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19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19)
서로 눈이 마주쳤음에도 은위군은 잠시 말이 없었다.
평소에 늘 무심했던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할 말이 있다.”
“그래? 그럼 숙소로 갈래?”
은위군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이야기하지.”
“날이 꽤나 어두운데?”
“밝은 데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
그러고 보면 은위군은 숙소 입구 쪽 연등을 등지고 서 있었다.
발밑에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마치 소호와 은위군 사이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어디에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감이 좋은 너라면 이미 대충은 눈치채고 있을 테지?”
은위군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뚫어져라 응시하는 시선이 뜨거웠다.
소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을 뿐이다.
“감이 좋다니. 인정해 줘서 고맙긴 한데 틀렸어. 얼마 전에도 눈치 없게 굴어서 어떤 여자애가 화를 냈거든.”
“곤란하면 너스레를 떨면서 넘어가려 하는 건 여전하군.”
“내가?”
“그래. 나는 너를 계속 지켜봐 왔다. 환하게 웃으며 무산학관에 처음으로 입관했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어?”
소호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
은위군의 진지한 눈빛,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음. 그랬구나. 고맙다고 해야 하나?”
“왜 어색해하지?”
“…….”
“오랜 기간 너를 지켜봐 왔기에 나는 오늘 너와 대화해 보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의 정의감을 믿고 도박을 해 보기로 한 거다.”
소호는 은위군이 진심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은위군이 소호를 봐 온 만큼, 소호도 은위군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고독한 성격이지만, 그래도 성실한 친구였다.
실제로 말투만 거칠 뿐이지 무산학관이나 백호방에서 다 같이 해야 하는 일은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성적도 좋고, 교관들도 은위군을 가르치기 편한 학생이라 말하곤 했다. 조서인 다음이라고 할 정도로 늘 수련에 몰두하던 친구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진중한 얼굴로, 진심 어린 눈빛으로 이야기를 하는 게 거짓일 수 있다면 그는 대단한 배우이거나 악랄한 사기꾼일 것이다.
“나는 왕진이 싫다. 증오해. 단 일 각이라도 그놈이 만들어 낸 학관에서 숨 쉬고 먹고 자면서 살고 있다는 게 불쾌할 정도로.”
그는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함부로 내뱉었다.
정통제의 스승, 황실의 실세이자 동창의 수장이기도 한 왕진 태감을 욕하는 발언이라니.
깜짝 놀란 소호를 향해, 그는 한 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연등을 등지고 선 은위군의 몸이 반쯤 불빛 속에 드러났다. 그는 두 눈에 증오의 불길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소호는 조심스럽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원수.”
“……누구의?”
“나의 부모님, 나의 문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존경하는 형을 빼앗아 갔다.”
“……!”
즉, 왕진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다는 말이었다.
소호는 은위군의 감정을 감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해는 가능했다.
은위군의 상황에 본인을 대입해 보면 가능했다.
소호가 부모님과 은자촌의 가족들을 잃는다면?
대미미와 섭주해, 조서인을 잃는다면?
그건 상상도 하기 싫다.
광기와 절망만이 남아 일각일초가 지옥 같은 삶일 것이다.
“오늘 하오문에서 들었어. 황실 야장으로 있는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갑문의 혈족 계파를 추적해 보았다고.”
무겁게 흘러나오는 소호의 말에 은위군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기갑문의 마지막 문주였던 남도화에게는 직계 가족이 세 명이 있는데……. 그중 부모님은 기갑문이 해체되던 때에 돌아가셨고, 동생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그 동생의 이름이…….”
“그래. 그 동생의 이름이 남위군이다.”
은위군.
아니, 기갑문의 마지막 후예인 남위군은 서슬 퍼런 기세로 나직하게 자신의 본명을 밝혔다.
“매일이 지옥이었다. 어째서 우리 문파는 망했을까. 늘 그런 생각만 했다. 그때는 어렸지만, 거대한 대지에 뿌리를 박고 수많은 장인들과 도제들이 붐비던 뜨거웠던 시절의 기갑문을 나는 똑똑히 기억해. 그런데 그게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땅은 쪼개졌고, 전각은 불탔으며, 사람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찬란했던 기갑문의 비술들이 대부분 유실되었지.”
은위군의 목소리가 점점 열기를 띄었다.
“연단(鍊丹), 야공(冶工), 단조(鍛造).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그 마음을 네가 알까? 심지어 고작 말문이 트였던 시절에 본 게 다인 내가 이럴진대, 그 거대한 유산을 운용할 후계자로서 교육받던 형은 마음이 어땠을까?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남위군의 말은 너무나 절절해서 피가 맺혀 있는 것만 같았다.
“한때는 일흉대기라는 사람을 원망했다. 그가 기갑문 멸문의 단초를 제공했으니,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지. 형도……. 나를 성을 바꿔 숨겨 준 뒤 대천문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물에 빠진 자의 최후의 지푸라기 같았을 거다. 난 이해할 수 있어. 기갑문을 잃은 후 형은 오직 그것만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살아갔으니.”
소호는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흉대기.
대천문.
