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93화 (322/686)

8권 18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18)

어둠이 짙게 내려온 관제묘에서는 퀴퀴한 먼지향이 났다. 인심을 잃고 방치된 사원이 으레 그러하듯 이곳도 축축하게 썩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낡은 목재 건물 특유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바닥에서 낙엽이 썩는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쿵.

두꺼운 대문이 닫히자 분위기는 더욱 음산해졌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얇은 나무 벽 너머로 들려왔다.

관제묘 안을 밝히는 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관제상 앞의 자그마한 향초뿐이었다.

그 향초 불만을 의지한 채 나타난 세 사람은 각기 다른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때가 되었다.”

유일하게 가면의 이마 부분에 검 문양을 새겨 놓은 사람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무산제전이 열리면 계획은 시행될 것이다. 저 가증스러운 악적 왕진은 우리가 준비한 선물을 받게 되겠지.”

백검 가면의 사내는 좌우의 사내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한 명은 키가 크고, 한 명은 보통의 체형이었다.

그중 키가 큰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무리 단계입니다. ‘선물’은 준비되었습니다.”

“훌륭하군, 칠검(七劍).”

백검 가면은 고개를 끄덕이며 치하한 뒤 이번에 보통 체구의 가면인을 바라봤다.

“물건은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호광 진인과의 만남은 막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는 들었다. 난 거기까지 알아낸 하오문이 더욱 놀랍더군. 우리가 하오문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닌가?”

“그건 아닐 겁니다.”

“어째서 그리 확신하지?”

“하오문이 아닙니다. 하오문이 준 정보였다면 진작 그곳은 보이지 않는 세작들과 살수들로 전쟁터가 되었을 텐데. 정작 그곳으로 향한 건 무산학관의 관도 두 명뿐이었죠.”

가면인의 눈빛이 더욱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천무공자입니다. 장소호가 스스로 호광 진인에 대해 알아낸 겁니다.”

“천무공자라니. 별호는 그럴듯하지만 그래 봐야 약관의 청년 아닌가.”

“…….”

“미안하군. 오검(五劍) 자네도 약관의 나이였지. 자네를 폄하할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그는 자네와는 달라. 그는 우리 백검회의 동료가 아니지. 가족들을 잃었을 때의 복수심과 집념에 대해 알지 못한단 말일세.”

“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제가 지금껏 만나 본 사람 중에 가장 뛰어난 자입니다.”

“과대평가는 아닌가?”

“……아닙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를 더욱 경계하도록 하지.”

백검 가면은 동료의 의사를 무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진법으로 꽁꽁 숨은 채 우릴 만나 주지 않던 호광이 천무공자는 만나 줬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암기를 만들어 내는 기갑문에 대해서는 들켰다고 생각해야겠군.”

“동창도……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쫓아와 봐야 늦었다. 계획은 마무리 단계야.”

백검 가면의 목소리는 자신만만했다.

“오검, 자네는 나와 함께 돌아가지.”

“…….”

“오검?”

오검이라 불린 사내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할 일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위험하네. 정체가 노출될 위험이 있어.”

“이번 일, 저희가 선물을 줄 때 천무공자는 배제해야 합니다.”

“배제? 없애자는 건가?”

“아닙니다. 중요한 시기에 무산학관에만 없으면 될 겁니다.”

백검 가면, 오검, 칠검.

세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어째서 그에게 그리도 집착하는 건가.”

“집착이 아닙니다. 이성적인 판단입니다.”

“그럼 이성적으로 나를 납득시켜 주게.”

“무산학관에서 딱 하나. 건드려선 안 되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천무공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모르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장소호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 마을을 말함이군.”

백검 가면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천무공자라고 불리는 그 성격, 그 정의감을 생각하면 분명히 간섭하려 할 겁니다. 저희의 선물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그 뒤탈은 상상도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군. 천무공자의 성정에 대한 건 오랫동안 봐 온 자네가 잘 알겠지.”

백검 가면이 반대쪽의 키 큰 사내를 바라봤다.

“칠검?”

“오검의 계획을 돕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백검 가면은 오검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었고, 세 사람은 향로 앞에서 다시 한 번 서로의 의지를 다졌다.

“흑시의 몰락. 백검의 복수를 위해.”

세 사람은 마치 주문을 외우듯 나직하게 읊조린 뒤, 미련 없이 돌아섰다.

끼이익―.

다시 한 번 관제묘의 문이 열렸다. 모두가 빠져나간 뒤, 관제묘 안은 침묵만이 남았다.

***

소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었다거나, 마음대로 일이 안 풀려서가 아니다.

그건 ‘예감’이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뭔가가 벌어질 것 같은 기분.

분명히 마음속 어딘가가 찜찜한데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런 꺼림칙함.

은자촌에서 지낼 때부터 막연하게 느끼곤 했던 그 감각이 오랜만에 되살아났다.

소호가 느끼는 이 감각에 대해 진구 삼촌과 운찬 삼촌은 늘 ‘뭘 해도 망하지는 않을 놈.’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좋은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감각이 있다는 건 인정해 준 것이다.

소호는 마음이 불편해질 때면 늘 가고 싶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두 번, 세 번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건 소호답지 않았다.

“소호?”

백호방의 널찍한 연무장 안.

연무장 안에 발을 딛기만 했는데도 은은한 백합 향이 느껴졌다.

마치 쌀쌀한 늦가을처럼 연무장의 공기는 서늘했다. 그녀가 무공을 연마하고 있는 탓이다.

소호는 빙긋 웃었다.

금발, 벽안의 색목인 여인이 눈을 크게 뜬 채 소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습림관 통과했어요.”

“축하해.”

이제는 성숙한 여인이 된 백설지였다.

투명하리만큼 하얀 피부와 마치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빛나는 듯했다.

