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16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16)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머릿속에서 싸움이 끝난 뒤의 마지막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두머리인 권우량은 손목을 꿰뚫리고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그를 따르던 백검회의 무인들은 분명 은위군이 어린단검을 투척해 모조리 쓰러뜨린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더 이상 남아 있는 위협은 없었다.
그들이 입속에 숨겨 두었던 화기들도 모두 뺏은 상태가 아니던가.
“너희들이 가고 나서 하오문 사람들이 와 줬어. 수레도 열 대 넘게 가져와 줘서 거기에 포로들과 화기를 다 실었는데……. 긴장을 풀고 막 출발하려는 찰나에 연막탄이 날아왔어.”
“습격당한 거야?”
“시야가 완전히 가려져서 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적들은 열 명이 넘었던 건 확실해.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야.”
문주희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했지만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그녀의 분노를 증명했다.
소호는 말문이 막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의심했고, 곧이어 화가 났다.
문주희나 은위군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자신의 허술함에 화가 났다.
권우량과 그가 이끄는 백검회의 무인들이 전부라고 누가 이야기했던가?
그들을 지켜보던 자들이 있을 수도 있고, 이번처럼 나중에 습격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가 경솔했어. 하오문에 보고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일단 남아서 다 같이 임무를 마쳤어야 해. 그게 상황에 맞는 행동이었어.’
상처를 손으로 틀어막고 있는 은위군의 신음 소리가 마치 소호를 질책하는 듯했다.
소호는 입을 꾹 다물고 분을 삼켰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부터 이제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에 대한 막막함까지, 온갖 감정이 그를 덮쳐 왔다.
그때 문주희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너, 아까 네가 남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맞아.”
“그러지 마.”
그렇게 말하는 문주희는 분명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소호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남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지금의 이런 사태는…….”
“그러지 말라고.”
문주희는 냉랭하게 받아쳤다.
“너나 나나 똑같은 무산학관의 제자들이야.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야 해.”
“아…….”
“이건 내 실수야. 함께 조를 짜서 행동한 은위군의 실수이기도 하고. 당당하게 성과를 갖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건 우리 일이었어. 네가 자책을 하면 그건 우릴 무시하는 거야. 넌 모두를 구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
문주희는 말을 끝내고 나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 휙― 하니 돌아서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밑에서 잘린 짧은 머리 밑으로 햇볕에 그을린 갈색 피부와 매끈한 목선이 보였다.
소호는 거칠어진 문주희의 숨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당황할 뿐이다.
최근 들어 이런 말을 몇 번 들었기에 나름 익숙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때마다 동생이자 소호의 지낭(智囊)인 섭주해는 보통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당당하되, 항상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라고.
소호는 그 말대로 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늘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하곤 했다…….
“으음, 내가…….”
소호의 말보다 문주희의 말이 한발 빨랐다.
“미안해.”
“어?”
“괜히 성질을 부렸네. 미안해. 이해해 줘. 중요한 일을 놓쳤다고 생각하니 예민해져서.”
다시 돌아보는 문주희는 언제 안색이 어두웠냐는 듯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지만 않았다면, 누가 봐도 속을 만했다.
“네가 남아 있었으면 확실히 도움이 되었을 거야.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내가 너무 흥분했네. 미안해.”
“어, 음……. 아냐. 괜찮아.”
“아까 말했듯이 붙잡았던 무인들이랑 화기는 다 빼앗겼어. 면목이 없네. 일단은 부상자를 챙기는 게 우선이라 함께 돌아왔지만 하오문에 도착하면 곧바로 흉수들을 추적해 보려고 해. 나도 끝까지 따라가 볼 거야.”
소호는 붕대를 칭칭 감아 둔 문주희의 어깨를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그녀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이상 없다는 듯이 멀쩡함을 과시했다.
“난 멀쩡해. 긁힌 상처일 뿐이야.”
“……그래, 일단은 하오문으로 가 보자.”
소호는 왈가왈부하지 않고, 일단 이들과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소호는 자신이 타고 온 마차의 마부에게 양해를 구하고 은위군을 포함해 상세가 안 좋아 보이는 환자들을 마차의 푹신한 보료 위에 태웠다.
그들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움직였다. 낙양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지나가던 어떤 여인과 아이가 위험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경계하며 멀어졌다.
낙성다루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멀찍이 고급스러운 누각이 보일 때쯤, 앞마당에 잔뜩 몰려나온 하오문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탁자와 집기들이 보이고, 약을 달이는 듯 심심하고 씁쓸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어서 이쪽으로!”
“부상자는 이쪽으로! 상처가 없는 사람들은 다루 안으로 들어가고!”
“자, 빨리빨리 움직입시다!”
홍원을 비롯한 지부장의 심복 삼인방이 앞장서서 사람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다루 앞으로 다가갈수록 약 달이는 냄새가 점점 진해졌다. 의원들이 다루로 와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하오문이 데려온 의원들인 듯싶었다.
어떻게 일을 처리할지 막막했었는데,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어?” 하고 멍하니 있는 사이, 소호는 그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은위군을 얼떨결에 의원에게 넘겨주었다.
의원은 은위군의 옷을 벗기고, 따뜻한 물에 적신 천으로 몸을 닦아 주었다.
툭.
그때 누군가가 소호의 등을 떠밀었다.
뒤를 보니 몸집이 작은 소동이 손가락으로 낙성다루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부장님이 기다리세요.”
