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7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7)
―風雲鏢局.
“풍운표국?”
조서인은 잠시 눈을 끔뻑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본 적이 있어. 저거 우리 동네에도 있었거든. 표국 사람들이 친절해서 좋았었어.”
“그래?”
“응. 다른 표국은 돈 되는 손님 아니면 좀…… 거들먹거리거든. 표사들도 까칠하고.”
“하핫, 그렇다곤 하더라.”
“그립다. 옛날 생각이 나네.”
“무슨, 서인이 너 영감님처럼 말한다?”
“어릴 때 먹을 게 별로 없었거든. 그럴 때 쟁자수들 하는 일을 좀 도와주면 일당이나 먹을 걸 주곤 했었어. 그때 여러 가지 많이 배웠었는데.”
조서인은 아련한 눈으로 표국의 현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찌 보면 슬픈 이야기였지만, 소호든 조서인이든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신기하다. 서인이는 그런 일도 해 봤었구나. 그럼 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대충 알겠네?”
“잘 알지. 다른 지역으로 갈 때 어떻게 하면 싸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지도 다 알고 있어. 나쁜 표국들이 만만한 손님들에게 어떻게 눈탱이를 씌우는지도 잘 알고 있지!”
“오오!”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일이 생기면 꼭 나한테 말해. 내가 알려 줄게.”
조서인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소호는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고는 갈색의 자그마한 목환들로 장식된 주렴(朱簾)을 걷고 표국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대죽(大竹)을 반으로 쪼개서 장식한 벽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숨을 들이쉬자 은은하고 기분 좋은 향이 느껴졌다. 표국 안에는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느긋하지 않고 바빠 보였다.
배가 좀 나오고 값비싼 옷을 입은 사람들이 뭔가를 상담하기도 하고, 누가 봐도 표사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들이 죽간들을 뒤지며 뭔가를 찾고 있기도 했다.
“안녕하십니까, 공자님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가장 먼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 것은 풍운표국의 입구 부근에서 손바닥만 한 동그란 철판들을 정리하고 있던 한 중년의 사내였다.
머리에 서리가 내린 듯 새치가 드문드문 나서 절반 정도는 백발이었다.
중년의 사내는 단정하면서 소박한 갈색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친절하게 웃는 얼굴 위로 차분해 보이는 눈빛이 소호와 조서인의 가치를 평가하는 듯했다.
소호는 그를 보면서 마주 웃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서찰이랑 물건을 하나 보내고 싶어서 왔어요.”
“그러셨군요. 어디로 보내실 생각입니까?”
“삼산현이요.”
소호는 품에서 서찰을 반쯤 꺼내 살짝만 그에게 보여 주었다.
“삼산현이면 그리 멀지 않군요. 하남과 안휘 사이쯤이니 안휘로 가는 표물과 함께 갈 듯합니다. 보자……. 아마 열흘 정도 걸릴 듯하군요. 물건은 어떤 걸 보내십니까?”
중년의 사내는 죽간에 빼곡히 적혀 있는 글자들 사이에서 안휘와 삼산이라 적힌 글자를 찾아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은 손가락만 한 작은 거예요. 근데 열흘이면 너무 오래 걸리네요. 좀 급한 일이거든요.”
“중요한 일이십니까? 따로 표행을 만들어 출발시키면 좀 더 빠르게는 됩니다만 그렇게 되면 저희도 비용이 드는지라…….”
“아! 맞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풍운표국엔 이걸 보여 주면 된다고 하셨었는데…….”
소호는 뭔가가 생각난 듯 품 안에서 샛노란 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서 구름문양이 새겨진 동전을 꺼냈다.
짤랑―.
동전이 탁자에 놓이면서 맑은 소리가 났다.
“……!”
중년인의 숨이 멎었다.
그는 홀린 듯이 멍하니 동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표국 안에서 각자 바쁘게 일하고 있던 직원들이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뜨거운 시선을 쏟아냈다.