소호도 들어 본 적 있는 이름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랬던 형이 시신으로 돌아왔다. 참혹했어. 나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지. 처음엔 나도 대천문에 들어가려고 했다. 일흉대기가 내 형까지 죽였다고, 일흉대기를 숨겨 준 마을에 꼭 복수하겠다고 홀로 다짐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모든 건 왕진의 농간이었던 거다. 소림에서 그놈은 스스로 밝혔어. 대천문을 만든 것은 본인. 그걸 몰살시킨 것도 자신. 그제야 알았다. 그래, 일흉대기는 원흉이 아니다. 지나치게 뛰어난 게 무슨 잘못이야? 그걸로 트집을 잡아 기갑문을 갈가리 찢은 것은 황실이고, 결국 형을 죽인 것은 왕진인데!”
장소가 장소인 만큼 목소리를 낮추고 절제하고 있었으나, 잔뜩 격앙된 심정이 그대로 전달되어졌다.
소호는 감정적으로 압도되는 것을 느꼈다.
한 사람의 개인이 이렇게나 강렬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얼마 전에 마차 안에서 스스로 백린탄에 불을 붙여 활활 타오르던 사내가 떠올랐다.
스스로를 불태우는 겁화.
남위군에게서 느껴지는 건 바로 그런 뜨거운 불길이었다.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그자가 짓밟은 게 어떤 건지. 그가 그리도 두려워하며 갈가리 찢어 놓았던 기갑문의 힘으로, 끔찍한 고통 속에서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소호는 섬뜩한 살기가 활활 불타오르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래서 백검회에 들어간 거야?”
“그래.”
남위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나와 뜻이 같았으니까.”
“왕 태감에 대한 복수?”
“처절한. 끔찍한 복수.”
“그런가.”
소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위군에게는 왕진에게 마땅히 복수를 할 만한 이유가 있다.
거기에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걱정되고 이해가 안 되는 점은 남위군에 대한 것이다.
“네가 어린단검을 던질 때, 일부러 공격하는 척을 한 거였어?”
“그들에게는 어깨와 가슴에 철판을 대고 있으라고 했었지.”
“……많은 사람들이 다쳤어.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더욱 다칠 거야.”
“작은 희생이다.”
소호는 그날 다쳤던 문주희와 하오문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남위군이 담담하다는 것에 화가 났다.
“네 일에 무고한 사람들이 다친다면 네가 왕 태감과 뭐가 달라?”
“날 그자와 비교하지 마.”
처음으로 남위군이 소호를 향해 분노를 드러냈다.
“왜? 왕 태감도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다면서 기갑문을 짓밟았겠지. 네가 지금 하오문의 다친 사람들에게 작은 희생이라 말하듯이 말이야.”
“너……!”
“복수는 좋아. 하지만 수단은 정당해야 하지 않을까?”
남위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폭발하듯 더욱 강한 감정을 일으켰다.
“네가 뭘 알아? 진정으로 위험한 게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주제에! 상대는 황실의 실세다. 우리의 상대는 명 제국 전체나 다름없다고. 그런데 수단과 방법을 가려? 철없는 소리!”
남위군은 또래들과는 달랐다. 소호가 보기에는 어른들과 같았다.
항상 무력해하며 세상을 탓하는 어른들.
“내가 장담하는데 우린 우리의 의지를 알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거다! 희생? 하! 난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라고 한다면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거다. 왕진만 쓰러뜨릴 수 있다면!”
남위군은 씹어뱉듯이 말하며 두 눈을 번뜩였다.
소호는 침묵했다.
둘 사이에는 너무나 먼 간극이 있었다.
돌이키기에는 늦을 대로 늦어 버렸다.
“장소호. 철부지 천무공자.”
“위군…….”
“내가 왜 너에게 이런 말들을 다 했는 줄 아나?”
“왜지?”
“네가 그 마을 출신이기 때문이다.”
“……뭐?”
“일흉대기 광사로. 그가 살고 있는 마을. 은자촌이던가?”
소호는 놀란 심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남위군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것인가?
그리고, 그걸 알고 있다면 자신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네 마을이 나와 얽힌 은원. 그리고 내가 왕진에게 갖고 있는 복수심. 다 알았겠지? 내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야.”
소호는 남위군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마을에 대한 해코지?
아니다. 불가능하다.
거기엔 백검회가 아니라, 황실이 상대여도 물러서지 않을 괴물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마을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것?
그건 가능하다.
대천문 때문에 나름 마을의 명성도 유명해졌었다고 들었다.
지금이라도 정체가 들키면 귀찮아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다.
천무공자가 기인 이사들의 은거지인 은자촌 출신이다.
소문이 나면 큰 방향이 생길 거라고 섭주해는 늘 경고했었다.
“이건 경고다. 날 막으려 하지 마. 나를 막고 싶으면 그보다 뛰어난 이유를 들고 오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서 나를 막는다면…….”
소호는 오싹한 기분에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설 뻔한 것을 참았다.
남위군에게서 느껴지는 공기가 달라진 것이다.
살갗이 따끔따끔해지는 건 진기를 극도로 단련한 자 특유의 ‘무형기’를 사용하는 특징이었다.
“가만두지 않겠다.”
소호와 남위군의 시선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명확하게 말하지만 않았을 뿐 그 속내는 명확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모습.
절박한 심정으로 살기를 품은 남위군의 눈빛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가로막으면 죽일지도 모른다?’
소호는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래?”
소호의 단전에서 역근경 진기가 치솟아올랐다. 만 자가 넘는 역근경의 진리가 흥분한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혀 준다. 하지만 용맹한 심정은 그대로.
소호의 가슴속 의지가 단단하게 지탱되었다.
“위군, 나는 변하지 않아. 잘못된 점이 있다면 너를 말릴 거야.”
소호의 말에 남위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