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6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6)
“한 성 정도라면, 도모해 볼 만하지.”
“으음…….”
소호는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하오문 낙양 지부장의 방 안은 지독한 침묵에 휩싸였다.
문득 옆에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쳐다보니 조서인이 안색이 창백해진 채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전쟁…… 한 성…….”
눈에서 초점이 사라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조서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선 정보였던 모양이다.
소호는 보이지 않게 조서인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래서, 저희에게 그 말을 해 주시는 이유는요?”
“역시 핵심을 볼 줄 아는군.”
공진표는 진지한 얼굴로 소호와 눈을 마주쳤다.
“이번 일, 너희가 졸업을 위해 통과해야 할 관문이었지. 이름이 습림관(習林關)이던가?”
“네, 무림에 대해 익힌다고 해서 습림관이요.”
“이대로라면 실패다. 잡은 범인들을 다 잃어버렸으니까.”
“…….”
소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모두가 아는 말을 한다?
즉, 당연하지 않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상황의 경중을 따지면 너희의 임무는 다른 임무들에 비해 지나치게 심각한 일이었지. 그러니 나는……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너희를 변호해 볼 생각이다.”
“감사한 말씀이긴 하지만 물어볼 수밖에 없네요. 왜죠?”
소호는 속내를 감추는 데 능숙한 성격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까진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편의를 봐준 적 없으시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이건 상황이 다르다.”
“그런가요?”
“그래. 많이…… 정말 많이 다르다.”
공진표는 심각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러니 너희의 임무는 여기에 있는 화기의 근원을 찾아보는 걸로 하자. 하나의 단서만 찾더라도 통과한 거라고……. 학관에는 내가 잘 말해 놓겠다.”
소호는 공진표의 눈에서 절박함을 보았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
그리고 간절히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이 화기 껍데기를 가지고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는 거죠?”
“그래.”
“하나의 단서만 찾더라도 통과인 거구요?”
“그래.”
공진표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마치 소호가 할 질문을 미리 생각해 두었던 사람 같았다.
‘이상한데.’
소호는 이번에도 내심을 숨기지 못하고 곧장 물었다.
“저희는 고작 약관의 청년들인데 도움이 될까요?”
“대의를 위해 일을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본인이든 본인의 가문이든, 큰일에 힘써 줄 마음만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도움이 될 테지.”
“흐음.”
소호는 옆을 힐끗 바라보았다가 바로 후회했다. 이번 일은 조서인과 둘이서 하는 일이니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는데, 얼굴을 보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물을 필요도 없었구나?”
조서인은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얼굴 표정만으로도 ‘팔파 세대와 같이 학관을 다니긴 싫어!’라고 외치는 듯했다.
“에휴, 알겠어요. 지부장님. 설마 미미 할아버지의 제자분이 저희에게 안 좋은 일을 하시지는 않겠죠?”
“물론, 하오문은 최선을 다해 너희를 지원할 것이다.”
“저는 그냥 단서만 찾아볼 거예요.”
“그거면 충분하지.”
공진표는 소호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해 예를 표했다.
무뚝뚝하고 냉철한 그가 보여 주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소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고 조서인과 함께 그저 마주 포권을 취해 예를 표했다.
“잠깐 종이랑 붓 좀 쓸게요.”
소호는 공진표가 순순히 넘겨준 세필로 서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뭘 쓰려는 거지?”
“단서를 구하려고요.”
“……서신으로? 참고로 우리의 대화는 일급에 해당하는 비밀이다.”
“네, 알아요. 우리가 나눈 대화는 한마디도 적지 않을 거예요.”
소호는 일필휘지로 글들을 적어 내려갔다.
명필은 아니지만, 깔끔한 글씨가 용사비등하게 서찰 위를 누볐다.
소호는 세필로 적은 서신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럼, 단서를 찾아올게요.”
소호는 조서인과 포권을 취한 뒤 성큼성큼 밖으로 빠져나갔다.
공진표는 그들이 모두 떠날 때까지 배웅하는 모습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
“지부장님답지 않았어요.”
