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21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21)
황제란 무엇인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리기에 천자(天子)라고 하며, 그 힘과 권위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하여 명령을 내리면 천하를 움직인다.
한마디 말로 성벽을 짓기도 하고, 분노한 불호령 한 번으로 거대한 장원을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다.
그가 나라를 이끄는 대신들에게 인정을 받는 진정한 황제인가 아닌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보통 사람들로서는 평생 살면서 단 한 번도 실제로 볼 수 없는 하늘 위의 존재인 것만은 분명했다.
정통 구 년.
이제 약관의 나이가 된 정통제 주기진은 건장한 체구의 청년으로 자라났다.
이 땅에서 가장 좋은 재료로 최고의 숙수가 만들어 낸 음식을 매일 먹어 왔으니 몸이 장성하는 것도 당연했다.
육체뿐만이 아니다.
그는 대륙의 제왕으로서 명나라 최고의 교육 기관인 국자감의 교육을 모두 받았다.
대학사(大學士)들과 늘 담론하며 정무를 익혀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은 물론이고 설원(說苑), 율령(律令), 서수(書數)의 교육도 마쳤다.
하지만 책으로 익힌 지식과 양질의 식사와 무예로 단련한 건장한 육체가 사람의 인성까지 다듬어 주지는 않았다.
주기진은 느긋한 사람이었다.
혼탁한 듯 흐려진 눈빛, 얇고 가늘어 잔인해 보이는 입매는 여전했다.
“요즘은 조용한 것 같다. 나라에 큰일도 없고 사사건건 내가 하던 일에 반기를 드는 늙은 신하도 없고.”
톡. 톡.
옆에서 궁녀가 손질해서 건네주는 포도를 입으로 받아먹으며 정통제 주기진이 푹신한 황금 보료에 반쯤 몸을 묻었다.
“너무 조용하니까 심심할 정도로군. 이건 흑시군과 동창 덕분인가? 나라는 태평성대인 것인가?”
주기진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한 명의 환관이 우아하게 허리를 편 채 양손으로 찻잔을 잡고 앉아 있었다.
새하얗게 분칠을 한 얼굴에 붉은색 입술이 대조적으로 눈에 띄는 사내였다. 흰색과 검은색이 겹겹이 섞인 비단 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관모를 정갈하게 쓰고 있었다.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긴 하지만, 눈가의 주름이 그에게 관록을 더해 주었다.
명실상부한 황실의 이인자.
동창의 태감이자 흑시군을 움직일 수 있는 위험한 인물.
환관 왕진은 정통제를 보며 빙긋 웃었다.
“폐하의 영민하심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흥.”
주기진은 포도를 우물우물 씹다가 코웃음 쳤다.
“또 입바른 소리를 하는군. 우리는 평생을 봐 왔는데 늘 그리 격식을 차릴 건가?”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 소인의 충정을 알아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폐하. 흑시군과 동창의 창위들은 명 제국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지요.”
“그래. 너무 일들을 열심히 하는 모양이야. 정무 회의를 할 때 대신들이 긴장해서 부들부들 떠는 게 눈에 보이잖나?”
주기진은 다시 한 번 코웃음 친 뒤 느긋하게 몸을 뒤로 젖혔다.
황제다운 기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자세였다.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주기진은 황궁 천장에 보이는 화려한 문양들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툭 던지듯이 내뱉었다.
“양 재상은 어떻지? 아직도 병상에 있나?”
“예.”
왕진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노환에 토혈이 겹쳤다더군요. 어의 말로는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다고 하였답니다.”
“가는 건가.”
주기진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왕 태감, 나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얼떨결에 황제의 위(位)에 올랐던 그 때가 말이야. 주변에서 하나같이 아우성이었지. 황제가 될 자질이 있니 없니. 섭정을 하면 권력을 탐하는 자가 생긴다나 뭐래나.”
“예. 분명 그랬었지요.”
“그때부터 내 곁에서 섭정을 하며 돕던 양사기가 이렇게 가는가? 재작년엔 소황후가 떠나시더니. 이번엔 양사기라. 사람의 인생은 정말 무상하군.”
