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80화 (309/686)

8권 5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5)

새카만 재를 털어내자 드러난 껍데기는 꽤나 특색이 있는 모양새였다. 소호와 조서인은 호위대장이 조심스레 건네준 껍데기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크기는 가운데 손가락만 하고, 재질은…… 특이하네, 매끈하면서 단단해. 도기(陶器)일까? 아니면 철?”

“질그릇 종류? 어…… 음……. 그것치고는 단단해 보이지 않아?”

“그 엄청난 화염 속에서도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불에 강한 것만큼은 확실해. 가볍고 단단하고, 열에 강하다……. 누가 이런 걸 만든 거지?”

소호가 가볍다는 것을 보여 주듯 물건을 허공에 살짝 던졌다가 다시 잡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조서인이 화들짝 놀라 그런 소호를 만류했다.

“우왓, 조심해. 혹시 안에 뭔가가 남아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괜찮아. 아까 탈탈 털었어. 게다가 그만한 열이랑 충격을 받았는데 위험한 게 남아 있을 리가 없잖아.”

소호는 어린아이가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들을 살펴보듯, 주의 깊은 눈으로 관찰했다.

화기 껍데기의 내부는 원통형 구조가 이중으로 겹겹이 싸여 있었다.

“그냥 충격만 받으면 터지는 종류는 아닌 것 같아. 분명히 던지기 전에 뭔가를 눌렀어. 그 뒤에 속에 있던 내용물이 흘러나오면서 터졌고. 하긴, 그러니까 이런 위험한 걸 입속에 숨기고 있었겠지. 조작하지 않으면 안 터지니까.”

“아! 맞아, 그것도 이해가 안 되더라. 어떻게 이만한 걸 입에 넣고 있었지?”

“전에 자강이가 그랬잖아? 살수들의 세계는 기괴해서 그중에는 암기를 숨기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찢고 개조하는 사람도 있다고. 그런 것 아닐까? 잇몸이나 볼 살을 찢고 넣어 뒀을 거야. 아니면 이빨에 실을 걸고 삼켜서 배 속에 넣어 두는 경우도 있다고 했었어.”

“으으.”

조서인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듯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근데 자강이? 아! 당자강?”

“어. 걔 있잖아. 사천 당가 출신. 우리보다 일 년 늦게 들어온 그 친구.”

“……팔파 세대네.”

조서인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소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그만해. 팔파는 무슨. 세대가 무슨 상관이야. 뛰어난 사람은 뛰어난 거지.”

“그래, 그래. 알았어, 천무공자님.”

“나 참, 아무튼 그 친구는 암기만 파고든 애니까 그쪽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더 잘 알겠지. 일단 중요한 건……. 문양. 여기 문양이 있어. 흰색으로 새겨 놓은 걸 보니 그 ‘백검’인 것 같아. 이런 문양 본 적 있어?”

“매화나무, 이건……. 북두칠성? 그 사이에 검이 한 자루 있는 것 같아.”

“응, 그 세 개를 합쳐 놓았네.”

소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호위대장에게 양해를 구했다.

“호위대장님. 이건 저희가 가져가서 조사를 해 봐도 될까요? 하오문이랑 아는 곳을 통해서 좀 더 알아보면 단서가 나올 것 같아요. 재질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호위대장은 난색을 표했다.

“곤란하군. 관청에서 조사를 나오면 암기에 대해서도 물어볼 텐데, 함부로 건네줄 수는 없어.”

“건네줘요, 호위대장.”

그때 옆에서 서유림이 불쑥 나타나 호위대장의 옷을 잡아당겼다.

“아가씨?”

“저 두 분은 무산학관의 관도예요. 무산학관의 이름을 걸고 조사하는데 잘못될 리가 없어요.”

“그렇지만…….”

“게다가 이분들 아니었으면 저희는 그 습격에서…… 살아남기 힘들지 않았을까요?”

서유림은 말을 조심해서 하긴 했지만, 그 속뜻은 명확했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그들은 죽은 목숨이었다.

호위대장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구명지은(救命之恩)은 크지요. 아가씨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리고 말씀대로 무산학관의 분들이라면 믿고 맡기겠습니다.”

호위대장의 은근한 눈빛을 받은 소호는 그 속뜻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자세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천무공자’ 같은 태도로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무산학관의 관도인 장소호라고 합니다. 학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라 본의 아니게 정체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호위대장은 감탄했다.

비단 옷을 입고 정중히 예를 표하는 소호의 모습은 그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절도 있고 기품이 있었다.

“밝히면 안 되는데…….”

조서인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소호처럼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무산학관의 관도 조서인입니다. 정체를 숨겼던 것 사과드리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던 조서인은 서유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충격을 받아 멍하니 있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감정의 수습이 참으로 빠른 소녀였다.

“저는 서가장의 서유림이에요.”

서유림은 포권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에게 성큼 다가왔다.

“선배님들! 조사 잘 해 주셔야 해요. 저희는 서가장에서 결과를 기다릴 테니까요!”

“어어…… 선배님들?”

“저도 조만간 무산학관에 들어갈 거니까요!”

가슴을 쭉 펴고 패기 있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선 의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서인은 난감해했고, 소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꼭 들어와야 해! 서 소저는 무산학관이랑 잘 어울려.”

“어머나, 감사한 말씀.”

서유림은 조서인에게는 보여 주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감동받은 듯 눈을 반짝거렸다.

