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3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3)
피아를 막론하고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똑같았다.
‘뭘 정리해? 진짜로?’
‘대체 저놈은 누구야!’
청년은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하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성큼 발을 내딛는 자세는 황자(皇子)처럼 기품이 있고,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얼굴에선 시장통을 헤집고 다니는 장난꾸러기 같은 자유로움도 엿보였다.
청년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복면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격의 없이 물었다.
“여기 대장이 누구예요?”
이웃 마을에 놀러가 질문을 던져도 그보단 덜 편할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대답은 없었다.
복면인은 어찌나 황당했는지 복면 아래에서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를 대답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대답 안 해 줄 거예요? 아! 저기에 계시는구나?”
주변을 살펴보던 청년의 시선이 호위대장을 몰아붙이던 복면사내에게서 멈췄다.
다른 복면인들과 구별되게 복면 위로 흰색 줄을 하나 그어 놓은 사내였다.
그는 호위대장을 피투성이로 만든 검을 움직여 청년에게로 겨눴다.
“넌 뭐냐?”
복면인은 살기를 담아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저는 제 이름을 숨기지 않는 편인데요. 그래도 지금은 적에게 정체를 알려 줄 수 없어요.”
“……궁수들을 처리했다는 게 정말이냐?”
“처리했다뇨. 무서운 말을 하시네. 정리했어요. 더 이상 싸우지 못하게.”
청년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복면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목에 걸고 있던 호각을 꺼내 길게 불었다. 호각 소리가 어찌나 큰지 주변의 모두가 귀를 막고 눈살을 찌푸렸다.
삐이익―.
“아야야.”
청년은 귀를 막았던 손가락을 떼며 씩 웃었다.
“대답이 없죠?”
“이놈……!”
복면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처음 볼 때부터 청년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생각은 했지만, 그 예감이 사실로 드러나니 당황스러웠다.
그는 머리 위로 왼손을 들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채챙―.
습격자들의 분위기가 변했다. 그들은 들고 있던 모든 무기들을 청년에게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싸우던 호위병들은 무시한 채 오로지 청년만을 바라봤다.
“와아, 무서워라.”
말만 그렇게 할 뿐 청년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을 말할 수 없다고?”
“네.”
“그럼 무명소졸로 죽어라.”
쒜에엑―.
복면인은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검기로 청년의 목을 노렸다.
표홀한 움직임, 고고한 향기가 나는 듯한 검술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검기는 선명하게 그의 검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청년을 경계하는 만큼 더욱 내력을 집중시켰다. 실낱같은 검기가 올올이 풀려나와 검 날 전체에 더욱 강인한 기운을 엮어 냈다.
검기와 검강의 사이. 절정의 경지에 올라 무엇이든 베고 부술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쒜에에엑―.
복면인의 눈빛이 잔인해졌다.
그는 아직 앳된 청년이 그 공격을 버텨 내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라 확신했다.
청년의 허리춤에 있던 박도가 뽑혀 나오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촤아악―.
“……!”
복면인의 숨이 멎었다.
청년의 손에 들린 차가운 칼날이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면서 그의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한순간이었다.
청년은 복면인보다 모든 것이 한 박자 빨랐다.
분명히 그가 먼저 검을 휘둘렀는데, 뒤늦게 뽑은 청년의 칼이 그의 몸에 먼저 닿다니 놀랍지 않은가.
투로(鬪路)는 어떠한가?
이름 높은 명인(名人)이 커다란 붓으로 허공에 난을 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듯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린 칼이 몸에 닿는 순간, 그는 천돌(天突)부터 거궐(巨闕)까지 혈맥 전체를 후려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크윽…….”
복면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뜬 채 두 걸음을 물러섰다.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가슴을 더듬어 보니 상처가 만져졌다.
깊지는 않았다.
놀랍도록 정확하게 피륙만 가른 상처다.
“베였는데…… 때렸다……?”
복면인은 숨을 헐떡거렸다. 칼에 실렸던 내력이 가슴 부근의 혈도들을 때려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칼에 베였는데 얻어맞은 것처럼 혈도를 제압당한다.
복면인은 자신이 대문파에 소속되어 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 이러한 검술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태극혜검……!’
한 방에 맥이 탁 풀린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복면인의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이상하죠? 검기니 검강이니. 어차피 사람은 칼에만 닿아도 죽는 약한 목숨인데. 왜들 그렇게 보이는 거에 집착할까요?”
