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15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15)
공진표는 기억을 더듬듯 턱의 흉터를 쓰다듬었다.
“불패검, 유준?”
공진표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서찰을 받고 정보를 취합하는 곳의 수장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무산학관의 관도였다가 사라진 소년 한 명은 큰 가치가 없을 수도 있었다.
소호는 첨언을 덧붙였다.
“유준이 어떤 사람이었냐면 말이죠…….”
“기억났다.”
쿵.
공진표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불패검. 인상적인 별호였지. 무산제전 초반에 우승을 두 번 하고, 그리고 학관을 떠나 사라지지 않았던가?”
“……와, 지부장님 대단하시네요.”
“말했듯이 인상적인 행보를 남긴 사람이다. 기억하기엔 충분하지.”
공진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무실 한편에 마련된 서랍을 열어 그 안에서 서찰을 두 통 꺼냈다.
서찰은 대나무 통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겉면에 정통(正統) 일 년, 그리고 정통 이 년이라고 쓰여 있었다.
“정통제가 즉위하고 혼란스러운 때였다. 새로 등극하긴 했는데 황제는 고작 열 살. 황후가 섭정을 한다 하고, 양씨 문인들이 대권을 잡고, 대관식은 미뤄지고……. 난리였지. 거기에 저― 높으신 왕진 태감님께서는 대천문, 무산학관을 시작으로 흑시부대를 끌고 강호 제패까지……. 위험천만한 일은 다 벌이고 다녔고 말이야.”
공진표는 대나무 통 안에서 꺼낸 서찰을 탁자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글자들을 쭉 더듬어 갔다.
소호가 옆에서 어깨 너머로 살펴보았으나 내용이 뭔지 잘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워낙 깨알 같은 세필로 적은 데다, 알아볼 수 없는 암호가 즐비했던 것이다.
‘정통 일 년? 그 때 일어난 일들을 다 요약해 놓은 걸까?’
소호는 정보 집단의 비밀을 목격한 듯하여 흥미진진한 기분이 되었다.
공진표는 마치 개가 냄새를 쫓아가듯, 집중해서 글자들을 쭉 훑어 내리다가 한 지점에서 멈췄다.
백(白).
흰 백이라 쓰여 있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은 채, 공진표는 주변의 글자들을 집중하여 읽었다.
“그래. 완전히 기억났다. 그 당시에 백귀(白鬼)와 연관이 있는 젊은 청년에 대해 찾고 있었다. 불패검 유준은 그 후보들 중 하나였고 말이야.”
“백귀?”
“당시 암흑가에서 주목을 받던 살수의 이름이다. 갑자기 등장했는데 검술이 무척 뛰어났다고 하더군. 심지어 남궁세가의 후계자가 백귀와 만나 중태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아……!”
소호는 난감해져서 입을 꾹 다물었다.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를 습격한 자가 누구였는지, 소호는 잘 알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목격자들은 백귀가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젊은 검사들이나 인피면구를 만들 수 있는 살수들을 중심으로 조사했던 것이지. 그 일 이후에 백귀가 활동을 하지 않아서 죽은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긴 한다만.”
공진표는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무언가를 납득하더니, 정통 이 년의 서찰로 넘어갔다.
그는 서찰에 적힌 문자들을 위에서부터 쭉 따라 내려오다가 무(武)라고 적힌 글씨 밑에서 유준이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그래. 있군. 유준. 무산제전의 무룡전이 끝나자마자 학관을 이탈. 섬서에서 서안으로 가는 도중에 종적을 놓침.”
“섬서? 거긴 화산파가 있는 곳 아닌가요?”
“맞다. 섬서는 화산, 서안은…… 모산파가 유명하지.”
모산파.
술사들의 일문(一門)임에도 불구하고 한때 구파일방에도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던 문파다.
소호는 일련의 이야기 흐름에서 공통되는 점들을 찾아냈다.
“아……!”
단서를 찾아낸 건 소호뿐만이 아니었다.
공진표도 눈을 빛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호광 진인과 만난 것으로 의심되는 무산학관의 청년이, 육 년 전에 마지막으로 향한 게 모산파가 있는 방향이었다?”
우연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다.
소호는 공진표와 시선이 마주쳤고, 공진표는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의 의사를 표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지.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지만, 때때로 가장 중요한 정보는 사람이 아니라 행운이 물어다 주더군.”
공진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에서 손을 뗐다.
“유준에 대해서는 알아보도록 하지. 왠지 우리에게도 중요한 정보가 될 것 같다.”
“네. 부탁드릴게요.”
“닷새 안으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아마 기갑문에 대해서도 그쯤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날 테지.”
소호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말한 뒤 포권을 취해 예를 표했다.
“아! 한 가지 더.”
“네?”
“습림관 통과를 축하하네. 이제 곧 졸업하면 명실상부한 무림 강호의 강호인이로군.”