“숙녀검으로는 안 될 텐데…….”

“…….”

서유림은 걱정스럽게 말하는 조서인에게로 다가가 귓속말로 무언가를 말했다.

조서인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얼른 서가장으로 가요. 제가 맛있는 걸 대접할게요!”

웬만한 호걸 뺨치게 호탕한 서유림의 인도로 그들은 서가장으로 가는 여정을 계속했다.

서유림은 약속을 지켰다.

서가장의 가주에게 두 사람이 조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약속을 받아 냈고, 앞으로 철이나 화약과 관련된 물건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 달라는 호의 넘치는 말도 들었다.

상다리가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은 화려한 식사를 대접받은 뒤에 며칠 묵다가 가라는 제안은 안타깝지만 거절했다.

서유림과 호위대장은 두 사람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계속 문 앞에 서서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서인아. 그때 꼬마 아가씨가 귓속말로 뭐라고 했어?”

“아, 그거?”

조서인은 쑥스러워하면서 대답했다.

“아저씨라고 부른 게 미안하대. 오라버니라고 부를 테니 미워하지 말라더라.”

“하하핫!”

소호가 웃을수록 조서인의 얼굴은 점점 빨개졌다.

“그만해.”

“알고는 있었지만, 대단한 아가씨네. 재밌다. 무산학관에 꼭 들어왔으면 좋겠어.”

“그러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나 정이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두 사람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이제 어디로 가?”

“낙양. 하오문으로 가자. 이걸 알아봐야지.”

소호는 원통형의 용기를 들었다가 다시 품 안에 넣었다. 허리에 찬 철 요대를 붙잡으니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 같았다.

“낙양으로!”

두 사람의 말이 빠르게 달려 나갔다.

***

“백검……이라고?”

하오문의 하남 지부장, 무상의 제자로 알려진 공진표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원통형의 물건을 노려보았다.

지난 육 년의 세월은 그를 젊은 청년에서 관록 있는 중년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여전히 창백해 보이는 하얀 얼굴 위로, 눈가와 입가에 잔주름이 생겨났다.

턱을 반으로 쪼개 놓은 듯한 흉터는 여전했고, 머리에는 드문드문 새치가 생겨 전체적으로 머리카락이 회색으로 보였다.

“신기하군.”

공진표는 반각 가까이 진지하게 살펴본 뒤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보지 못한 구조의 암기다. 가루가 불꽃이 되고, 그 불꽃이 사람의 몸에 붙어 또 다른 겁화가 되다니. 처음 들은 이야기야. 이런 게 있었다면 소문이 돌아도 열두 번은 더 돌았을 거다.”

공진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죽간 더미로 다가갔다.

“이놈들, 제대로 선전포고를 했군. 드디어 움직였어.”

공진표의 말투는 의미심장했다.

이상함을 느낀 소호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알고 계셨네요?”

“알고 있다고 표현하긴 어렵군. ‘의심하고 있었다.’라고 표현해야겠어.”

공진표는 이쪽 세계는 단어 하나가 중요하다면서 피식 웃었다.

냉철한 성격의 그 나름의 농담인 듯했다.

“하, 하, 하.”

조서인이 어색한 목소리로 마주 웃어 주었다.

소호는 조서인의 웃음을 보고 오히려 웃겨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그래서요? 어째서 ‘의심하고 있었다.’인데요?”

“최근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다. 명 황실에서 내로라하는 철광들은 다 약탈을 당했어. 아, 물론 지금부터 말하는 건 기밀이다. 다른 데에 말이 흐르면 동창이 와서 잡아갈 거야.”

공진표는 뒤쪽에서 가만히 서있던 홍원에게 손짓을 했다.

흐른 세월만큼 나이가 든 홍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창문과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흥미로운 건 약탈당한 철이나 화약의 양이 별로 많지 않았다는 거다. 많아야 두어 명이 자루에 넣어 들고 갈 정도? 고작 그 정도니까. 이게 좀도둑의 소행인지 조직적인 무언가의 소행인지 파악이 되질 않았지. 그런데 얼마 전에 동창에서 이런 게 왔어.”

공진표는 죽간 더미 맨 위에 있던 서찰을 소호에게 건네주었다.

소호가 열어 보자 그 안에는 몇 글자 없었다.

추(追) 일급(一級).

소호가 조서인에게도 보여 주자, 조서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실제로 위에서 이걸 눈치채고 연결시켜서 조사를 지시한 건 불과 며칠 되지도 않았어. 참고로 일급이라고 하면 한 성(成)의 모든 힘을 동원해 쫓아야 할 일이다.”

공진표는 서찰 바로 밑에 있던 죽간을 꺼내 그걸로 손을 탁탁 두드렸다.

“여기에 죽간이 몇 개나 될 것 같나?”

“한…… 백 개?”

“그래.”

소호의 입이 벌어졌다.

“설마, 그게 다?”

“대륙 전체에서 지금까지 조사 된 게 일백 다섯 개다. 진위 여부는 조사해 봐야겠지만, 내가 볼 때는 걸러낼 걸 걸러내도 최소한 일흔 번은 넘었어.”

공진표의 얼굴은 심각했다.

소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두어 명이 자루에 담을 정도의 양으로 일흔 번.

그 정도의 철과 화약이라면…….

“전쟁도 하겠네요.”

공진표는 부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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