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9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9)
항상 사람들의 경계심을 무장 해제시키는 햇살처럼 환한 미소였는데, 노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노인은 웃거나 화내지 않고 뚫어져라 소호를 응시하기만 했다.
“이걸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가져왔는데…….”
대답이 들리지 않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 돼지가 아닌가?”
소호의 목소리에서 급격히 자신감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서찰에서는 그냥 돼지 머리라고만 했지 어떤 돼지의 머리인지는 말해 준 적이 없지 않던가. 머릿속에서 흑돼지와 멧돼지가 우쭐대며 지나가는 듯했다.
보따리를 앞으로 내민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소호의 동공이 흔들렸다.
“신기하군.”
노인은 별빛처럼 쏟아지는 눈빛을 거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설픈 수작이면 일갈해 주려 했으나 너를 지켜보니 진심인 것을 알겠다. 아이야, 너는 어째서 나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더냐?”
“네?”
소호는 드디어 나온 대답에 안도하였지만 질문이 이상하다 생각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먼 곳에 손님으로 가면서 선물을 들고 가는 건 당연하다 배웠어요.”
“그런가.”
“혹시 돼지 머리 싫어하세요?”
“싫어하지 않는다.”
소호는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양손으로 보따리를 내밀었다.
“얼마 전에 음식의 위대한 힘에 대해 알게 되었거든요.”
조서인을 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의 행복함은 전쟁도 멈출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소호였다.
“음식의 위대함이라. 식(食)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자 근원이며 부족함을 채우는 태극만상의 진리이니 틀린 말은 아닐 터.”
노인은 소호가 건네는 보따리를 양손으로 받은 뒤, 자연스럽게 옆으로 내밀었다.
“……!”
보따리는 마치 누군가가 건네받은 것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보통 사람이 봤다면 귀신인가 싶어 놀라 넘어질 만한 광경일 텐데 소호는 본인도 신기하게 느껴질 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왠지 잘 어울리네.’
눈을 가늘게 뜨고 기감을 예민하게 해 보니 그곳에 뭔가가 일렁거리면서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갑작스레 변해 버린 주변의 광경, 사라져 버린 조서인. 그 뒤에 나타나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승복을 입고 도관을 쓴 백발, 백염의 신비인이다.
이곳 백단장에는 눈앞의 노인이 만약에 신선처럼 허공으로 붕 날아간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특유의 신비한 분위기가 있었다.
“잿밥을 공양하는 것은 예로부터 신성한 행위였다. 광사로로부터의 선물은 여기 백단장의 호광이 잘 받았다고 전해 주거라.”
소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광 할아버지의 소개로 온 줄 어떻게 아셨죠?”
“너에게서 동방의 연으로 맺어진 금기(金氣)가 느껴진다. 그만한 금기는 흔치 않지. 지금 시대에는 동방의 광사로와 서방의 목라를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주술적인 거네요!”
“비슷하다. 그리 놀랄 일은 없을 텐데. 네가 지닌 그것이야말로 속세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주술의 집대성(集大成)이 아닌가?”
호광 진인의 별처럼 빛나는 시선이 소호가 허리에 차고 있는 철 요대를 지나 백색 비단 장포로 잘 가려 둔 가슴팍으로 향했다.
“그 물건으로도 나머지 아홉 개를 서로 찾을 수 있지 않은가?”
“네? 이걸로요?”
“그래.”
“아홉 개…… 아홉 개나 되나?”
소호는 호광 진인이 지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는 씁쓸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일도 할 수 있구나. 사실 저는 잘 몰라요. 고향 마을의 할아버지들 중에 도(道) 쪽으로 잘 아는 분도 계셨었는데, 특별히 배우지는 않았거든요. 그분이 저한테 그랬어요. 저는 주술 쪽으로는 타고난 게 없대요. 오히려 파사(破邪)에 가깝다고 하더라고요.”
“정확하다. 파사와 파마. 천강성과 지괴성의 축복이자 저주이지.”
“어어……. 잘 모르겠어요. 이 물건에 대해서는…… 사실 아직 결정을 못했어요.”
“지닌 지 오 년이 넘었음에도 결정을 못하다니, 그저 솔직하지 못한 것일 뿐 아닌가?”
“우와! 맞아요. 육 년 넘게 갖고는 있었어요. 그런데도 결정 못했어요. 이걸 쓸지 말지.”
어느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복심(腹心)까지 꺼내 놓고 있었다.
소호는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을 호광 진인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호광 진인의 분위기도 조금 전에 비해 어딘가 달라 보였다.
친할아버지 같은.
마치 은자촌에 돌아가 십로 중의 한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호광 진인이 소호를 보는 눈에서 은자촌의 십로와 같은 자애로움이 느껴졌다.
어째서 처음 만난 노인을 그렇게까지 친근하게 느끼는가?
모른다.
하지만 소호는 그래야 함을 느꼈고,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이걸 허용하는 순간 뭔가가 크게 달라질 것 같더라고요.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느꼈어요. 그래서 망설이게 되네요.”
“그런가.”
“네. 저는 함부로 결정하지 않을 거예요. 언젠가는 답이 나오겠죠? 그래서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어머니가 그랬어요. 기다리지 말고 쟁취해라. 하지만 성급히 행동하는지 늘 세 번씩 스스로에게 되물어라.”
