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89화 (318/686)

8권 14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14)

“비사당문(飛死唐門) 겁화기갑(劫火器甲). 당문은 죽음을 뿌리고, 기갑문은 겁화를 태운다.”

공진표의 목소리는 마치 신화시대의 이야기를 말하듯 공허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무림 강호에서 흔히 회자되던 말이다. 독과 암기에 있어서는 당문이 최고이고 화기와 진천뢰에 있어서는 기갑문이 최고였기 때문이야.”

소호는 의외라고 생각하며 솔직히 놀랐다.

“당문과 비견될 정도였다니. 기갑문도 대단했네요. 근데 화기(火器)는 금지된 물품 아니었어요? 화기를 만들어도 황실이 가만히 둬요?”

“당연히 안 된다. 이 땅의 모든 화기는 명 황실의 통제를 받아야 돼.”

“그런데 어떻게 문파를 세웠어요?”

“말했듯이. 명 황실의 통제를 받았지.”

“아!”

소호는 자신이 눈치가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황실과 협력했군요?”

“황실과 협력하며, 황실에서 허가한 물건만 만드는 조건으로 기갑문의 연구를 허가해 주었지. 한 사람의 천재(天才)……. 아니, 천재라는 말로는 부족하지. 귀재(鬼才)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뭔가가 잘못되었나요?”

“그는 기갑문 문주의 방계(傍系) 친척이었는데 타고난 재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병기와 화기의 개조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그리고 황실의 규제와 통제에 불만스러워했지.”

“아……!”

“천재들은 다들 그렇게 삐뚤어지더군. 세상의 법칙을 깨부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아. 그는 결국 편법을 써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마구 만들어 냈고, 그로 인해 무림 강호에는 큰 혼란이 생겨났다.”

공진표는 그때의 일은 지금도 하오문에 특급 기밀로 기록되어 있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다 강한 힘, 보다 강한 파괴력을 원하는 것은 무림인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 그 힘의 편린이라도 얻고자 기갑문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천금(千金)을 내겠다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야. 어찌 보면 기갑문의 개파 이래 최고의 성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

소호는 기갑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거에 들었던 어떤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의 재능을 과신한 한 남자.

그가 만든 물건을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십 리 밖까지 줄을 섰다던.

허풍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옛날이야기.

‘설마…….’

소호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어지는 공진표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지.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너도 이미 예상했겠지만, 그러한 성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오만한 천재의 만행은 잠들어 있던 용의 분노를 사고 말았지. 태조와 태종, 그러니까 주원장과 영락제는 그런 걸 그냥 두고 볼 만큼 허술한 사람들이 아니었단 말이다. 기갑문의 역사는 그 날로 끝이 났다. 대부분의 전각은 불탔고, 기갑문의 문도들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그나마 기갑문주의 직계만이 남아 황실의 야장으로서 명맥을 이을 수 있게 된 것으로 감사할 지경이 되었지.”

공진표는 아쉽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기갑문의 마지막 문주는 남도화라는 걸출한 인재였다. 철기의 장인(匠人)이며 또한 무림인으로서 재능 있는 권사(拳士)였다던데. 육 년 전 어떤 사건에 휘말려서…… 죽었다.”

“안타깝네요. 싸움에 휘말렸나요?”

“…….”

“지부장님?”

공진표는 무언가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내친걸음이라는 듯 입술을 꽉 다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소호에게로 보냈다.

“기갑문의 마지막 문주였던 남도화는 최후의 순간에 대천문과 함께하고 있었다. 대천문이란……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은거한 노 기인들의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 마을에 원한을 가진 자들끼리 뭉친…… 악의로 가득찬 모임이었지.”

“…….”

“그리고 남도화가 원한을 가진 자는, 아까 말했던 그 귀재, 일흉대기 광사로라는 사람이다.”

소호는 숨이 멎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야기의 맥락상 조금 예상은 하고 있었다.

허나 직접 들으니 확실히 충격이었다.

그랬다. 이제는 소호도 어린아이가 아니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은자촌의 노인들에게는 각자 과거가 있었다.

그들은 일평생을 치열한 강호 무림에서 살아왔고, 그 결과 마치 훈장처럼 은원(恩怨)을 함께 갖게 되었다.

‘문제는…….’

공진표.

즉, 하오문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걸 이용하려고 소호에게 부탁을 했다는 점이다.

“기갑문에게 있어서는…… 문파를 멸문시킨 불구대천의 원수인 거군요?”

