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13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13)
순하디순한 강아지도 자신의 집 마당에 침입한 들개에게는 맹수처럼 사나운 법이다.
그 들개가 심지어 평소에도 사사건건 싸우던 앙숙이라면 더는 말할 것도 없다.
조서인은 화를 참지 못하고 목에 핏줄을 세웠다.
“잘난 척은 여전하구나? 은위군.”
“원래 부족한 자들은 뛰어난 자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잘난 척이라 매도하지.”
은위군이 코웃음 치는 모습은 조서인의 화를 더 돋웠다.
“군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했어.”
“그건 괜히 앞에 나서다가 목이 날아가지 않게 시류를 잘 타라는 뜻이다. 멍청하긴.”
조서인이 이놈에게 어떻게 하면 한 방 먹일 수 있을까 고민하려던 찰나였다.
은위군과 함께 온 여인이 빙긋 웃으며 그들을 향해 반갑게 손을 휘둘렀다.
“얘들아! 임무는 잘 해결했어?”
귀밑까지만 오는 짧은 단발머리에 늘씬한 체구가 눈에 띄는 여인이었다.
그리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피부가 깨끗하고 두 눈이 영리하게 빛나서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은위군 때문에 잔뜩 골이 났던 조서인의 인상이 풀렸다.
그녀를 향해 쑥스럽게 웃는 조서인은 제 나이 또래 청년 특유의 풋풋함이 묻어났다.
“주희도 왔…….”
“임무를 잘 처리했다면 우리에게 지원을 나가라고 하지 않았겠지. 하오문에서 그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은위군은 조서인이 뒤에서 분노의 눈빛을 보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소호만을 응시했다.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소호에게 지금 이 사태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으음, 궁금하긴 하겠다.’
소호는 바닥에 쌓여 있는 화기들을 보면서 은위군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하오문에서 지원을 보내 준 거였구나. 어쩐지. 너희가 왜 왔나 했어.”
소호는 빙긋 웃으며 은위군에게 포권을 취했다.
“고마워. 덕분에 일이 손쉽게 처리되었어.”
“……우리가 없었어도 해결했을 것 같긴 하다만.”
“아냐, 기습해 준 덕분에 쉽게 끝났어. 이 사람들, 집념이 엄청나.”
소호는 사방에 널브러져서 신음하는 복면인들을 보며 살짝 질린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은위군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소호를 바라봤다.
“집념이 엄청나다고?”
“본인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우릴 제거하려 하더라고.”
“살수인가?”
“살수는 아니야. 그래도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더라. 이것도 봐봐. 이 암기들이 다 산공독이야. 입안에 숨기고 있었어.”
소호가 바닥을 가리키자 은위군의 시선이 바닥에 한데 모여 있는 열여덟 개의 암기로 향했다.
문주희와 조서인도 똑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소호는 바로 그 순간, 은위군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손에 들고 있던 화기 하나를 소맷자락에 숨겼다.
복면인들의 대장인 권우량이 입 속에 숨기고 있던 화기였다.
“우리 임무는 끝나 가.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 다 같이 덤벼 왔어. 살수들이라기보다는 무인들이야.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임무와 관계있는 자들인가?”
“그런 것 같아. 백검회라고 하던데?”
“……백검?”
“응. 들어 본 적 있어?”
소호는 은위군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냉랭한 얼굴에 차가운 눈빛을 유지하고 있어 속을 알기 힘들었다.
“처음 듣는데.”
“그래?”
소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몸이 찌뿌둥하다는 듯 기지개를 폈다.
“피곤하다. 빨리 돌아가서 보고하고 쉬고 싶어.”
“이 일은 우리가 지원했으니 우리의 성과로 하겠다. 상관없겠지?”
은위군은 자연스럽게 툭 던지듯이 말했으나, 그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성과를 반으로 나누자는 것도 아니고, 성과를 가져가겠다?
졸업 관문 중 하나인 습림관은 굳이 점수를 따지기보다는 통과했냐에 중점을 두는 관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점수를 매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석 교관인 철표를 필두로 하여 무산학관의 시작부터 함께한 고참 교관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습림관에서 관도들의 행동과 결과를 바탕으로 점수를 매기고, 그걸 토대로 졸업 때의 포상을 정한다.
즉, 학관 생활 마지막의 명예와 영광이 걸려 있는 것이다.
