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17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17)
“꼬여도 제대로 꼬였어요.”
“괜찮아. 살다 보면 실패도 하고 그러는 거지.”
“어째 즐거워 보이시네요.”
“그래? 에이, 그럴 리가. 착각이야, 착각.”
진구는 말만 착각이라고 할 뿐 얼굴에서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얄미운 미소다.
소호를 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은자촌에 있을 때가 좋았어. 아랫마을 누나들 이름만 대면 모든 게 해결되었는데 말이지.’
소호는 아쉬운 마음에 한숨만 푹 내쉬었다.
“왜 한숨을 푹푹 쉬어?”
“무산학관엔 왜 아랫마을 미애 누나 같은 분이 없을까요?”
“……깜짝 놀랐네.”
진구는 어찌나 놀랐는지 잠시 동안 숨 쉬는 법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런 과거의 이름은 꺼내는 거 아냐, 인마.”
“차였었나? 찼었나?”
“몰라. 기억도 안 난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있어?”
“슬프네요. 과거는 잊혀진다는 게. 그럼 이젠 누구한테 이르면 돼요? 연 사부?”
“인마. 진짜 혼나 볼래?”
소호는 진구가 양손으로 자신의 팔다리를 더듬거리는 걸 말리지 않았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소호의 전신을 꼼꼼히 만지고 살핀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하구나.”
“물론이죠.”
“서인이한테 들었다. 다수가 덮쳐 왔으면 일단 물러났다가 바로 학관에 보고를 해야지. 왜 그걸 굳이 맞서서 싸우고 있어? 그것도 숨을 곳도 없는 평지에서?”
“으음…….”
소호는 대답하기 난감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백병전에서는 지리(地利)를 이용하라. 지형이 유리하지 않으면 물러나라?”
“그렇지.”
“학관에서 그렇게 배우긴 했지만…… 보니까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이길 수 있으면 다 싸우냐?”
“그건 아니지만, 피할 필요도 없잖아요?”
“네 임무는 단서를 얻는 걸로 끝이었다며?”
“……네.”
“대형이랑 나랑 공통점이 있다면, 싸우는 게 이득인지 피하는 게 이득인지 본능적으로 안다는 거야. 너는 산에서 곰과 호랑이가 서로 마주쳐도 왜 서로 경계만 하고 안 싸우는지 알아?”
소호는 답하지 않았다.
몰라서가 아니라, 진구가 말하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별것도 아닌 일로 싸우다 다치기라도 하면 치명적이거든. 다친 호랑이는 늑대한테도 지는 거야.”
“으음…….”
“제 새끼를 지킨다든가. 그런 큰 이유가 있지 않으면 합리적으로 행동해야 해.”
“……알겠어요.”
“너무 잔소리 같은가? 납득 안 가지? 원래 그래. 그래도 기억은 해 둬라. 나중에 때 되면 생각난다? 가끔은 싸우지 않아야 이기는 싸움도 있어.”
진구는 소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훌쩍 뒤로 물러섰다. 장난스레 웃고 있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간다.
어느새 낙성다루에서 나온 공진표가 진구를 향해 포권을 취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소, 진 교관. 잘 지내셨소?”
“잘 못 지냅니다.”
진구의 말투는 차가웠다.
소호를 대할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웃고는 있으나 눈빛이 차가운 것을 넘어서서 섬뜩할 정도다. 수없이 많은 실전 경험에서 나오는 살기 어린 기운이 공진표를 압박하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의원들, 환자들, 하오문의 인물들이 모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들은 오싹한 기운에 밀려 주춤주춤 거리를 벌렸다.
진구의 기세가 넘실넘실 불타고 있었다.
“제 기억으로는 분명히…… 하오문이 먼저 나서서 습림관을 관리하겠다고 이야기한 걸로 기억하는데. 아닙니까?”
공진표는 진중한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가 먼저 나서서 이야기를 했소.”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
“습림관을 잘 관리하겠다던 약속에 대해 내가 잘못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오. 틀리지 않소.”