주기진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그의 유년 시절,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해 주던 태황태후 장씨(太皇太后 張氏)와 재상 양사기(楊士奇)가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어찌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로 천자가 되는 순간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양 재상은 왕 태감과 항상 의견이 부딪쳤었지. 아마 의견이 같은 적이 거의 없었을 걸? 그렇지 않나?”
“예, 폐하. 양 재상과 저는 생각이 많이 달랐었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딱 한 번 두 사람의 의견이 같았던 적이 있었어. 왕 태감은 그때가 언젠지 기억나나?”
“…….”
“동생인 기옥을 쫓아낼 때였지. 그땐 두 사람이 똑같이 황권에 위협이 된다고 했었거든? 그때는 너무 어려서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잘했던 것 같기도 하군.”
주기진은 무료해하던 기색을 떨치고 흥미를 드러냈다.
“지금이야 동창에 벌벌 떠는 사람들이지만 황위를 노려볼 만한 동생이 있다면 어쨌겠어? 거기에 다 달라붙어서 날 귀찮게 하지 않았겠나?”
주기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말로는 귀찮다고 하지만 마치 그럴 때의 상황을 상상하니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혼탁한 눈으로 입꼬리만 말아 올려 씩 웃는 그 모습을 왕진은 오랫동안 보아 왔다.
“기옥이 녀석. 이제 황권도 안정되었는데 다시 찾아서 한 번 데려와 볼까…….”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주기진에게서 은은하게 살기가 흘러나왔다.
왕진은 손안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어린 시절에 맨손으로 앵무새를 뭉개 죽일 때 저런 표정을 하곤 했었다.
“그날, 그 일에 대해서는 옳은 일이었기에 양 재상과 저의 의견도 일치했지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그런데?”
“조금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 그날의 전모를 아는 사람들은 저와 양 재상, 그리고 폐하 정도밖에 없지요.”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무실이지만 예외가 딱 한 명 있었다.
왕진은 찻잔을 한 모금 들이켠 뒤 그 ‘한 명’을 지그시 바라봤다.
포도를 까서 정통제의 입에 넣어 주던 궁녀였다.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숨도 못 쉬고 질려 버린 얼굴, 포도 껍질을 까던 섬섬옥수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음? 아, 아아.”
주기진의 반응은 늦었다.
포도를 까 주던 궁녀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한편, 궁녀는 주기진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실수를 하고 말았다.
주기진의 입에 포도를 넣어 주기 직전에 포도를 놓쳐 버린 것이다.
“아……!”
외마디 신음 소리와 함께 궁녀가 놓친 포도 과육이 주기진의 턱에 한 번 부딪친 뒤에 황금색 용포의 가슴팍에 턱하니 달라붙었다.
“…….”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사색이 된 궁녀는 뻣뻣하게 굳어진 듯하더니, 곧바로 사력을 다해 바닥에 엎드렸다.
“주, 주,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폐하.”
황실의 궁녀답게 꽤나 뛰어난 미색을 지녔음에도 바닥에 몸을 붙인 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은 비참할 정도로 초라했다.
주기진은 두툼한 손바닥으로 자신의 턱을 닦아 냈다. 끈적한 과즙이 손에 묻었다 가슴팍에 붙은 포도 과육을 손가락으로 집어 한 번 살펴본 뒤 옆으로 툭 던져 버렸다.
그는 번개처럼 일어나 궁녀의 머리채를 붙잡고 뺨을 후려쳤다.
“읍!”
궁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옆으로 넘어진 그녀의 목을 양손으로 조르는 주기진의 두 눈에선 살기와 광기가 번뜩였다.
“감히!”
“끄. 끄으…….”
궁녀에게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오고 두 눈에서 초점이 사라져 가는 그때였다.
“폐하.”
왕진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주기진을 불렀다.
“폐하. 고정하시지요. 황실의 법도대로 처리하면 될 일입니다. 궁녀의 실수 따위에 폐하께서 손을 더럽히셔야 되겠습니까?”