하오문 낙양 지부의 참모이자 화화공자, 홍원은 여전히 비단 옷을 잘 차려입고 깔끔하게 멋을 부린 모습이었다. 입가와 눈가에 잔주름이 있어 나이는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그는 아이들을 배웅한 뒤 돌아와 공진표에게 쓴 소리를 했다.
“나다운 게 뭐냐, 홍원.”
“냉철, 계획적, 이성적 그러면서 사람의 도리는 지킬 줄 아는 인성.”
홍원은 막힘없이 곧장 대답했고, 공진표는 헛웃음을 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다 틀렸군.”
“오늘 일만 봐선 다 틀린 것도 같네요.”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저 애들을 끌어들이는 건 안 좋은 생각인 것 같은데요.”
“최소한이야. 정말 최소한만 도움을 받을 거다.”
공진표는 반으로 쪼개진 것 같은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초조할 때면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상황이 심각해. 백검이라니. 그런 조직이 있겠거니 생각은 해 왔지만, 이렇게 실질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문제가 크다.”
“으음…….”
“한 번 생각해 봐라, 홍원. 네게 불구대천의 원수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너는 그 원수 놈한테 네 정체를 언제쯤 밝힐 것 같나?”
홍원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복수 다 해 놓고, 마지막 칼을 내리치기 직전? 그때쯤에 목에 칼을 들이대고 분위기를 잡으면서 말하겠죠. 들어라! 나는 사실 네놈이 망친 가문의 장자로서……. 아! 그 이야기시구나.”
홍원은 그제야 공진표의 말뜻을 알아챘다.
“이름을 걸고 행동한다는 건 복수 준비를 마쳤다는 거죠?”
“그래. 아니면…….”
“예?”
“미끼일 수도 있고.”
홍원은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싶어 인상을 팍 찌푸렸다. 공진표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그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을 거듭할 뿐이었다.
“어째 됐건 상황이 급박하다. 놈들은 화산과 종남의 것으로 보이는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어. 즉, 구파의 무공을 쓴다는 거다. 그런 놈들이 이번 습격에만 오십여 명. 드러나지 않은 힘은 그의 다섯 배에서 열 배는 될 테지.”
“엄청나네요. 그런 놈들을 상대하는데 지부장님은 애들을 보냈구요.”
“보낸 게 아니다. 단서만…… 단서만 찾으면 돼.”
공진표는 죽간을 쌓아 놓은 곳 옆에 놓인 가죽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그가 탁상 위에 주머니를 풀고 쏟아내자, 질그릇 같기도 하고 철 같기도 한 재질의 파편과 조각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아까 그게 그렇게나 많았어요?”
홍원은 깜짝 놀라 황급히 되물었다.
“완전한 모양새는 없었어. 오늘 들었듯이 가루가 뿜어지고 사람 몸과 닿으면 불이 붙는다는 사실은 나도 오늘 처음 알았고. 하지만 결과만 놓고 봤을 때 비슷한 사건들은 화약 도난 사건 때 많이 있었다. 지금까지 생존자나 목격자가 없었을 뿐이야.”
“어쩐지 요즘 사천 당가랑 서신을 많이 주고받으시더니……. 그러면? 이미 단서는 알고 계신 겁니까? 애들은 그냥 시험차 보낸 거고요?”
“아니.”
공진표는 제법 원형에 가깝게 반 이상 남아 있는 원통형의 껍데기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침중했다.
“황실 직속 야장들, 소위 무림오대 장인이라 불리는 자들, 거기에 사천 당가에까지 찾아갔었는데 소득이 없었다. 다들 화약이나 기름을 넣은 거 아니냐면서 비슷한 말만 떠들고 하나도 모르는 눈치였다. 재질도 처음 보는 재질이라더군. 괜찮은 파편들을 하나씩 나눠 주고 알아봐 달라고 하긴 했지만……. 내 생각엔 결국 도움이 안 될 거다.”
“……그 정도 하셨으면 명나라에서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 그러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거야.”
공진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푸라기? 약관도 안 된 애들이 지푸라기는 됩니까?”
“너는 모른다. 무산학관의 작은 호랑이가 왜 천무공자인지.”
