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11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11)
소호는 날카롭게 날아오는 검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허리의 박도를 뽑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푸확―.
상대방의 복면을 포함해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던 검은 천이 반으로 쩍 갈라지며 맨살이 드러났다.
콧등과 입술, 상체의 가슴 정중앙에 실낱 같은 생채기가 나면서 피부가 발갛게 부풀어 올랐다.
칼에 맞아 난 상처보다 더 큰 것은 칼끝에서 터져 나간 무형의 기파다.
태극혜검의 묘리를 실어 공간을 격하고 내부의 기혈에 타격을 주는 수법은 이미 완숙의 경지에 오른 노고수라고 해도 믿을 만큼 능숙했다.
깜짝 놀란 복면인이 눈을 부릅뜨는 모습이 보였다. 턱 하니 막힌 숨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할 듯 보였다.
소호는 몸을 낮춰 바닥을 휩쓰는 듯한 수면 차기로 다리를 걸고, 곧바로 박도의 손잡이 부분으로 복면인의 턱을 후려쳤다.
뻑― 소리와 함께 복면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소호는 쓰러지는 복면인의 뒷덜미를 잡아 앞으로 쑥 내밀었다.
“흡!”
옆에서 빈틈을 노려 달려들던 또 다른 복면인이 움찔 놀라면서 검 끝을 황급히 옆으로 돌렸다.
소호는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리는 보법으로 앞으로 휙 튀어나갔다.
들고 있던 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도집 안으로 납도했다.
매화검을 사용하는 복면인의 손목을 왼손으로 붙잡고, 오른손을 상대방의 무릎 뒤에 가져갔다.
파라락―.
“큿!”
자세를 낮추면서 역근경 진기를 운용하니, 태극권의 팔자진결이 올올이 풀려나며 상대방의 몸을 허공에 붕 띄워 놓았다.
“……!”
태극의 묘리는 시작은 수수해 보일지언정, 한 번 시작되면 늪에 빠진 것처럼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
복면인은 마지막 반항을 하듯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소호의 소맷자락을 붙잡으려 했으나, 소호는 그 힘마저도 역이용해 태극권의 진결로 힘의 방향을 바꾸었다.
모든 힘은 아래로.
복면인이 숨을 쉬는 복강의 움직임조차 소호의 손에 닿으니 모조리 아래쪽으로 힘이 쏠렸다.
꽈앙―.
“끄으으…….”
마치 사 층 전각 위에서 떨어진 듯한 강대한 충격이 복면인을 덮쳤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을 들고 있던 복면인의 오른팔이 꺾여선 안 될 방향으로 꺾여 버렸다.
그는 뒷다리가 뜯긴 메뚜기처럼 바닥에서 허우적대며 고통스러워했다. 어느새 무릎 쪽의 근골도 상했는지 다리를 절며 일어서질 못했다.
소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손바닥의 장저로 턱을 후려쳐서 그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파라락―.
장저로 후려친 뒤의 반탄력을 이용해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양손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다시 본래의 자세로 돌아오자 소맷자락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스윽―.
한 발을 뒤로 쭉 빼면서, 상체는 움직이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흙바닥에 남은 소호의 족적은 마치 자를 대고 그린 것처럼 결점 없이 매끈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깊게 들이마신 숨이 소호의 몸에 활력을 주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맥동하는 진기가 전신에 고루 퍼져 단 한 곳도 소홀한 곳이 없으니,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소호는 왼손으로 도집을 붙잡고, 도를 뽑아내는 것과 동시에 수평으로 반월(半月)을 그려내듯 크게 휘둘렀다.
사악―.
종이가 베이는 듯한 섬뜩한 소리와 함께, 합격술(合擊術)을 사용해 동시에 달려들던 두 명의 복면인이 움직임을 덜컥 멈춰 세웠다.
두 사람의 가슴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깊이의 생채기가 남았다.
입고 있던 검은색 무복이 찢어지며 위아래로 벌어졌다. 박도 끝에서 뿜어진 태극혜검의 무형기가 두 사람의 기혈을 강타했다.
그들이 동시에 찌른 검 끝은 소호의 목 앞에서 세 치 앞에 멈춰있었다.