청년은 빙글 몸을 돌려 뒤쪽에서 습격해 오는 또 다른 복면인의 가슴을 베어 냈다.
똑같이 유려한 곡선.
조금 전과 똑같은 각도로 칼날이 날아갔다.
덤벼든 복면인도 검기를 쓸 수 있는 고수였지만, 청년은 너무나 손쉽게 상대를 베어 냈다.
뒤통수에 눈이 달려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거리 조절이 기가 막혔다.
칼에 맞은 자는 뻣뻣하게 굳어진 채 비척비척 뒤로 물러서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걸 시작으로 주변의 모든 복면인들이 한꺼번에 청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학관에 명안(明眼)이라는 과정이 있어요. 구파의 무공을 모두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이에요. 배워 두길 잘했네요. 매화검의 사문(死門)은 천돌에서 거궐. 첫 공격을 시작할 때 가슴이 비어요.”
청년의 말을 들은 복면인들이 황급히 초식을 바꿔서 공격했음에도 속수무책이었다.
청년은 매화검의 약점들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 같았다. 그들의 무공이 낱낱이 파헤쳐지고 파괴되었다.
한 명이 상대하든, 여러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든 똑같았다.
일인당 일 초식.
열댓 명의 무인이 바닥을 나뒹구는 데에 필요한 시간은 고작 반각에 불과했다.
“이놈……!”
가장 먼저 쓰러졌던 남자.
복면인의 대장 격인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났다.
“믿을 수가 없군.”
그는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기경팔맥을 얻어맞은 복면인들이 모두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지난 육 년간 어떻게 단련을 해 왔는데.
상대가 유명한 무림 십대고수도 아니고, 고작 약관의 청년에게 이렇게 쓰러질 사람들이 아니었건만.
“으아아아!”
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청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원진기까지 모두 뽑아서 쓴다는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매화검을 펼쳐냈다.
그가 가장 자신 있는 매화만개의 초식이 청년의 사방을 압박하며 검기를 뿜어냈다.
촤아악―.
“……!”
그래도 일격.
불과 일초지적에 불과한 자신의 실력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복면인은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상대는 고작 한 걸음 앞에 있건만, 마치 장강 너머에 있는 듯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요괴가 따로 없군…….”
금사로 장식된 새하얀 비단 무복을 입고, 햇살처럼 빙긋 웃는 청년을 보면서 그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
마차를 습격한 복면인들은 능숙한 창술을 구사하는 서인을 상대로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한 번 무너진 균형은 걷잡을 수 없이 큰 차이를 만들어 놓았다.
일 격, 일 격.
겨우겨우 버텨 내던 습격자들이 마침내 모두 바닥에 쓰러졌을 때, 서인은 그제야 창을 거두고 호흡을 갈무리했다.
상처는 없었다.
무난한 승리였다.
“세상에……! 하오문 아저씨!”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는 서유림에게 서인은 진지하게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어 제자리에 멈춰 세웠다.
“잠깐.”
그는 품에서 막대처럼 둘둘 말린 포승줄을 꺼냈다.
“전심(戰心) 하나, 생사를 건 싸움을 했을 때는 싸움이 끝났더라도 방심하지 말 것.”
중얼거리듯이 외는 것은 무산학관에서 배운 가르침이었다.
서인은 복면인들의 손목을 모아서 절대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었다.
서유림은 마치 강아지 같았다.
기다리라고 하니 기다리고는 있지만, 눈을 반짝거리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거 뭔가 귀찮아질 수도 있겠는데.’
서인은 생각했다.
왜 불길한 상상은 틀린 적이 없는 것일까.
복면인들의 손이 잘 묶였는지 두 번씩 확인한 뒤에 일어서자마자 소녀의 질문이 쏟아졌다.
“아저씨, 아저씨.”
“어?”
“저분, 저분! 천무공자님이죠. 맞죠?”
서인은 확실히 아직도 순진한 면이 있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 어어?”
“맞잖아요! 저렇게 금사로 수놓은 백색 비단 옷이 잘 어울리는 분이 또 있을 리가 없어요. 게다가 저 요대!”
“……!”
서인은 화들짝 놀라서 멀리 있는 자신의 친구를 살펴보았다.