“이런 식으로 애들이 다칠 줄 알았으면 무산학관에선 직접 습림관을 운영했을 겁니다. 학관장님이 이 소식을 듣고 기분이 어떠실까요?”
당금의 무림에서 무산학관의 위상이란 태산북두 소림에 필적한다.
황실의 실세라 불리는 왕진 태감이 직접 세운 학관.
무림 강호의 무공들을 모조리 끌어모아 만든 무학의 성지.
아무리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하오문이라도 무산학관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마땅했다.
팔짱을 낀 진구가 공진표를 향해 한 걸음을 다가갔다.
툭.
가벼운 발걸음이었지만 정면에 있던 공진표에게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진구의 주변에서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듯했다.
분노의 열기.
질책의 겁화였다.
공진표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
“일이 꼬였소. 변명의 여지는…… 없소.”
“변명의 여지는 없다?”
“문제가 있는 부분은 어떠한 처벌이든 달게 받아들이겠소. 다만 일단은 우리가 진상을 파악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그래야 대체 왜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원인이라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오.”
공진표는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아…….”
소호는 그 모습을 보며 뭔가 자신이 잘못한 듯한 죄책감을 느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백검회는 분명 소호와 조서인을 쫓아오고 있었다.
그로 인한 일로 하오문이 질책 받는 것?
그리고 그 모습을 변명도 해 주지 못한 채 숨죽이고 바라보는 것?
그건 모두 정의롭지 않다.
소호는 뭔가 나서서 말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장소호.”
“……네?”
소호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그를 부른 진구의 목소리가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너는 돌아가라. 문주희랑 은위군도 괜찮으면 함께 학관으로 돌아가.”
“하지만…….”
“잔소리하지 마.”
섬뜩할 정도로 무감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히는 듯했다.
“네 일은 임무를 마치는 걸로 끝났다. 습림관은 통과했어. 내 말이 틀립니까, 공 지부장?”
“……맞소. 장 공자는 모든 관문을 통과했소.”
“그러니 더는 여기서 할 일도, 관여할 임무도 없을 겁니다. 그렇지요?”
진구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소호에게 쓸데없는 걸 시킨 일에 대한 항의이자 질책이다.
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무언의 항의와 무언의 변명이 교차했다.
공진표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그렇소.”
“그럼 됐네.”
진구는 소호를 향해 엄중하게 외쳤다.
“돌아가. 여기부터는 학생이 관여할 일이 아니야. 너는 학관으로 돌아가서 무산제전을 준비해.”
“…….”
“마차는 공 지부장이 알아서 수배해 주시겠지요?”
공진표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딘가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하오문의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차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처음에 소호를 태워 주었던 그 마차였다.
“자, 얼른 타라.”
“저기, 근데…….”
“됐어. 아무 말 말고 일단은 학관으로 돌아가.”
진구의 존재는 컸다.
소호가 안심할 수 있는 든든한 방패가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아직 소호가 완전한 성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는 커다란 벽이었다.
소호는 멀찍이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은위군을 바라보았다.
냉랭한 인상의 청년은 꽤나 상세가 호전된 듯 보였다. 안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이제 눈을 뜨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자세가 바르고 근골이 멀쩡한 것을 보니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그 옆에선 붕대를 다시 감은 듯한 문주희가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가고 싶지 않아 보였지만 연홍 교관에게 등을 떠밀려서 은위군과 함께 마차에 탔다.
“이럇!”
히히힝―.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세 사람은 단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뭔가…….”
소호는 창밖으로 보이는 진구와 연홍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답답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을 품은 채,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무산학관을 향해 무심히 움직였다.
***
“이곳인가?”
“그렇소. 습격이 일어난 곳은 여기요.”
하오문에서는 누군가의 흔적을 쫓고 추적하는 추종술만을 전문적으로 익힌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늙은 개[老犬]라고 불렀다.