“이게 그……! 실물로는 처음 보는군요……!”
중년 사내는 동전을 들어 앞과 뒤를 살펴보더니 조심스럽게 소호에게로 다시 내밀었다.
“잘 확인했습니다. 공자님, 안으로 들어와 주시겠습니까?”
중년 사내는 처음보다 정중해진 태도로 소호와 조서인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다른 직원들의 시선은 바깥과 분리된 방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 따라붙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잘생긴 젊은 청년이 한 명 나와 다과상을 차리고 차를 끓여 주었다.
“공자님, 동전을 주신 분이 어머니라고 하셨습니까?”
소호와 조서인의 반대쪽에 마주 앉은 중년 사내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네. 맞아요.”
“풍운표국은 풍운전(風雲錢)을 지닌 분이 오면 그 어떤 일보다 우선시하여 용무를 해결해 드리는 게 규칙입니다. 원하시는 용무에 대해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중년의 사내는 전심전력을 다해 이야기를 듣겠다는 듯 손을 마주 모은 채 두 눈을 빛냈다.
“어…… 그냥, 서찰이랑 이 물건 하나를 마을에 보내 주시면 돼요. 아! 주머니가 없네. 이거 담을 가죽 주머니를 하나 살 수 있을까요?”
“상자에 넣어 이송할 것이니 여기에 편하게 넣어주시면 됩니다.”
중년 사내가 손짓을 하니, 차를 내왔던 청년이 원목을 깎아서 만든 듯한 나무 상자를 들고 왔다.
손바닥 두 개만 한 나무 상자에는 바닥에 푹신푹신한 비단 천이 깔려서 따로 주머니에 담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소호가 서찰과 함께 화기의 껍데기를 넣으니, 청년은 곧바로 상자의 뚜껑을 덮고 밀랍을 이용해 밀봉했다.
밀랍을 녹여서 붓고, 인장을 찍는 동작이 능숙해서 소호와 조서인은 그로부터 시선을 떼어내기가 힘들었다.
“공자님, 어느 곳에 있는 어느 분께 전달하면 되겠습니까?”
“삼산현 근처에 화전촌이 하나 있어요. 저희끼리는 은자촌이라고 불러요. 거기에 가시면 풍운객잔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전해 주시면 돼요. 받는 분은 광 할아버지인데……. 어, 이름은 말씀드릴 수가 없고, 그냥 풍운객잔과 관련된 사람이면 아무한테나 주셔도 돼요. 서찰을 보면 알 테니까요.”
“……!”
소호는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던 중년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는 모습을 분명히 목격했다.
‘뭔가를 잘못 말했나?’
소호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마치 영혼이 빠져나갔었던 것 같은 중년 사내의 눈에서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풍운표국 낙양 지부장 정운준이라고 합니다.”
정 지부장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소호와 조서인은 당황하며 일어나 마주 포권을 취했다.
“저는 소호라고 해요.”
“조서인입니다.”
소호의 이름을 들었을 때 정 지부장은 눈빛이 번뜩이는 걸 숨기지 못했다.
“역시……! 공자님, 이번 일은 저희 지부의 전력을 다해 처리될 것입니다.”
“아, 네. 감사해요. 얼마나 걸릴까요?”
“급하다고 하셨지요? 나흘…… 아니, 사흘 안에 꼭 답을 받아 오겠습니다!”
“예?”
소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원래 물건을 보내는 데만 열흘이 아니었던가.
빨라야 이레는 걸리겠구나 생각했는데 사흘이라니.
“더 부탁하실 업무가 있으십니까?”
“어어…… 아뇨?”
“그럼 곧바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준(兒埈)!”
정 지부장은 다과를 차리고 상자를 밀봉했던 그 청년을 불렀다.
“강 표두에게 그 물건을 여기 적힌 곳으로 직접 전달하라고 말하게. 한시라도 빨리! 위급으로!”
