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83화 (312/686)

8권 8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8)

물건만 봐도 누가 넣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물건들이다.

심지어 서찰의 뒤쪽에는 마을 노인들이 안부를 묻는 글자가 얼룩덜룩하게 한 줄씩 쓰여 있었다.

“나 참, 얼마 전에 다녀왔는데 또 이러시네.”

소호는 상자 안의 물건들 중에 눈에 띄는 천 주머니를 열어 보고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분이 좋아서 헛웃음을 흘렸다.

“심태연이잖아? 우와! 운찬 삼촌도 참.”

소호는 조서인과 강 표두가 함께 앉아 있는 다탁에 주머니를 올려 두었다.

“같이 먹어요. 제가 장담컨대 여기 이 심태연보다 맛있는 간식은 지금껏 먹어 본 적이 없어요.”

달콤하면서 아삭한 대추 안에 찹쌀 반죽을 채워서 구운 심태연을 입안에 하나 던져 넣었다.

소호는 빙긋 웃었다.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맛이었다.

기름에 구워진 찹쌀 특유의 고소한 맛 사이로 고급스러운 대추의 단맛이 은은하게 파고들었다.

평범한 심태연과는 다른, 운찬의 비법을 통해서만 만들어지는 특유의 고소함이 계속해서 입맛을 자극했다.

“아……!”

조서인과 강 표두도 심태연을 하나 입에 넣자마자 깜짝 놀라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보였다.

그들은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심태연을 쳐다볼 정도였다.

당연히 그들이 놀랄 줄 알았던 소호만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약관의 나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음식들을 먹어 봤지만, 운찬 삼촌의 음식만큼 맛있는 음식은 없다고 소호는 지금도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럼 제일 중요한 서찰은…….”

소호는 화기 껍데기와 함께 되돌아온 서찰을 펼쳐 한눈에 읽어 내렸다.

“재질은 연단술(練丹術)로 만든 온철(溫鐵)이며, 화기의 형태는 기갑문의 비기……. 자세히 알고 싶다면 낙양 북방의 백단장(伯端莊)을 찾아라. 그곳에 있는 진인이 가르침을 줄 것이다. 예물은 돼지 머리가 좋다. 그리고…….”

서찰에는 광사로 특유의 투박한 말투로 급박하게 휘갈긴 글씨체가 가득했다.

소호는 특히 마지막 말에서 짙은 향수를 느꼈다.

“기옥은 잘 있다.”

소호는 열두 살 어린 시절, 함께 근처 마을에 놀러가기도 했던 기옥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렇구나. 잘 있구나.”

철없이 까불던 꼬맹이가 이제는 소호처럼 다 큰 청년이 되어 광사로의 곁에서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소호는 무산학관을 나오면 일단 마을로 한번 찾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광 할아버지 대단하네. 난 제대로 살펴볼 테니 며칠 말미를 주라든가 그럴 줄 알았는데. 강 표두님, 이 서찰을 써 준 할아버지가 물건을 오랫동안 살펴보시던가요?”

눈을 지그시 감고 심태연의 맛을 음미하며 씹고 있던 강 표두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니오. 그분은 한눈에 일별하자마자 서찰을 써 내려가셨소.”

“역시, 대단하시다니까.”

소호는 감탄하며 웃고는 조서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서인아, 가자. 백단장이라는 곳에 가 봐야 한대.”

“우움?”

조서인은 심태연을 정신없이 씹다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소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지금 가야 하냐고?”

조서인은 급히 씹던 것을 삼키고 대답했다.

“으응. 차 한잔하고 가면 안 될까……?”

조서인은 말로는 차 한잔이라고 하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심태연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 옆의 강 표두도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음식의 힘은 위대하구나.’

소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마을이 어땠는지 알려 주세요, 강 표두님.”

소호의 허락이 내려지자 두 사람은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소호는 은자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간의 여유를 즐겼다.

***

“나는 영웅객잔의 심태연도 되게 맛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먹은 건 전혀 달랐어. 진짜 신세계야. 어떻게 그런 맛이 날 수 있지?”

말을 타고 낙양 북부로 향하는 동안 조서인의 심태연 찬양은 끝나질 않았다.

“운찬…… 강운찬 숙수……! 소호야, 삼촌 성함이 강운찬이라고 했지?”

“그래. 벌써 다섯 번은 말한 것 같아, 서인아.”

“진짜 충격적인 맛이라고! 난 진짜 진심으로, 네가 그런 음식을 먹고 자란 게 부러워.”

소호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음식의 힘은 위대하다.

“운찬 삼촌의 음식은 인정해. 뭐, 지금은 나도 이런 돼지 머리나 들고 있는 신세지만.”

소호는 자신이 품 안에 안고 있는 둥그런 보따리를 들어 올리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운찬 숙수님이 돼지 머리를 요리하면 얼마나 맛있을까……!”