“예?”
“너희는 미미가 잘 따르는 고향의 동네 오라비 정도로 생각하니까. 뭐,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고.”
“그럼 그게 아니란 말입니까?”
“아니 맞지. 맞는 말인데, 다만 그 고향이 일반적인 화전촌이 아닐 뿐이다.”
“예?”
공진표는 자신의 품 안에서 고급스러운 비단 봉투로 밀봉된 서찰을 하나 꺼내 들었다.
홍원의 위치에서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대충 여러 개의 이름들로 보였다.
“그게 뭡니까?”
“특급.”
자연스럽게 서찰을 보려고 기웃거리던 홍원이 움직임을 딱 멈췄다.
특급이라니.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에만 붙는 등급이 튀어나왔다.
“전국 각지에서 화약을 조금씩 훔쳐서 뭔가를 획책하는 위험천만한 놈들에 대한 게 일급이잖아요.”
“그렇지.”
“근데 이름 몇 개 적힌 그 종이 쪼가리가 특급이라고요?”
“그래.”
“에이, 농담도.”
“농담 같나?”
공진표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홍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럼 됐습니다. 안 볼랍니다.”
“이게 뭐냐면.”
“알기 싫다니까요.”
“미미와 소호의 고향 마을에 사는 요인(要人)들 명단이다.”
“……!”
“이 중에 한 명의 능력이 지금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해. 천무공자는 그 사람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셈이지.”
홍원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갔다.
“어, 그러니까…… 그, 누군지 모르는 특급 요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천무공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 그 사람 이름은 일흉대기 광…….”
“안 들을 겁니다! 안 들을 겁니다!”
“후후, 알았다.”
처음으로 공진표가 나직하게 웃었다.
홍원은 귀를 틀어막는 척을 하다가 질문했다.
“그런데 소호에게는 직접 그렇게 말씀 안 하셨잖아요? 알아들었겠습니까?”
“저 친구는 알아들었어.”
“그래요?”
“그래. 보기보다 눈치가 빠르더군.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공진표는 확신하고 있었다.
“하오문이 해야 할 일은 천무공자를 지원하고, 이 일이 밖에 새어 나가지 않게 비밀을 지켜 주는 거야.”
“걱정 마십쇼. 어차피 여기 낙양 땅에서 천무공자한테 어깃장 놓을 하오문도는 없으니까요.”
홍원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공진표는 그 이유가 짐작이 되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미미 때문에?”
“예. 무산철공주가 워낙 유명해야죠.”
“요즘도 그러나?”
“더 난리죠. 이러다 이쪽 뒷세계에서 문파 하나 차리는 건 아닌가 싶다니까요.”
“학관에서 자주 나오지도 않았는데, 피는 무섭군.”
공진표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혈수라의 딸은 거화신녀, 거화신녀의 딸은 무산철공주인가.”
“하하핫.”
“꽃 문신은 못하게 해라.”
“안 그래도 기방 쪽 애들이 자꾸 바람을 넣는 모양이던데. 등에 큰 꽃 하나 새기면 예쁘겠다고.”
“…….”
“알겠어요, 알겠어. 못하게 만들 테니 그런 무서운 표정은 짓지 마세요.”
홍원은 소호를 지원하러 가야 한다며 서둘러 빠져나갔다.
닫히는 문을 보면서 공진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잘되어야 할 텐데…….”
그의 목소리는 허공에서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
뒷문을 통해서 낙성다루를 몰래 빠져나온 소호와 조서인은 세 번이나 방향을 틀고 나서야 시끌벅적한 낙양 대시 부근으로 섞여 들었다.
워낙 바쁘고 산만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소호의 흰색 비단 옷과 허리에 찬 철 요대는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선망의 눈길을 힐끔힐끔 보낸다.
조서인은 소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소호야,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갈지 생각해 봤어?”
“응, 표국으로 갈 거야.”
“표국? 아! 아까 그 서찰을 보내게?”
소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들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고개를 들자, 커다란 삼 층 전각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랑하며 낙양 대시를 굽어 보고 있었다.
짙은 갈색의 현판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風雲鏢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