

호위대장은 군문 출신이었다.

북로전쟁 때 마적들과 상대해 본 경험을 살려 호위병들에게 정확한 지시를 내렸다.

호위병들은 불안에 떨면서도 지시를 따랐다. 이 또한 오랜 훈련의 성과였다.

“진짜로 습격을 받다니. 하오문의 조언이 맞았어.”

호위대장은 서가장의 막내딸을 데리고 출발하기 직전에 하오문 낙양 지부장이 해 주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서가장이 보유한 철광과 화약 생산지는 최근에 암약하는 어떤 무리의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대륙 전체로 보면 서가장보다 큰 곳도 많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젊지만 유능한 친구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공 지부장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지금도 호위대장의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호위대장은 수레를 끌던 청년에게 시선을 보냈다.

순박한 인상의 청년은 어느새 자신의 키보다 큰 철창을 들고 있었다.

탄성이 있으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재질의 창.

뾰족한 창날 아래, 붉은색의 천이 달려 있는 기창(旗槍)이었다.

철창을 드는 순간 청년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선한 얼굴은 그대로지만 차분한 눈빛, 일평생 무예를 단련해 온 자 특유의 잔잔하면서 날카로운 기세가 청년의 전신에 흘렀다.

“놀랍군.”

호위대장은 무림인이 아니었다.

그래도 호위대장 일을 하면서 무림인들을 지켜보니 당장 강호에 나가더라도 일류 소리는 들을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저 순박한 청년, 그리고 저 청년과 함께 온 장난기 많은 인상의 청년의 무위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자네,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어…… 그게…….”

청년은 잠시 고민하다가 정중하게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임무 중에는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게 규칙이라서요.”

“그런가.”

“그냥 서인이라고만 불러주세요.”

“서인.”

호위대장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하오문 낙양 지부장이 그러더군. 이번에 보낸 두 사람이 있으면 습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말이야. 자네들만 믿어도 괜찮겠나?”

순박한 청년, 서인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학관에서 ‘전심(戰心)’이라는 마음가짐을 배웁니다. 어떤 싸움도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라 배웠습니다. 걱정 말라고 장담은 하지 못하지만, 저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인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호위대장의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말은 그렇게 해도 승리를 확신하는 눈빛이군. 나는 전쟁터에서 자네 같은 눈빛을 많이 봤어. 마차를…… 부탁하지.”

호위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위 너머에서 일단의 복면인들이 나는 듯이 달려들었다.

복면인들의 숫자는 스무 명 정도.

생각보다 적은 숫자였기에 호위병들의 사기가 올랐지만, 청년은 오히려 더욱 긴장했다.

적은 수로 많은 수의 병사들에게 달려든다?

그건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채채챙―.

아니나 다를까. 복면인들이 병사들과 부딪치는 순간, 병사들은 단 일 격만을 막아 냈을 뿐 그 후에는 산사태가 일어나듯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피슉―.

“으악!”

복면인들의 동작은 가벼우면서 날카로웠고, 내뻗는 검술은 군더더기 없이 절도가 있었다.

입고 있는 갑주 덕분에 치명상은 입지 않았으나, 제각각 팔이나 다리를 찔린 병사들이 비척비척 뒤로 물러섰다.

그나마 다섯 명 정도 있던 기병들이 무예가 뛰어난 게 다행이었다.

거기에 호위대장까지 직접 검을 들고 달려들자, 그제야 균형이 조금이나마 맞춰져서 전선(戰線)을 형성했다.

“막아! 버텨라!”

“으아아아!”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지만, 복면인들은 어딘가 힘을 비축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쾌한 몸놀림으로 공격을 했다가, 다시 뒤로 훌쩍 몸을 빼는 모습에 여유가 가득했다.

그래도 호위대장이 분투하며 몰아붙이는 듯했으나, 복면인들 중에서도 무공이 가장 고강해 보이는 한 명이 나서자 호위대장은 곧바로 발이 묶여 버렸다.

“이놈……!”

호위대장은 으르렁거리듯 적의를 드러냈다.

그는 검은색 복면 위로 흰색 선을 한 줄 그어 놓은 사내였다. 놀랍게도 중간중간에 검기를 뿜어내며 호위대장을 어린애 다루듯 쉽게 몰아붙였다.

“으음…… 위험한데……. 마차만 지키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싸움을 지켜보던 서인은 복면인들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무공이 뭔가 이상했다.

소림의 무공은 소림의 느낌이 있고, 무당의 무공은 무당의 느낌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그런데 복면인들은 각기 다른 문파에서 신법과 검술을 따로 배운 듯 각각 움직임의 분위기가 달랐다.

신법은 소박하고 경쾌한데 검술은 고귀한 기품이 있었다.

바지는 면포를 두르고, 상의는 비단 옷을 걸친 듯한 모양새.

그럼에도 본래의 무공은 워낙 뛰어난지, 신공절학의 분위기가 은은히 흐르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도대체 왜……? 아니, 잠깐.”

서인의 안색이 굳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복면인들의 무공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구궁의 묘리를 담은 소박하지만 경쾌한 신법.

고고한 향기가 나는 듯한 검술.

“이런.”

서인은 함께 온 동료의 의견을 묻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지만, 수레의 짐칸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독자적인 행동을 개시한 듯했다.

“하아……. 하여간.”

서인은 한숨을 내쉰 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반각 정도는 조용히 고민하다가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호위병들은 전멸이었다.