눈이 또랑또랑하고 말투가 야무진 아이였다. 대답을 하려는데 옆에서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됐어요. 치료 받지 않아도 돼요.”
소호가 옆을 보니 문주희가 창백한 안색으로 의원의 손길을 거절하고 있었다.
“괜찮겠어?”
“괜찮아. 보고부터 해야지.”
문주희는 씩씩하게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지려는 듯 허리에 찬 철 요대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당찬 여인이다.
조서인이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후우.”
소호도 크게 숨을 들이켜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까는 낙성다루가 밝고 아름다워 보였는데, 지금은 자신이 끌려 들어갈 지하 감옥처럼 어두워 보였다.
‘민망하네. 뭐라고 설명하지?’
칭찬을 받으며 작별 인사를 한 지 불과 반 시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이제는 실패에 대해 보고해야 했다.
극과 극의 상황이다.
소호는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두두두두두―.
“어?”
귀가 좋은 소호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 곧이어 문주희와 다른 무인들이 깜짝 놀라 큰길 쪽을 바라보았다.
말 한 마리가 낙성다루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분명히 한 마리의 말일 뿐인데, 지축을 울리는 느낌은 마치 천군만마 같았다.
“어? 저 말은……!”
소호는 그 말을 알아보았다.
낙양대로 중앙을 무지막지하게 달려오는 한 마리의 거마(巨馬)가 순식간에 낙성다루 앞에 멈춰 섰다.
체고가 성인 남성보다 훨씬 크고 대단한 위세를 가진 말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근육을 지녔고, 네 개의 다리는 웬만한 전각의 기둥처럼 굵었다.
히히힝―.
푸륵―.
말이 거센 숨결을 토해 낼 때마다 들썩거리는 근육의 위압감이 엄청났다. 질겨 보이는 적갈색 피부 위로 툭 튀어나온 힘줄과 혈관이 심장이 뛸 때마다 약동했다.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꿈쩍도 않을 것 같은 괴물 말이었다.
“와……!”
문주희마저 얼이 빠져 있는 바로 그 때, 말 등에 타고 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어내렸다.
하늘하늘한 분홍색 비단 무복이 펄럭이는가 싶더니 바닥에 내려선 것은 아름다운 삼십 대의 여인이었다.
흑단 같은 검은색 머리를 잔머리 하나 남기지 않고 뒤로 단정하게 묶었다. 가벼운 재질의 옷감이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분칠을 하여 하얗게 보이는 얼굴, 새빨간 입술이 강렬했다.
“연홍 교관님.”
문주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교관과 학생 사이에 나쁜 감정이 있어선 안 되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인 이상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궁합’적인 면은 존재했다.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의 문주희는 여성적인 매력을 무기로 삼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득을 놓치지 않는 연홍 교관과는 여러 면에서 맞지 않는 편이었다.
그건 입관 때부터 그랬고, 육 년이 지나 졸업을 앞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문주희. 이야기는 들었어. 많이 다쳤니?”
연홍 교관은 붕대로 칭칭 감긴 문주희의 어깨를 힐끗 쳐다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뇨, 괜찮아요. 저보다는 은위군이 다쳤어요.”
“그랬구나. 어디에 있니?”
“조금 전에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의원이 치료 중이에요.”
연홍 교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소호를 쳐다봤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호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말을 향해 말했다.
“진 교관. 저는 부상을 입은 학생들을 먼저 돌볼게요. 뒤는 맡겨도 되겠죠?”
연홍 교관은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곧바로 문주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어어? 왜 그러세요?”
“너도 따라와. 치료 안 받았지?”
“아뇨, 저는 멀쩡해요.”
“거짓말 마. 어깨가 아프니 중심이 흐트러져 있어. 거기다 그 붕대, 네가 직접 둘렀지? 보면 알아. 검술 수업 때 나한테 배우지 않았어? 사람은 쉽게 죽어.”
“…….”
“얘는 입관식 때부터 변한 게 없니. 미련하긴. 지금이 내숭 떨 때야?”
“내숭? 제가 내숭을 떨었다고요?”
“그래. 멀쩡한 척 내숭 떨지 말고 빨리 와, 계집애야.”
서른이 넘은 연홍 교관은 문주희의 새침한 태도에 능숙하게 대응했다.
문주희는 별다른 반박도 못해 본 채 순식간에 의원들이 있는 쪽으로 끌려갔다.
한편 홀로 남아 버린 소호는 말에서 내리고 있는, 연홍 교관에게 ‘진 교관’이라고 불린 한 사내를 마주했다.
“예. 제가 다 해결해 버릴 테니 천천히……. 벌써 갔네. 하여간 무정해, 연 교관. 그게 더 매력적이라니까?”
마흔이 넘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소년 같은 장난기가 남아 있는 얼굴.
한 마리 표범처럼 늘씬하게 잘 단련된 육신은 여전했다. 피부도 팽팽해서 잔주름조차 없으니 인중과 턱에 짧게 기른 수염만 없었다면 아직도 젊은이로 볼 수도 있을 외모였다.
“진 교관님.”
소호는 짧게 포권을 취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이었다.
절친한 삼촌이라도 예를 표해야만 했다.
“소호!”
반면에 진구는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격의 없는 모습.
성큼성큼 다가와 양손으로 소호의 어깨를 턱하니 붙잡더니 즐겁다는 듯이 씩 웃었다.
“우리 무산학관의 천무공자님. 일이 꼬였다며?”
일이 꼬여서 즐겁다는 듯한 말투였다. 소호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