복면인들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검을 뻗으면 죽일 수 있다는 아쉬움이 눈빛에 가득 담겨 있었다.
소호는 빙긋 웃었다.
손에 들고 있던 박도를 잠시 놓았다가 다시 잡으니 길이가 이전보다 길어졌다.
손잡이를 최대한 길게 잡은 것이다.
쒜에엑―.
그대로 박도를 앞으로 뻗어 두 복면인의 머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내찔렀다.
뻑!
그대로 좌우로 휘두르자, 마치 따귀를 때리듯 박도의 넓적한 부분이 좌우 두 복면인의 턱을 후려쳤다.
두 번을 후려쳤음에도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소리는 한 번처럼 들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두 복면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소호는 옆을 힐끔 쳐다봤다.
채채챙―.
말에서 내린 조서인이 폭풍 같은 창술로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소호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복원시킨 조가 창술과 보법은 이미 조화를 이뤄 흠잡을 곳이 없다.
나아가고 물러섬에 있어 창법의 기본인 육합(六合)과 팔모(八母)를 정확히 따르고 있으며, 가끔 나오는 횡소천군(橫掃千軍) 일격은 덤벼오는 복면인들을 두세 명씩 단박에 튕겨내고 쓰러뜨렸다.
무산학관에서 태양조차 떨어뜨릴 것 같다고 하여 생긴 별호가 낙일창(落日槍) 아니던가.
무산학관에서의 육 년의 세월은 꼬마 조서인을 허리에 찬 철 요대에 부끄럽지 않은 사나이로 바꾸어 주었다.
‘슬슬 때가 됐는데?’
소호는 아니나 다를까 그를 향해 달려오는 복면인들의 대장을 보며 박도를 강하게 거머쥐었다.
복면에 흰색 안료로 검 문양을 새겨놓은 사나이.
그가 움직이는 모습은 다른 보통의 복면인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구궁의 묘리가 담긴 신법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발을 한 번 내딛을 때마다 그의 주변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벌 떼처럼 일어났다.
복면 위로 소호를 노려보는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다리가 긴 학처럼 발을 쭉 뻗는 보법은 금안공(金雁功), 오른손 다섯 손가락 각각에 맺힌 강렬한 오행기(五行氣)는 소호를 공격하는 순간 뇌기(雷氣)처럼 불꽃이 타올랐다.
후우웅―.
맹수처럼 손가락을 웅크린 장타(掌打)가 훅― 하고 가까워지면서 순간적으로 손바닥이 커진 것처럼 보였다.
소호는 피해를 입지 않을 만큼만 옆으로 고개를 젖혀 피했으나, 흩날린 머리카락이 장타에 휩쓸렸다.
파직!
“우왓!”
소호는 부드러운 몸동작으로 뒤로 물러나 타 버린 것처럼 툭툭 끊어진 머리끝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빠르네요. 주해에게 한 소리 듣겠……네!”
후웅―.
말을 하는 동안에도 연이어 날아오는 장타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소호를 몰아쳤다.
소호는 허리를 옆으로 젖혔다가, 굽혔다가 옆으로 한 발 물러나면서 자연스럽게 몰아치는 공격들을 모조리 피해 냈다.
툭―.
그러다가 한순간.
소호는 박도를 앞으로 쑥 내밀어 복면인의 어깨에 칼날을 내려놓았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유의 박자가 있다.
숨을 쉬고, 심장이 박동하는 특유의 박자를 말함이다.
무박자.
소호는 상대 복면인의 박자와 박자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파고들었다.
“……!”
복면인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다가오는 칼날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뜬 눈만이 그가 자신의 의지로 멈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해 주었다.
으득―.
복면인의 어깨와 앙다문 입에서 뼈가 어긋나는 듯한 위험한 소리가 들려왔다.
핏발 선 눈 옆으로는 혈관과 힘줄이 피부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툭툭 돌출되어 있었다.
키이잉―.
소호는 역근경의 진기를 좀 더 끌어 올려 강한 힘으로 복면인을 짓눌렀다.
“아저씨가 대장이죠?”
“…….”
“천근갑의 묘리로 견정혈을 누르고 있어요.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근육이 뒤틀려요.”