소호는 얼굴 앞에서 주먹을 움켜쥐면서 씩 웃었다.
“참고로 올해 세 번째로 되묻고 있어요.”
“너는…….”
노인은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외롭지 않은가?”
“아…….”
침묵이 흘렀다.
평온하게 가라앉은 심상에 물이 한 방울 톡 떨어진 듯했다.
잔잔하게 퍼져 나온 파문이 소호의 마음속 수면을 흔들었다.
자신은 외로운가?
소호는 그 순간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
마을의 노인들.
무산학관에서 함께한 동료들.
“아뇨, 외롭지 않아요.”
소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보다 더 대단한 가족과 친구들이 있거든요. 다들 저를 좋아해 줘서 매일이 즐거워요.”
“그러한가.”
노인.
호광 진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지그시 소호를 바라봤다.
“그게 너의 대답인가.”
“네?”
화아악―.
은은하게 퍼져 나온 파동이 호광 진인의 주변에 물결 같은 흐름을 만들어 냈다.
“패도(覇道)의 핏줄을 타고났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순전한 협(俠)인가. 허나 협기를 가진 이는 역사에서 영웅이 되기도 했고, 천하에 둘도 없을 흉신악살이 되기도 했다. 네가 어느 쪽 길을 갈지는 너의 마음에 달려 있을 터. 처음엔 네가 지닌 신기(神器) 때문에 망설였으나 만나 보길 잘했구나.”
호광 진인은 어디선가 꺼내 든 지팡이로 땅을 쿵, 소리가 나게 짚었다.
우웅―.
어느새 코앞에 호광진인이 서있었다.
그가 지팡이를 좌우로 흔들자 소호는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엔 저항했다.
역근경 진기가 퍼지며 소호의 눈앞을 맑게 만들어 주었다.
“저항하지 말라. 너에게 보여 주고 싶을 뿐이다.”
호광 진인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소호에게 속삭였다.
소호가 몸에서 힘을 빼자 현기증이 느껴지면서 눈앞이 핑― 돌더니 눈앞에 암막이 드리운 것처럼 캄캄해졌다.
까아악―.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호는 마치 새가 된 듯 하늘 위에서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전장이었다.
철과 철이 부딪치고 피와 비명이 튀어 오르는 전투가 불꽃처럼 주변의 생명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시야가 닿는 지평선 끝부터 끝까지 모든 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새카만 철갑을 입은 기마병대는 누가 봐도 강력한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병사들을 물리치고, 쐐기 대형으로 돌격해 황금 갑옷을 입은 근위병들마저 부수고 박살 냈다. 돌격대의 대장은 투구를 내려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돌격의 대가는 황권인 듯했다.
그는 분명 황제로 보이는 누군가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황제는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들에게 강제로 용포가 벗겨지는 내내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들리지는 않았으나 처절한 무언가를 외쳤다. 악의, 살의, 절망. 모든 어두운 감정을 모두 합쳐 놓은 듯한 절규를 들으며 돌격대의 대장은 투구를 천천히 위로 올렸다.
황제의 절규가 멈췄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투구 안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우웅―.
다시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소호의 정신이 먼 곳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평화로운 산간 마을이었다.
울창한 수풀과 단출하면서도 어딘가 신성한 산세(山勢)가 마을 주변을 보호하듯 견고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은자촌이 떠오르는 장소지만 어딘가 다르다.
통나무와 대죽을 잘라 만든 건물이 마을의 입구 부근에 객잔으로 세워져 있다.
객잔 앞에 있는 한 사람.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소탈한 백창의를 입은 중년 사내가 입을 다물고 묵묵히 비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이 멀게 보였다.
익숙한 뒤태.
오랫동안 보아 온 듯 친숙한 얼굴은 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버지?’
아버지. 장기린.
소호가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부르는 순간, 그의 정신이 다시 아찔한 감각과 함께 어딘가로 끌려 나갔다.
구름과 하늘, 낮과 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쿵―.
소호는 넘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휘이잉―.
처음 백단장에 들어올 때 느꼈던 것 같은 먼지가 섞인 바람이 소호의 얼굴로 불어왔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놀랍게도 처음에 발을 들였던 그 정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뒤를 돌아보았다.
멍하니 서서 눈을 끔뻑거리는 조서인이 보였다.
“어어……?”
소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대체 자신이 방금 경험한 것들이 뭔지 혼란스러워했다.
“잘 보았느냐?”
“아버지가 보였어요. 이게…… 뭐죠?”
“영웅이 될 것인가, 패도를 따를 것인가. 한순간의 선택에 갈라지는 인생의 차이를 보았겠지?”
소호는 갑옷을 입고 황제의 목에 칼을 들이대던 사내, 그리고 객잔 앞에서 묵묵히 비질을 하던 사내를 비교해서 떠올렸다.
“아아…….”
소호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버지의 미래였을까?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른, 달라지는 미래인 것일까?
고민해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호광 진인을 보니 그는 더 이상 소호를 응시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짚으며 몸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점술사 흉내를 냈다. 이만하면 예물에 대한 사례는 충분히 했겠지.”
탁, 탁.
호광 진인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용무가 하나 더 있다고 들었다. 들어오라. 나머지는 안쪽에서 하도록 하지.”
소호는 호광 진인이 더 이상 멀어지기 전에 조서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으으…….”
조서인은 멍하니 소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돼지 머리는?”
“……하핫!”
소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