싸움을 하면서 장포가 젖혀지자 속에 차고 있던 두꺼운 철요대가 눈에 들어왔다.
“저 요대는 잘 알고 있어요. 서가장의 모든 패물을 다 파악하는 이 서유림의 눈을 피할 수는 없죠. 저건 소애 언니가 저를 만날 때마다 보여 주면서 자랑했던 그 철 요대라고요. 무산학관에 합격한 사람들만 차고 다니는 관도들의 상징!”
서유림은 자신의 추리가 어떻냐는 듯 콧대를 세우고 의기양양하게 허리를 폈다.
“소애였구나!”
“그래요. 소애 언니…… 네?”
이번엔 서유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서인은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 올려지는 듯한 탄식을 내뱉었다.
“하아…….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서인은 이마를 짚었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놈이 무산학관 철 요대를 차고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처음부터 정체를 숨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저분이 왜 하오문인 척 우리와 함께 왔는지도 알고 있어요!”
“……그래?”
“네! 무산학관을 졸업하려면 비밀 임무를 하나 수행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실전을 한 번 겪어 보고 조건을 충족해야만 졸업시켜 준다고……. 세상에! 말로 듣기는 했었는데, 그게 나를 호위하는 일이라니! 저분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이건 인연이 아닐까?”
서유림은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쓰러질 것처럼 허리를 뒤로 젖혔다.
이젠 익숙한 모습이기에 서인은 놀라지도 않았다.
“너 진짜…… 많이 아는구나.”
서인은 힘없이 감탄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한편, 싸움을 끝낸 ‘천무공자’는 서인을 향해 다시 한 번 손을 흔들며 해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서인아! 끝났어! 임무 끝인 것 같아! 어서 학관으로 돌아가자!”
서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트집을 잡을 힘도 없었다.
“그래, 그래. 고생했다, 소호야.”
서인은 정체를 감추기 싫어하는 절친한 친구, 장소호를 향해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
호위병들의 무예는 복면인들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에 있어서는 굉장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한데 모여서 뚝딱뚝딱 망치질을 하더니 어느새 평범한 수레를 사십 명 가까이 되는 사내들을 한꺼번에 수송할 수 있는 커다란 수레 감옥으로 개조해 버렸다.
기병들이 제공한 말 세 마리를 연결하자 수레 감옥은 잘 움직였다. 덜컹거리는 나무 창살 너머로 멍하니 앉아 있는 복면인들이 넋이 나간 얼굴로 흔들거렸다.
“그래서, 화산파랑 무슨 관계에요?”
호위대장, 소호, 서인. 세 사람은 감옥 앞에서 복면인들의 대장과 대치하고 있었다.
복면은 벗겨 냈다.
나이는 서른 즈음 되었을까. 우툴두툴하게 흉터가 가득한 얼굴 위, 가늘게 쭉 찢어져 독기 가득한 눈빛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자기들이 무엇에 지배당하는지도 모르는 멍청이들……!”
씹어뱉듯이 내뱉는 말에는 이유 모를 증오만이 가득했다.
소호는 호위대장에게 물었다.
“호위대장님. 여기서 잡혀가면 이 사람들은 어디로 가요?”
“아마 동창. 아니, 이젠 흑시군이던가? 거기로 가야 할 거다.”
“흑시군……. 무서운 곳이죠?”
“지옥이 더 나을 정도지.”
호위대장은 뭔가 들은 것이 있는 듯했다. 그는 벌레를 씹은 것처럼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하하하핫!”
그때, 양손이 묶인 채 얌전히 앉아 있던 복면인들의 대장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창살에 얼굴을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들이받았다.
깜짝 놀란 호위대장과 주변의 호위병들이 무기를 뽑을 뻔했다.
그는 자해를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이나 옆얼굴로 창살을 들이받더니, 입과 볼이 피투성이가 된 뒤에야 멈췄다.
“후후, 카악―, 퉤!”
피투성이가 된 얼굴 위로 드러난 눈빛에 광기가 가득했다.
그는 묶여 있는 손바닥 위로 핏덩이를 하나 뱉어냈다.
손가락 중지만한 원통형의 도기였다.
도대체 어떻게 입속에서 나왔는지 모를 기묘한 물건이었다.
“잠깐. 멈추……!”
호위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그 원통형의 물건을 바닥에 강하게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