소호는 빙긋 웃었고, 어깨의 혈도를 제압당한 복면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까 아저씨가 사용한 무공은 금안공이랑 오뢰인이었죠? 종남파랑 무슨 관계세요?”
복면인은 대답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소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고개만 끄덕여 주셔도 좋아요.”
“…….”
“싫어요?”
소호가 칼에 내공을 더하자, 복면인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났다.
“옆을 포위한 분들도 물러나라고 해 주세요. 안 그러면 크게 다칠지도 몰라요? 제발 좀 도와줘요. 저는 피를 보긴 싫거든요?”
소호는 허리에 차고 있는 철 요대를 왼손으로 붙잡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어느새 주변을 둘러싼 복면인들을 쭉 둘러보았다. 아직 스무 명이나 남은 그들은 제각각 검을 들고 있었지만 일정 거리 안으로는 들어오질 않았다. 대장이 붙잡혀 있는 탓이다.
복면인들은 소호와 눈이 마주치니 질린 듯한 얼굴을 했다.
“원한이 뭔지도 모르는 애송이가……!”
복면인의 대장은 씹어뱉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종남의 일대 제자였던 권우량이다. 네놈들은 우리 백검의 천벌을…… 피할 수 없다!”
권우량의 목소리에는 피를 토하는 듯한 처절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백검이랑 천벌……. 그거 지난번에도 들었었어요. 그때는 화산의 이대 제자 자홍이라고 했었는데요.”
“멋진 동지였지. 그의 훌륭한 뜻은 우리가 마저 이뤄 낼 것이다!”
“전혀 멋지지 않아요. 백린에 온몸이 불타면서 웃는 모습은 꿈에 나올까 무서울 만큼 섬뜩했다구요.”
“적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서 한 일이다. 네가 그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그는 성공했군.”
복면인들의 대장, 종남의 일대 제자였던 권우량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감탄할 뿐이다.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니 대화가 성립할 리가 없다.
소호는 주제를 바꿔야 함을 느꼈다.
“그럼 두 번째 질문, 그 천벌이라는 거. 왕진 태감을 노리는 것 아니었어요? 왜 갑자기 우릴 노리는 거예요?”
“우리의 뜻을 방해하는 자. 죽어야 마땅하다.”
“뭐예요, 그게.”
“화산과 종남뿐이라 생각하지 마라. 과거의 거대했던 문파들은 모두 우리와 뜻을 함께한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며, 천하 만민의 뜻이다. 왕진은 천벌을 받을 것이다.”
권우량이라는 자는 자홍과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광기 어린 충성심.
자신은 천하 만민과 특별한 신념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듯한 과도한 자부심이 똑같이 그에게서도 느껴졌다.
“그리고, 너는 우리의 계획에 방해가 된다.”
“예?”
“너무 많은 말을 했군.”
권우량은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소호의 칼날을 붙잡았다.
“어어?”
이미 소호의 박도에는 강한 검기가 흐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권우량의 맨손 따위는 칼에 닿자마자 베였다.
살가죽이 갈라지고 근육이 찢어지면서 핏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권우량은 웃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왼손으로 자신의 왼 볼을 퍽― 하고 후려쳤다.
“……!”
소호를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자해를 하는 것이니 어찌할 수가 없다?
아니다.
소호는 재빨리 칼을 거두고 뛰쳐나갔다.
태극권의 묘리를 살려 권우량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퉤― 하고 내뱉으려던 무언가를 소호가 틀어막고, 반항하듯 날아오는 오뢰인의 장타를 발로 손목을 걷어차서 막아 냈다.
소호는 권우량의 목줄을 틀어쥔 자세 그대로 왼손을 그의 입에 집어넣어 동그란 원통형의 도기를 꺼냈다.
손가락 중지만 한 물건 밑으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크크륵.”
권우량은 웃었다.
어찌하여 웃는가?
소호의 눈에 의문이 떠오를 때쯤, 권우량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이십여 명의 복면인들이 일제히 주먹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후려쳤다.
퍽!
절도 있게 들려오는 격타음이 이렇게나 소름끼칠 수가 없다.
그들이 모두 복면 아래로 무언가를 뱉어 냈다.
소호는 어이가 없어져서 허탈하게 물었다.
“다들 미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