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20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20)
“잘못된 선택을 하는군.”
“과연 그럴까?”
“네가 살던 ‘마을’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왕진이 너희 마을을 이용하려 했었는데 어째서 미워하질 않지?”
“…….”
“유준 때문인가?”
소호는 남위군이 유준과의 교류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
유준과 그들이 본 시간은 고작 신입생 때 일 년에 불과했다.
무산학관에 입관하던 시절부터 쭉 지켜봤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냐.”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감정이 있어서 한 행동이 아닌데 미워할 필요가 없지. 피해를 입었다면 되갚아 주면 될 뿐이야.”
“그런가. 매사에 모든 일이 그리 쉬워서 참 좋겠군.”
남위군은 분명히 빈정거리고 있었다.
그는 냉랭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마치 소호와 자신 사이에 선을 긋는 듯했다.
“천무공자 장소호.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나를, 아니 우리를 막지 마라. 왕진은 천벌을 받아야 한다.”
남위군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소호는 잠시 고민했지만 쫓아가지는 못했다.
마음속이 복잡했다.
어떤 행동이 옳은 것일까.
남위군을 막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조용히 지켜봐야 하는 것인가.
“이럴 때는…….”
소호는 발길을 돌렸다. 마음이 복잡하고 고민이 있을 때, 가야할 곳이 어딘지는 정해져 있었다.
***
“지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소호보다도 더 큰 키에 손가락과 팔다리가 길다. 붓을 잡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지만 검을 잡아도 이상할 것 같지는 않다.
얼굴은 여전히 하얀 편이었고 차분한 인상에 길게 묶어 뒤로 늘어뜨린 머리가 아주 잘 어울렸다.
약관의 청년이 된 섭주해는 마치 낙향한 문인 같았다.
회색 무복을 입었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에서 묘한 기품이 감돌았다.
어릴 때 병약해 보이던 인상도 많이 사라졌다. 며칠간 잠을 못잔 사람처럼 눈 밑이 검고 불안해 보이던 눈빛도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완전히 사라졌다.
무산학관에서 꾸준히 단련한 태극권과 양의심공 덕분이었다. 이제 상단전을 열고 균형 있게 정기신을 모두 단련한 섭주해는 안정적인 기도를 내뿜고 있었다.
너무 말라 호리호리한 체구가 그나마 단점이랄까.
문사로서는 흠잡을 데가 없지만, 허리에 찬 철 요대나 나무 검집에 담긴 손바닥만 한 단검 하나도 크게 보일 정도로 몸 선이 가는 것은 단점이었다.
“지켜보라고……? 그냥 가만히 두자는 이야기야?”
“네.”
소호는 친형제나 다름없는 섭주해에게 숨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습림관을 통과하는 동안 경험한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하오문이 부탁했던 일과 호광진인과의 신비한 만남, 백검회와 얽힌 일들.
그리고 남위군의 과거 이야기까지.
섭주해는 그 모든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별다른 동요 없이 담담하게 결론을 내린 것이다.
“어째서? 백검회는 위험해. 문주희가 다쳤어. 하오문 사람들도 많이 다쳤고. 화약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죽였었고, 우리가 호위하던 사람들도 모두 죽이려고 했어.”
“그랬군요.”
“무고한 사람들이 죽더라도 그냥 지켜봐야 하는 거야?”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예. 지켜보는 게 좋겠어요.”
“그래……?”
섭주해는 소호가 혼란스러워 보였는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위험부담이 너무 커요. 황실이 얽혀 있고, 화약과 백린을 가진 채 음모를 펼치는 백검회라는 단체가 엮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나라의 대사를 바꿀 만한 일이죠. 거기에 저희가 끼어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있어.”
“무슨 이유죠?”
“그들이 잘못됐기 때문이야.”
소호는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섭주해의 숙소로 걸어오는 동안 묵묵히 오랫동안 생각을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뭔가를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건 죄야. 구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구해야 해.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살고 싶어. 그게 협(俠) 아닐까?”
섭주해는 반박을 하지 않았으며, 그게 옳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소호를 응시하며 이어질 말들을 기다려 주었다. 소호가 내심을 정리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다.
“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마차 안에서 백린을 자신의 몸에 터뜨려서 불타는 사람을 봤어. 처음엔 놀랐어.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마교의 광신도들이나 살수들 말고도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태우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말이야.”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강렬한 열기, 체취, 고기가 타는 듯한 역한 냄새가 떠올랐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광소를 터뜨리면서 웃던 광기 어린 그 눈빛이다.
그 눈빛만큼은, 지금도 눈만 감으면 언제든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걸 보면서 난 어떤 감정에 압도된다는 게 뭔지 알 수 있었어. 그 후로 계속 생각했어.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도대체 왜? 무었을 위해? 누구를 위해서? 난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존경해. 하지만 이건 달라. 이건 방식이 잘못되었어.”
두서없이 이어지던 소호의 말이 단호하게 끝맺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섭주해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되물었다.
“예, 잘못되었지요.”
“그렇지?”