“은위군, 우리가 얼마나 목숨 걸고 싸웠는데. 마지막에 와서 단검 몇 개 던져 놓고 성과를 다 달라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소호는 흥분한 조서인을 황급히 말렸다.
“잠깐만 서인아.”
“소호야, 이건 그냥 두고 보면 안 돼.”
“아냐,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지. 괜찮아.”
소호는 조서인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조서인은 다행히 이해해 주었다.
그는 성정이 순할 뿐이지 눈치가 없다거나 머리가 나쁜 게 아니었다.
“진짜 괜찮겠어?”
“어, 괜찮아. 그리고 좀 쉬자. 우리 요즘 너무 바쁘게 달려왔네.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푹신한 침상에서 뒹굴뒹굴 쉬고 싶어.”
소호는 마치 철부지 부잣집 아들처럼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위군,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우리는 빨리 임무 마무리나 해야겠다.”
“너희는 임무가 뭐였지?”
“호위였어. 서씨세가의 외동딸을 호위하는 거였거든.”
“호위?”
은위군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서씨세가라면 철광으로 유명한 그 서가장?”
“맞아.”
“거긴 여기와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데?”
“본가에는 데려다줬지. 지금 여기 온 건 그 뒤처리 때문이었어. 그런데 습격당해서 일이 복잡해졌네.”
“……그런가.”
“너희는? 어떤 임무였어?”
“우리는…….”
은위군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쓰러져 있는 복면인들의 상세를 살펴보던 문주희가 먼저 대답해 주었다.
“우린 물품 배달이었어! 무산제전 때 쓸 철기랑 중요한 물건 몇 개를 학관에 배달하는 일이었어.”
“문주희!”
“왜? 기밀도 아니고, 넌 너무 진지한 게 탈이야. 아무리 우리가 잘난 척해 봤자 밖에서 보기엔 아직 어린애들이야. 우리한테 맡기는 임무가 그렇게 심각할 것 같아? 원래대로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대규모 습격이 일어날 법한 일은 우리한테 안 맡길걸?”
“으음…….”
“정작 이렇게 위험한 임무를 처리한 서인이랑 소호는 다 말해 줬는데, 기껏 물건 몇 개 배달한 거 하나 못 말해 줘?”
문주희는 발랄해 보이지만 주작방에서 감히 상대할 자가 없을 정도의 일대여걸이었다.
금귀(金鬼)라고까지 불리던 곽도엽이 졸업한 후 주작방은 문주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관도들이 괜히 측천무후를 빗대어 애칭 삼아 ‘문 무후(汶 武后)’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냉랭하고 독설을 즐겨하는 은위군조차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하핫, 고마워. 그래도 일찍 끝났다니 다행이다. 우리는 이게 웬 고생인지 모르겠어.”
소호는 하품을 했다. 어깨는 축 쳐졌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성과를 가지겠다면 이곳의 뒤처리도 네가 하겠다는 거지?”
“……그렇게 하지.”
“주희도 괜찮은 거야?”
문주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복면인들과 바닥에 쌓인 암기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의 이 상황을 매우 흥미로워하는 듯 보였다.
“나는 사실 점수에는 관심이 없어. 그것 때문에 졸업 못하는 것도 아니고. 옆에 계신 ‘어떤 분’께는 중요한 것 같긴 하지만……. 뭐, 그래 봤자 무룡전 사연패에 빛나는 천무공자님을 이길 수 있으려나 싶긴 한데.”
문주희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은위군이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그 정도로 겁을 먹을 인물이 아니었다.
“너희만 괜찮으면 이번 일을 고맙게 받을게. 사실 물품 몇 상자 옮긴 걸로 습림관을 통과한 게 좀 민망했거든. 그런 것도 다 운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나중에 뭐로 통과했는지 말할 때 좀 민망하잖아.”
“그랬구나.”
“우리가 도와서 ‘함께’ 피해 없이 상황을 정리한 것으로 할게. 어차피 뒤처리도 하오문 사람들이 곧 올 거야. 아까 우리가 출발할 때 다들 오고 있었어. 그 사람들 도움 받아서 학관에 넘기고 보고까지 마무리하면 우리도 이 일을 했다고 말할 만하겠지?”
“알겠어. 역시 주작방이네. 이해 계산이 빨라.”
문주희는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하게 웃었다.