“그래. 하지만 기갑문에 유래 없는 성세를 가져온 것도 그 사람이니, 당대의 기갑문주는 그냥 가슴에만 묻고 넘어갔던 것 같지만……. 후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더군. 대천문에 들어간 것만 봐도 그렇지 않나?”

“그렇죠.”

“사람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더 미련을 갖는 법이야. 후대들의 마음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 사람만 없었다면 지금도 기갑문은 거대한 문파로서 성세를 누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테지.”

공진표는 어쩌면 명가의 후예라는 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지도 모른다며 혀를 찼다.

“남도화가 죽으면서 기갑문의 명맥은 끊겼다. 적어도 하오문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는데…….”

공진표는 소호가 가져다준 원통형의 화기를 들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기(天氣)를 읽는 호광 진인이 기갑문을 거론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처음부터 다시 조사를 시작해야겠다. 기갑문의 명맥을 이은 자들부터 그 식솔들까지. 모조리.”

하오문의 하남 지부장.

공진표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강인한 눈빛, 차갑게 굳어진 얼굴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지부장님.”

“왜 그러나, 소호.”

“저에게 임무를 내린 건, 제가 그걸 누구에게 물어볼지 알고 임무를 주신 거죠?”

“……그래.”

공진표는 부정하지 않았다.

“고맙게 생각하고, 또한 미안하게 생각한다.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이쪽도 한계다.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는 상황에서 상황은 어렵게만 흘러가고 있었어.”

“그렇게 심각해요?”

“백검의 위험이 전국 각지에서 시작되었다. 무산학관 내부는 평화로우니 잘 모를 테지. 하지만 바깥은 이미 전장(戰場)이다. 흑시군은 물론이고 동창 견검대가 민가까지 들쑤실 정도로 일이 험악하게 돌아가고 있어. 네가 보기에는 염치없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네게 부탁한 덕분에 적어도 백 명의 목숨과 석 달의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그렇게나요?”

“백검이 노리는 게 뭔지 아나?”

“……왕 태감이요.”

“그래. 일인지하 만인지상. 황실의 실세인 그 왕 태감이다.”

소호는 백린에 활활 불타면서도 복수를 부르짖던 화산파의 이대 제자를 떠올렸다.

“처절해 보였어요. 싸울 때는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들었구요.”

“그렇다고 들었다. 사문의 원수라는 좋은 명목이 있기는 하지만…… 과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솔직히 그래요.”

“내가 볼 때는 백검회에 대단한 지도자가 하나 있다. 그들을 부추기고 세뇌시키는 뛰어난 두목이 하나 있는 거야.”

공진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포권을 취했다.

“이번 일에 감사한다. 네가 준 단서들은 귀하게 쓰일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 하오문의 도움이 필요해지면 언제든 찾아와다오.”

소호는 씁쓸해하면서 마주 포권을 취해 예를 받았다.

헌데 공진표는 한참 동안이나 일어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소호가 말려서 일으켜 세운 뒤에야 예를 그만두었다.

“부끄럽군. 어린 소년에게까지 도움을 청했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공진표의 진심을 느꼈기에 소호는 웃을 수 있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무엇이든 말해라.”

“호광 진인이 말했어요. 저랑 서인이가 찾아오기 전에, 본인을 찾아온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고.”

“뭐라고?”

공진표는 소호의 생각보다 더욱 크게 놀랐다.

소호는 거기에 더욱더 놀라운 사실을 얹어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저랑 똑같은 철 요대를 차고 있었대요. 그리고 양손에는 흰색 수투를 차고 있었고요.”

“……!”

공진표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그는 계산 중일 것이다.

무산학관이 개관한 지 팔 년이 넘었다.

하지만 약관의 나이가 넘어야 졸업할 수 있는 학관의 특성상 졸업생이 나오기 시작한 건 불과 삼 년도 채 되지 않은 것이다.

일 년에 오십 명 정도.

기껏해야 백 명에서 백오십 명 사이라는 뜻이니, 하오문 수준의 문파라면 졸업자들의 소재를 모조리 파악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제가 부탁하고 싶은 건 한 사람에 대한 정보예요. 이해가 안 가긴 한데, 혹시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짐작 가는 자가 있는 건가?”

“근거는 없어요. 그저 감으로 한 명이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소호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유준. 무산학관에서 불패검이라 불렸던 사람에 대해 알아봐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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