정 지부장이 직접 손바닥만 한 종이에 세필로 뭔가를 휘갈기더니 청년에게 상자와 함께 건네주었다.
청년은 짧고 간결하게 답한 뒤 밖으로 다급하게 뛰쳐나갔다.
청년에게 지시를 내리는 정 지부장은 위엄이 넘쳤으나, 다시 몸을 돌려 소호를 바라볼 때는 그 위엄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은 그의 눈빛에는 친절함이 가득했다.
“금방 답을 받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공자님들, 지낼 곳은 있으신지요? 특별히 없으시다면 저희가 손님을 모시는 방을 수배해 놓겠습니다.”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게까지는 너무 실례인 것 같아요.”
“실례라뇨. 절대 아닙니다. 공자님. 원래 풍운전을 지닌 분께 거취를 포함한 모든 것을 지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 동전에 그런 약속도 되어 있어요?”
“물론입니다.”
“어…… 그랬구나. 그래도 말씀은 감사하지만 거절할게요.”
소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어머니께서 함부로 남의 신세 지는 건 안 된다고 하셨거든요.”
“남의 신세라뇨. 여기 표국 자체가 공자님의…….”
정 지부장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공자님께서는 모든 자격이 있으십니다. 우선은 답이 올 때까지 쉴 만한 곳을 제공해 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 편히 계시길 부탁드립니다.”
“네?”
“바로 안내해 드리지요.”
어딘가 절박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정 지부장은 소호에게 호의를 밀어붙였다.
뒤따라가는 소호의 옆에서 조서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호야, 너희 어머니…… 대단한 분이셔?”
“어, 음…….”
소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어.”
***
드넓은 침상, 붉은색 천과 황금으로 된 장식품, 그리고 고풍스러운 글씨들로 꾸며진 침실의 분위기는 황실 못지않다고 감히 말해 볼 만했다.
방으로 안내 받았을 때,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조서인은 함부로 걸음도 떼지 못할 지경이었다.
“너무 비싸 보여……. 바닥에 깔린 이 융단 한 뼘이 내 전 재산보다 비싸겠지?”
조서인은 신발도 벗고 조심조심 걸어 다녔다.
마치 융단의 털을 망가뜨리면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 그를 태워 버릴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서인아, 전 재산이 얼만데?”
“……은자 한 개?”
“그럼 더 비쌀 수도 있겠다.”
조서인은 정말로 벼락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호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야. 사실 이런 게 얼만지 나도 잘 몰라. 근데 얼마나 비싸든 사람보다 귀하겠어?”
소호는 푹신한 보료에 등을 대고 누워 헤엄치듯 버둥거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처음엔 조심하던 조서인도 다음 날이 되자 소호와 보료 위에서 엎치락뒤치락 툭탁거리며 놀기까지 했다.
소호가 마을로 보낸 서찰의 답이 온 것은 바로 그 다음 날.
서찰을 보낸 지 정확히 삼 일째 되는 날의 이른 아침이었다.
“우와.”
자신을 강 표두라고 소개한 남자는 소호의 앞에 나무 상자를 내려놓는 그 순간에도 아직 숨을 다 고르지 못해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겉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구름 문양이 소맷자락에 새겨진 회색 장포와 바짓단에 흙먼지가 가득 묻어 있었다.
몰아쉬는 숨결 너머로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온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열기를 뿜어냈다.
“감사합니다.”
소호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강 표두는 퉁방울같이 튀어나온 눈을 잠시 끔뻑이며 당황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그래도 감사하네요. 들어와서 여기 앉으세요. 다과도 드시고요. 서인아, 이분께 차 좀 한 잔 드릴래?”
강 표두는 송구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다탁에 앉았다. 그는 조서인처럼 바닥에 흙이 묻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아……!”
그사이, 소호는 상자를 열어 보고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자 안에는 필요로 했던 서찰 말고도 온갖 물건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