“꼬마 아가씨.”

서인은 마차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단단한 오동나무 재질로 만들어진 마차의 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벌컥 열렸다.

“어떻게 됐어요! 이겼어요?”

“아냐. 꼬마 아가씨. 우리가 밀리고 있어.”

“네에?”

꼬마 소녀, 서유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굳어졌다. 그녀의 동요는 실제 싸움터를 보면서 더욱 커졌다.

병장기들이 부딪치고,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는 소녀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서유림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잠시 후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대체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화려한 단검(短劍)을 꺼내 들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때가 왔군요. 무산학관에 들어가기 위해 제가 익힌 숙녀검(淑女劍)의 위력을 선보일 차례가……!”

“아냐. 그거 아냐. 넣어둬.”

서인은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뭐라고요? 지금 제 숙녀검을 무시하는 건가요?”

“지금은 장난칠 때가 아냐. 넣어둬. 소녀검은 지금 말고 나중에 시험해 봐.”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소녀검이라니! 숙녀검이에요. 이 검술은 구파에서도 인정받은…… 꺅!”

까앙―.

퍽!

정확히 서유림을 노리고 날아든 단검이 철창에 맞고 옆으로 튕겨져 마차의 벽에 꽂혔다.

강하게 박힌 단검의 손잡이가 웅웅거리며 떨렸다.

서인은 무거운 철창을 한 손으로 가볍게 회전시켰다.

창날 밑에 달린 붉은색 혈당(血幢)이 펄럭이며 허공에 커다란 잔상을 남겼다.

“어깨를 노린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서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생각보다 더 위험하네. 꼬마 아가씨. 내 뒤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 줘.”

서유림은 화들짝 놀라 양팔을 교차시킨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굳어 있었다. 그녀의 멍한 시선이 서인의 뒷모습을 향했다.

서서인은 창끝을 비스듬히 옆으로 내린 채 꼿꼿하게 버티고 섰다.

“정황상 꼬마 아가씨를 납치해서 물건을 요구할 것 같았는데, 느닷없이 살수를 쓴다? 으음, 이해가 안 되네.”

서인은 수레에 타고 있던 그의 동료가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우유부단한 그에게는 결단을 내리는 게 큰 부담이었다. 함께 온 동료의 쾌도난마(快刀亂麻) 의 결단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뭔가 일이 힘들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인의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단검을 날린 복면인 세 명이 호위병들의 포위망을 빠른 속도로 벗어나 곧장 그들에게 달려든 것이다.

서인은 자세를 낮추고 양손으로 창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달려드는 복면인의 검과 창끝이 부딪치는 순간, 손목을 강하게 돌려 힘을 증폭시켰다.

까앙―.

기창의 회전력이 상대방의 검을 튕겨냈다.

서인의 손끝에서 펼쳐진 창술은 마치 커다란 채찍이 휘둘러지는 듯 경쾌하고 파괴적이었다.

짧은 검을 든 복면인들은 그 사나운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방어만 취하며 전전긍긍했다.

삼 대 일의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약관의 청년 한 명을 뚫을 수가 없었다.

복면인들은 초조해 보였다. 공방이 점점 빨라질수록 서로 합이 틀어지기 시작한 세 명의 검술에서 그 기색이 묻어났다.

서인은 그럴수록 더욱 여유를 갖고 상대방을 몰아붙였다.

전면 상단에 커다란 원을 한 번 그리자, 창날 밑에 붙어 있던 혈당이 태양처럼 붉은 원을 만들어 냈다.

펄럭이는 천에도 강인한 기운이 실리자 복면인들은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참(一斬)!

쩌엉―.

마치 하늘에서 내려진 천벌처럼, 강하게 내리꽂힌 기창이 가장 앞에 있던 복면인의 손에서 검을 부러뜨려 버렸다.

“큭……!”

복면인은 저릿저릿한 팔목을 붙잡은 채 뒤로 물러섰다. 복면 위로 드러난 눈에서는 놀람과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서인을 노려보았다.

“헛된 짓 하지 마라. 어차피 저들은 다 죽는다. 그 다음은 네 차례일 뿐이지. 지금 그 계집애를 내놓으면 조용히 보내 주마.”

복면인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저들?”

서인은 복면인이 가리킨 호위병들을 힐끔 쳐다봤다.

정신없이 밀려난 호위병들은 마차에 거의 몸을 기대다시피 한 채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확실히, 그 모습만 보면 위기이긴 했다.

누가 봐도 호위병들이 몰살당하고 서인과 소녀만 남아 포위되는 미래를 상상할 듯싶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여긴 나 혼자 온 게 아니거든.”

“……뭐?”

“슬슬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서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습격을 가하던 복면인들의 뒤에서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나이는 약관 정도 되어 보였다.

키가 크고 몸이 잘 단련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더 어리게도 볼 수 있을 듯했다.

새하얀 비단 무복에 비단 장포, 금사로 간단한 문양이 수놓인 고급스러운 복장이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묶었고, 이마에 두른 영웅건과 머리끈조차 흰색 비단 천에 금사 문양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황실의 사람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귀해 보이는 인상이다.

하얗고 매끈한 피부에 고생이라고는 안 해 본 것처럼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그런 추측에 신빙성을 더했다.

새롭게 나타난 청년은 서인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외쳤다.

“미안! 궁수들 정리하느라 늦었어!”

구김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해맑은 목소리에 격렬했던 싸움이 자연스레 멈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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