“그거 칭찬이지?”
“물론이야. 어때, 서인아? 주희 대단하지?”
“어? 어어, 맞아. 그렇네.”
소호는 당황하면서 답하는 조서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두 사람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럼 우린 학관으로 먼저 돌아갈게.”
소호는 그렇게 은위군과 문주희 두 사람에게 공과 뒤처리를 모두 넘긴 뒤 낙양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나란히 걷는 내내 조서인은 문주희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를 힐끔거렸다.
“아까는 왜 그런 거야, 소호야?”
“아까?”
소호는 피곤해 보이던 안색을 지우고 다시 평소처럼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조금 이상하더라고.”
“왜?”
“은위군이 백검에 대해 알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
조서인은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진짜로?”
“진짜로.”
“대체 왜?”
“글쎄다. 그건 모르겠네. 그런데 백검에 대해 물었을 때 반응이 너무 태연했어. 조금 더 놀라도 됐을 텐데 말이야. 내 착각인 걸까?”
소호는 자신의 예감이 별로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서인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혼란스러워하니 심란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말로는 은위군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어도, 속으로는 아닐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은위군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
모르는 일이다.
호광 진인의 말로는 그를 찾아왔던 사람이 철 요대를 하고 있는 소호 또래의 청년이라는 것만 알려 주었으니.
‘그러고 보니 은위군이 오늘은 검은색 수투를 끼고 있었지.’
호광 진인은 그 청년이 철 요대에 흰색 수투를 끼고 있었다고 했다.
그나마 색깔이 다르니 희망적인 소식인 셈이다.
“임무 때문에 알게 된 거면 좋겠는데…….”
소호는 심란한 심정을 담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조서인은 낙양의 하오문 지부인 낙성다루에 도착할 때까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
“이게 그 암기인가!”
하오문의 하남 지부장 공진표는 지난번처럼 모든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창문까지 모두 꼼꼼히 폐쇄한 뒤에 소호의 보고를 들었다.
그는 권우량이라는 이름에 반응을 보였다.
예전에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라고 했다.
“종남의 벽력검이 제대로 키워 보려 했던 일대 제자의 이름이다. 젊은 나이에 오뢰인을 익혀서 소문이 좀 돌았었지. 물론 ‘그 사건’이 터지면서 종남의 세력이 확 줄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지만.”
공진표는 그래도 그런 백검회 같은 무리에 합류해서 나쁜 짓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며 안타까워했다.
“영웅의 몰락은 언제나 안타깝다. 구파일방이 멀쩡했다면 그도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테지.”
공진표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재질에 대한 단서를 찾아온 건가?”
“네. 제가 고향의 ‘어떤 분’께 여쭤봤었거든요. 이쪽으로 잘 아는 분이셔서. 그랬더니 낙양의 호광 진인을 찾아가 보라고 하셨어요.”
“호광 진인!”
공진표에게 그 이름은 놀라운 소식인 듯 보였다.
“그 이름이 내가 아는 그가 맞다면, 그는 술사들이 최고로 꼽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강호 무림으로 따지면 무림오존 정도의 위치를 지녔다고 하더군.”
“그래요? 대단한 분이셨구나.”
소호는 자신이 경험했던 신비로운 술법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범상치 않기는 했었다.
“연단술과 선술이 선인의 경지에 오른 분이라고 들었다. 그런 기인은 만나고자 한다고 만날 수 없는 법이라지만……. 그런 분이 낙양에 있었는데 몰랐다니. 하오문으로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
공진표는 당장이라도 그가 있던 곳으로 직접 가 보고 싶은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분이 뭐라고 하던가?”
“이 화기의 재질은 온철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온철을 다룰 수 있고, 또한 이렇게 화기로 만들 수 있는 건 본인이 알기로는 지금 무림 강호에서 딱 두 군데뿐이라면서요.”
“그래? 어떤 곳이지?”
“모산파. 그리고 기갑문.”
공진표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톡. 톡.
그는 반으로 쪼개진 것처럼 갈라진 턱의 흉터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모산파는 황실을 도와 무언가를 하고 있느라 여력이 없다. 물론 방심하면 안 되니 조사는 해 보겠지만, 모산파일 확률은 낮아 보이는군.”
“그럼 기갑문인가요?”
“그것도 이상하다.”
공진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기갑문은 멸문했어.”
“네?”
소호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