나이가 들어 두 눈에 백내장이 온 늙은 개들은 후각만으로 모든 일을 해낸다고 했다.
물을 먹고, 밥을 먹고, 심지어 사냥도 해낸다고. 때문에 그들은 추종술 하나로 뭐든 찾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들은 실제로 추종술이 뛰어났다.
하오문에서 데리고 나온 늙은 개는 세 명이었는데.
그들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제각각 사방으로 퍼지며 바닥에 코를 박을 듯이 엎드린 채 흔적을 살폈다.
“여기다! 여기서 습격이 시작됐다!”
무산학관의 대표로 참석한 진구와 연홍 교관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들의 일처리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바닥에 깨알 같은 새카만 가루를 뿌리고 그걸 후후 불면서 바닥을 긁어 댔다.
조금 기다리니 질퍽했던 흙이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흐릿했던 흔적이 선명하게 변했다.
“하오문에서 가져온 수레가 점점 무거워지다가 오른쪽으로 힘이 쏠렸다.”
“가장 처음 습격당한 사람은 이쪽이다. 이쪽 핏자국이 제일 먼저 말랐어.”
“수레에 몇 명이 탈 수 있지?”
“한 대에 열 명씩.”
“연기를 내뿜는 화기는 어디에서 던졌지?”
“여기다. 여기 잔해가 있어.”
노견들은 자기들끼리 활발하게 의견을 나누면서 일사천리로 그때의 일들을 추리해 갔다.
그들은 그렇게 반 시진이 넘도록 근처를 훑더니, 또다시 반 시진 동안 멀리 뛰어가서 근처를 수색했다.
노견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안색은 침중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상하군.”
“이상해.”
“이쯤 되면 확실하군.”
안 그래도 서로를 닮은 단신의 사내들이 세쌍둥이 같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가 그리 이상합니까?”
진구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함께 온 하오문의 하남 지부장 공진표였다.
그는 노견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더니, 심각해진 얼굴로 정보를 전달했다.
“노견들의 말로는 습격자가 없다고 하오.”
“……예?”
“인근의 흔적은 모두 밖으로 빠져나간 흔적뿐. 들어온 흔적은 없다고 하오. 만약 누군가가 습격했다면 숫자가 안 맞는다고 하는군.”
진구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문제점을 알아챘다. 전장에서의 수많은 기만책과 함정들을 경험했던 그의 과거가 진구에게 정확한 판단력을 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습격자가 없는데 습격을 당했다는 거예요?”
연홍 교관이 하는 말에 고개를 저은 진구가 땅이 움푹 패고 발자국도 잔뜩 남아 있는 곳으로 다가가 뭔가를 집어 들었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손가락 반 개만 한 단검이었다.
그는 그것을 눈앞에 가져다 대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린단검?”
물고기 비늘처럼 짧고 가벼운 단검이었다.
철 요대와 함께, 무산학관을 상징하는 특징적인 기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물건이다.
진구의 손에 들린 어린단검은 뾰족한 칼날 부분이 뭔가 단단한 것에 부딪친 것처럼 뭉개지고 휘어져 있었다.
진구는 화살촉이나 단검 날이 이런 모습이 될 때를 알고 있었다.
그가 적룡기마대의 일원으로 북로전쟁에 종군하던 시절.
두꺼운 철갑에 부딪친 화살이나 단검들이 이렇게 뭉개진 모양이 되어서 옆으로 튕겨지곤 했었다.
진구는 그 옆에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어린단검을 집어 들었다.
똑같은 모양으로 뭉개져 있었다.
그 옆에도, 그 옆의 옆에도 모두 모양은 동일했다.
“그랬군.”
진구의 두 눈이 심상치 않은 빛으로 번뜩였다.
씩 올라가는 입꼬리.
흑표범이 사냥감을 향해 으르렁거리듯, 진구는 나직하게 웃었다.
“습격자는 없었다. 쓰러진 척하던 자들이 기습을 한 것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