볼살이 빠지면서 이목구비도 더욱 뚜렷해졌다. 한족(漢族)과는 전혀 다른 외모였기에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소호가 얼마 전에 듣기로는 백설지는 그 때문에 최근 들어 더욱 밖으로 잘 안 나가려 한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상하다고 수군거리고 대화도 잘 안 거는 탓이다.

하지만 소호는 그렇기에 더욱 외모부터 남들과는 확실히 다른 그녀에게 자꾸 마음이 쓰였다.

“습림관을 끝내긴 했는데, 뭔가 마음이 싱숭생숭하네요. 백검회라는 이상한 단체랑 엮여서 습격도 받았었거든요.”

“다쳤어?”

“아뇨. 저는 멀쩡해요. 은위군이랑 문주희는 좀 다쳤어요. 제가 남아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문주희가 기분 나빠 하더라구요.”

백설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 상해. 그러지 마.”

“그게 사실인데도요?”

“머리는 알아. 가슴은 몰라.”

백설지의 한어(漢語)는 어릴 때보다 능숙해졌지만, 북방 특유의 강한 억양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가슴은 모른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축하해. 한 번에 끝났네. 나랑은 달라.”

“설지 선배는 작년에 운이 나빴죠. 그러고 보니 올해 선배는 어떻게 됐어요?”

“나도 통과했어.”

백설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소호와 거의 비슷할 만큼 키가 큰 데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축하해요! 임무가 뭐였는데요?”

“호위.”

“호위?”

소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작년에 백설지가 습림관을 통과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호위 임무를 실패해서였기 때문이다.

“하오문도 너무하네. 왜 하필 호위를 맡긴 거예요?”

“아냐. 내가 부탁했어. 호위 임무를 하겠다고”

“설지 선배가요?”

“실패했다면, 같은 걸로 성공해야 해. 그래야 극복해.”

백설지의 두 눈에는 후회나 미망(未忘)이 없었다.

오로지 있는 것은 만년설(萬年雪)처럼 서늘하고 단단한 자부심뿐이다.

“실패했던 호위 임무를 이번에는 성공시켜서 마음의 상처를 극복한다?”

“맞아. 근데 마음의 상처는 아냐.”

“하긴,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다고 했죠? 노예들 데리고 다니면서 괴롭히는 악덕 상인이었나?”

“맞아.”

백설지는 담담했다.

아마 약속된 호위 장소까지 다 도착해 놓고도 결국 빙백신장 일격으로 얼려 죽여 버린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럼 이젠 극복한 거예요?”

“극복했어.”

“축하해요. 연회라도 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난 오향장육이 좋아.”

“하핫! 맞아요. 오향장육 맛있죠. 우리 이번에 습림관 통과한 사람들 모아서 식사 한 번 해요.”

소호는 백설지의 반대쪽에 서서 자세를 낮췄다.

늘 있는 일이었기에, 백설지도 당연하다는 듯이 마주 보며 자세를 낮췄다.

“오늘도 백 초?”

“……이백 초 하죠.”

“마음이 심란한가 보네. 좋아.”

백설지는 시원시원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깔끔하게 수긍하고 빙백신장의 기수식을 취했다.

“후우.”

소호는 길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소호도 맨손이었다.

맨손 대 맨손.

장타 대 장타.

소호는 그동안 수많은 무공을 익혔지만 내공만큼은 그리 쉽게 극복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삼십 년 내공.

약관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것도 많은 편이지만, 백설지는 그의 두 배 이상.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닌, 명실상부한 무산학관 내공 제일인이 백설지인 것이다.

“간다.”

백설지의 선공과 함께 대련은 시작되었다.

파앙―.

툭. 툭.

파파팡―.

일격. 일격.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서로 장타 초식을 주고받았다.

때로는 빙백신장, 때로는 태극권을 취하며 서로 간의 손과 손, 팔과 팔을 맞부딪치며 내공을 겨뤘다.

초식에서는 소호가 정교했지만 백설지도 만만치 않아 백중세가 이뤄졌다.

이백 초의 대련은 반 시진 넘게 이어졌다.

마침내 대련이 끝났을 때, 소호의 이마와 턱 끝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후우, 수고하셨어요. 선배.”

백설지 역시도 지친 기색이 있었지만, 소호처럼 땀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인사하는 소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소호.”

“네?”

“힘내.”

웃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해 주는 응원이었다.

소호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네. 고마워요, 선배.”

연무장의 문을 닫고 나오니 바깥은 이미 어두워져서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연무장 입구와 숙소 쪽에 걸어 놓은 유등(油燈)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소호는 한결 개운해진 마음으로 오늘 하오문에서 받은 서찰의 내용을 떠올렸다.

기갑문에 대한 자세한 조사 결과.

그리고 백검회에 습격을 당했었던 현장을 추종술로 조사한 결과에 대한 내용이었다.

‘습격자는 없었다. 부상을 당한 척 위장한 백검회 인물들의 기습이었다?’

소호는 어린단검을 투척하던 은위군의 모습과, 어린단검을 맞고 쓰러져서 뒹굴던 백검회의 무인들을 떠올렸다.

“어찌해야 하나.”

소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납득하기가 어려울 뿐, 답은 하나뿐이었다.

소호는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 느꼈던 불쾌한 예감이 적중한 것을 느꼈다.

습림관 임무에서 내내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일련의 흐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툭.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온 돌멩이 하나가 소호의 발밑에서 멈췄다.

소호는 숙소로 가는 길목에 서있는 한 사람의 청년을 바라봤다.

검은색 수투를 양손에 낀 서늘한 인상의 청년이, 오늘따라 검은색 무복에 장포까지 입은 채 소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군.”

소호는 연무장 입구의 불빛 아래에서 은위군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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