공진표는 탁자 위에 놓인, 소호가 가져다준 화기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단서를 가져왔으니 습림관은 통과한 것이라고 그가 인정해 준 것이다.
소호는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감사해요. 졸업이라니. 실감이 안 나네요. 일단 무산제전은 넘겨야 알 것 같아요.”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더군. 나중에 미미와 함께 식사라도 함께 하자고.”
“좋아요.”
소호는 정중하게 공진표와 인사한 뒤 밖으로 빠져나왔다.
낙성다루의 일 층은 분주하게 바빠 보였다.
가죽 갑옷을 입고 험악한 인상을 지닌 자들이 바쁘게 왕래하고 있었다.
다루의 손님들은 모두 내보냈는지 일반인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소호가 내려오자 힐끔 쳐다본 뒤, 관심을 끄고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그 일 때문일까?’
백단장 앞에서 벌어진 전투의 뒤처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생각해 보면 은위군과 문주희가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다.
소호는 제자리에 우뚝 서서 잠시 고민했다.
조금 더 지켜볼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학관으로 돌아갈 것인가?
조서인을 먼저 학관에 보내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더 기다려도 좋을 텐데.
괜히 먼저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공자님?”
그런데 다루의 문 앞에서 한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짙은 갈색의 튼튼한 이두마차를 세워 두고 정갈한 옷을 갖춰 입은 사내였다.
“장 공자님 되시지요?”
“네? 아, 네, 맞아요.”
“학관까지 모시겠습니다.”
마부는 높은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 본 듯 예의가 바르고 정중했다.
그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드러난 마차의 내부는 푹신해 보이는 비단 보료로 잔뜩 장식되어 있었다.
얼핏 봐도 비싸 보이는 마차.
고관대작들이나 타고 다닐 법한 고급스러운 마차였다.
“이런.”
소호가 뒤를 돌아 다루의 이 층을 올려다보니, 공진표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하핫.”
소호는 기분이 좋아져서 공진표를 향해 다시 한 번 포권을 취했다.
어째서 하오문 하남 지부장이 인덕이 많은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좋은 정보에 대한 감사의 뜻일까?
아니면 은자촌을 이용하려 했던 일에 대한 사죄일까?
어느 쪽이든 공 지부장은 사람 다룰 줄 아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상필벌이라고 하였다.
상과 벌을 제대로 나눠 주는데 따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탈게요.”
잠시 거절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소호는 굳이 문제를 만들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값을 지불하면 된다.
언제든 그에 걸맞은 일을 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소호를 당당하게 만들었다.
그는 마차 안으로 폴짝 올라서서 푹신한 비단 보료에 몸을 파묻었다.
자연스레 온몸에서 힘이 풀릴 만큼 보료는 푹신했다. 보료에선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몸이 진흙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점점 가라앉는데 다시 올라가기가 싫었다.
“천국이네…….”
소호는 이런 게 돈의 위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학관의 기숙사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호화로운 사치가 소호의 몸과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격렬했던 전투의 피로가 이제야 몰려오는 듯했다.
마부가 가끔 고삐를 잡아당길 때를 제외하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마차가 나아갔다.
히힝―.
문제는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찾아왔다.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던 소호의 귀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포착한 것이다.
“어?”
소호는 나태해지려는 몸뚱이를 겨우 일으켜 세우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낙양대로의 한쪽, 새카만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각각 심각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을 등에 업거나 수레에 실은 채 황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잠깐만요!”
소호는 마부를 멈춰 세운 뒤, 곧바로 마차에서 뛰쳐나왔다.
나쁜 일은 언제든 일어난다.
싸우고 다치고 죽는 일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니 부상당한 무인들을 보았다고 해서 다급해질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그 다친 사람들 중에 소호가 아는 얼굴도 있다는 점이었다.
소호는 황급히 수레를 향해 다가갔다.
다른 수레에는 부상자가 다섯 명씩 타고 있었는데, 환자 한 명이 혼자 타고 있는 수레가 한 대 있었다.
익숙한 검푸른색 무복, 창백한 안색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그는 손에 끼고 있는 검은색 수투를 이용해 옆구리의 상처를 지혈하고 있었다.
꽤나 꽉 누르고 있는 듯했는데도, 가끔 기침을 할 때마다 핏물이 울컥울컥 새어 나왔다.
“은위군.”
가까이 다가가니 수레를 끌던 사람 옆에서 따라 걷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헤어졌던 문주희였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자상(刺傷)이었던 것일까?
움직임이 많이 불편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럼에도 둘둘 말아 둔 붕대 사이로 핏물이 살짝 배어 나왔다.
“소호야.”
문주희는 소호를 보자 잠시 반색했지만, 곧이어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다 빼앗겼어.”
“뭐를?”
“우리가 잡은 포로랑 화기들.”
“뭐?”
소호는 귀를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