“하지만, 그 잘못을 왜 소호 형이 바로잡아야 하죠? 황실은요? 무림 강호의 수많은 문파와 무인들은요? 그들은 손을 놓고 있을까요?”
“……늦어.”
“예. 은위군, 아니, 남위군의 말대로라면 이번에도 백검회가 선수를 치겠네요. 내부에 남위군이라는 첩자가 있는 셈이니.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몰라도 분명히 다른 사람들보다 한발 앞서서 왕진을 공격할 수 있겠죠.”
섭주해의 말이 이어질수록 두 눈에서 총기가 번뜩였다.
“무산학관에서 왕 태감을 친다? 아아, 그러면 무산제전이군요. 왕 태감은 무산제전만큼은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관람하러 오니까요. 무산제전 때 공격하는 게 목표겠습니다. 그중 언제일까요? 아마, 무룡전을 구경할 때. 제가 백검회라면, 무산제전을 구경하던 왕진이 모든 대결이 끝나고 우승자를 축하할 때쯤. 그때를 노리겠네요. 방식은…… 그러고 보면 백검회는 화약과 백린을 갖고 있다고 했었죠. 왕진의 흑시군은 무림인들에게 강하니까요. 정면 대결로 싸우려고는 안 할 테니. 분명 화탄을 쓰겠네요.”
섭주해의 시선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앉아서 천 리를 본다.
마치 실과 실을 엮어서 커다란 자수를 놓듯이.
백검회. 그리고 남위군이 가진 계획을 직접 지켜보기라도 한 듯 차례차례 단서들을 거슬러 올라가 하나씩 알아내고 있었다.
마치 점쟁이의 점술을 보는 듯했다. 소호는 매번 느끼지만 신비한 광경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화탄을 터뜨려서 왕진을 죽이거나 다치게 만들 셈이에요. 그런데 한 가지 아귀가 안 맞는 부분이 있어요. 소호 형에게 단서를 알려 주고도 그냥 풀어 주었다?”
섭주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소호 형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거나, 소호 형이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없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아니면 둘 다겠네요.”
섭주해가 질문을 던지는 듯이 소호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내 정의감을 믿고 말한다는 이야기를 했어.”
“그랬군요. 하긴, 소호 형을 오랫동안 봐 왔으니까요. 어딘가에 밀고해서 은위군, 아니 남위군……. 이 이름은 입에 잘 안 붙네요. 남위군을 팔아먹을 사람은 아닐 거라 생각하겠죠.”
“팔아먹어……?”
소호는 잠시 생각해 보곤 섭주해의 말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네. 어딘가에 이야기가 흐르면 위군은 죽겠네.”
“저희도 위험해요.”
“그런가?”
소호는 배시시 웃었다.
섭주해도 마주 웃어 주었다.
“소호 형.”
“응.”
“어차피 가만히 안 있을 거죠?”
“그렇지.”
섭주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왕진이 공격당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소호 형은 어떻죠?”
“상관없다고 생각해.”
소호는 즉답했다.
“별다른 감정은 없어. 왕 태감은 복수당할 만한 행동을 했잖아?”
“그렇죠. 저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럼 남위군을 막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있어.”
소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왕진을 위해서 아니야. 남위군을 위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칠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무산제전이 화탄으로 망쳐져서야 되겠어?”
소호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육 년 넘게 다닌 무산학관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망가뜨리겠다? 그것도 진짜 화약이랑 백린을 터뜨려서 활활 태우겠다? 이게 납득이 되겠어?”
“하핫, 듣고 보니 그건 그러네요.”
“복수를 하고 싶으면 다른 방법으로, 다른 날 하라고 할 거야.”
“알겠어요. 그런 걸로 하죠.”
섭주해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는 긴 팔을 옆으로 뻗어 새하얀 종이를 한 장 집어 들었다. 양쪽으로 평평하게 펼쳐 서탁에 깔고 옥 벼루에 먹을 갈기 시작했다
시큼하면서 은은한 먹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섭주해는 정갈하고 꼿꼿한 자세로 먹을 갈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명심하세요.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요. 구하지 않고 외면한다고 한들, 그건 소호형의 책임이 아니에요.”
“알겠어.”
“진심이에요. 여기서 무리를 해서 다친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입니다.”
“조심할게.”
“범위는 학관 안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지 말고 그 안에서 움직여 주세요. 그리고 최종 목표는 무산제전을 무사히 끝내는 것. 왕진이나 백검회를 혼내 주는 게 목표가 아닙니다. 나머지는……. 제가 나름대로 알아보죠.”
소호는 배시시 웃었다.
“도와줄 거야?”
“휴우, 형을 잘못 만나서 늘 이게 무슨 일인지.”
“맛있는 거 사줄게!”
“운찬 삼촌 정도로 맛있는 집 아니면 안 먹어요.”
두 사람은 툭탁거리면서 웃었다.
무산학관 최고의 지략가와 천무공자가 힘을 합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몰랐다.
백검회와 황실의 싸움은 상상 이상으로 격렬하고 잔인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