“어? 그건 나도 궁금하긴 하다. 예전에 오리 머리를 튀긴 요리는 먹어 봤었는데.”

“그건 어땠어!”

“그건…….”

소호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조서인의 질문에 답을 해 주려다가, 문득 자신들의 위치를 깨달았다.

“그보다 이제 거의 다 왔어. 하오문에서 그랬잖아. 높은 언덕이 보일 때쯤, 우측에 숲이 있으면 근처에 백단장이 있을 거라고.”

소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주변을 둘러봤다.

나무가 너무 울창해서 약간 어두워 보이는 숲 사이로, 사람이 살지 않아 폐허가 된 듯한 집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네.”

“으음……. 맞아. 좀 섬뜩하다. 그보다 오리 머리가 어땠다고?”

“지금 오리 머리가 중요한 게 아니야. 서인아.”

“그보다 중요한 게 있어?”

“뭐라고? 아니, 진짜 분위기만 그런 게 아니라…….”

말의 속도를 살짝 낮춰서 걷고 있던 소호가 갑자기 고개를 우측으로 홱 돌렸다.

히히힝―.

깜짝 놀란 말이 앞발을 들며 멈춰 섰다.

조서인도 덩달아 놀라 고삐를 잡아당겼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소호야?”

조서인은 음식에 빠져 맹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소호와 함께 무산학관에서 명성을 쌓은 무재(武材)다.

길게 묶은 말총머리를 휘날리며 안장 옆에 묶어 두었던 창을 붙잡는 동작은 한 치의 낭비도 없이 민첩했다.

소호는 숨죽이며 긴 도로의 끝 부근, 가지가 긴 나무들이 얽혀 있는 어두운 공간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들이 지나온 길의 우측 후방이었다.

소호는 길게 숨을 내쉬며 기감을 집중시켰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바람에 섞인 풀 냄새, 햇빛을 반사하는 나무 잎사귀, 찌르르― 우는 벌레 소리까지 온갖 감각들이 신호를 보내 왔다.

소호는 속으로 열을 셀 정도의 시간 동안 어둠 속을 노려보다가 숨을 다시 들이쉬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뭔가 느껴졌었는데.”

“적이야?”

“으음, 모르겠어.”

소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출발시켰다.

“일단은 가자. 얼른 백단장에 가 봐야겠어.”

소호는 말을 달리는 내내 허리에 찬 박도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도로 양옆의 숲이 점점 울창해진다 싶을 때쯤 주변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도로 양옆에 놓인 커다란 바위 두 개를 경계로 공기부터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소호와 조서인은 서로를 힐끔 바라본 뒤 서서히 말의 속도를 줄였다.

정면에 허름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이 한 채 서 있었다.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돌담에는 담쟁이가 잔뜩 붙어 있었고, 말 두 마리가 나란히 들어가도 될 법한 커다란 대문은 당장 무너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낡은 통나무 두 개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폐가 같다기보다는, 어딘가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현판에 백단장(伯端莊)이라는 글자 세 개에서 묘한 기백이 느껴졌다.

“들어가 보자.”

소호는 왠지 목소리를 낮춰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속삭여 말하고는 말에서 내려 조서인과 함께 대문을 통과했다.

휘이잉―.

“……!”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먼지가 섞인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서 소호는 재빨리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뭐지?”

소호는 바람이 그치자마자 실눈을 다시 떠보았다.

그런데 풍경이 이상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햇볕이 너무 화창해서 더울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같았다.

주변도 어두웠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황량해 보이는 마당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서인아. 왜 이렇게 어둡…… 서인아? 조서인?”

소호는 그 순간 자신의 등 뒤에서 조서인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동공이 흔들렸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조서인이 없었다.

조서인뿐만이 아니다.

방금 문턱을 지났던 대문은 물론이고 담쟁이로 가득하던 돌담도 사라졌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황량한 평야였다.

지평선 끝까지 소호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끼워 맞추기 위해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사투를 벌였다.

그때, 나지막하면서 천둥처럼 커다란 목소리가 소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하늘이 내린 천강(天罡)의 별인가, 대륙을 질타할 지괴(地魁)의 대살성인가. 또 하나 혼란스러운 자가 찾아왔구나.”

소호는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이 떨렸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백발, 백염의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소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홍안 위로 현기가 가득한 눈빛이 별빛처럼 소호에게로 쏟아졌다.

“아이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위대한 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천하 만민을 위해 살 것이냐?”

소호는 노인의 눈빛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승려처럼 단출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도관을 쓴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행색은 깨끗했으나 어깨도 구부정하고 무공의 힘도 느껴지지 않는데, 그런데도 감히 반항할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소호는 곰곰이 노인의 질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 저기…….”

소호는 손에 들고 있던 둥그런 보자기를 내밀었다.

“혹시 돼지 머리 좋아하세요?”

소호는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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