“후우, 후우.”
“대신들이 이 일로 떠들어 댈 것입니다.”
주기진은 궁녀의 몸을 뒤로 홱 밀어 버리고 숨을 씩씩거렸다.
왕진이 다가가 수건을 건네주자 그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박박 닦았다.
“천한 것이, 감히.”
싸늘하게 일갈한 주기진은 숨을 꺽꺽거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궁녀를 더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휙―.
왕진이 휘파람을 불자 밖에서 대기하던 금의위 두 사람이 예를 올리며 들어왔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던 궁녀를 양쪽에서 부축하며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하지요.”
“그렇게 해 주게.”
이제는 정말로 주기진과 왕진만이 남았다.
“용포를 갈아입어야겠다. 온몸이 끈적거리는 것 같아.”
“예. 목욕물을 준비시키겠습니다, 폐하.”
“아 참, 그건 어떻게 되어 가지? 백검인가, 그놈들 말이야.”
잔뜩 흥분한 탓일까.
주기진은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좌우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사실 얼마 전에 몇 명을 잡았는데…….”
“잡았다고? 다들 잡힐 만하면 자결한다고 하지 않았나?”
“후후, 이제 흑시군도 요령이 생겼는지 제압할 때 손발의 근맥부터 잘라 냈답니다. 그래서 잡을 수가 있었지요.”
“흥미롭군. 그래서? 그들이 뭔가를 실토했고?”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저 팔아서 자금을 모으기 위해 화약을 훔쳤다더군요. 말단이라 아는 게 없는 듯해서 더 조사 중이랍니다.”
“흐음.”
주기진은 불만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왕진은 걱정 말라는 듯이 나긋나긋하게 웃었다.
“폐하. 제가 폐하를 실망시켜 드린 적이 있던가요?”
“없었지. 왕 태감은 항상 나를 잘 보좌해 주었어.”
“감사한 말씀. 제가 다 처리할 것입니다. 정무로 바쁘신 천자께서 신경 쓰실 필요는 없는 일이지요.”
“그야 그렇겠지.”
주기진은 휘적휘적, 팔자걸음으로 걸었다.
“사신(四神)은? 내 황금 장수들은 언제 볼 수 있는 건가?”
“후훗, 조만간 첫 번째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기대되네. 왕 태감만 믿지.”
왕진은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주기진의 등을 향해 정중히 예를 올렸다.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왕진이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가 밖으로 빠져나가자 집무실을 지키던 금의위들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는데, 황제를 대할 때보다 더욱 긴장하는 듯이 보였다.
“목욕물을 준비해 드리거라. 후궁에도 알리고.”
“예.”
“잡혀 나온 궁녀는…… 엉뚱한 말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예.”
곁으로 다가온 환관 한 명이 종종 걸음으로 재빨리 주기진의 뒤를 따라갔다.
왕진은 그 길로 곧바로 궁 밖으로 빠져나온 뒤 검은색으로 칠한 마차에 올라탔다.
서찰이 잔뜩 쌓여 있는 마차 안에서는 진한 먹 내음이 났다.
“선, 도올과 혼돈은 준비가 되었지?”
“네.”
이제는 십 대 후반의 청년이 된 선은 여인처럼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라났다.
선은 왕진과 똑같이 백색과 흑색이 섞인 비단 관복을 입었다. 체형마저 비슷하여 뒤에서 보면 구별이 안 갈 정도다.
“도올은 마지막 단계를 넘긴 했는데, 성질이 너무 급해요. 전쟁터에 괜히 보낸 것 같아요. 왜구들과 싸우더니 나쁜 버릇이 들었네요.”
“그래? 어떤 점이 나쁘지?”
“성질이 난다 싶으면 앞뒤 안 가리고 돌격을 하네요.”
“후훗, 용맹한 건 그 나름대로 쓸 수 있지. 괜찮아.”
“혼돈은……. 아시다시피, 유능해요. 지금도 독자적으로 백검회를 쫓고 있어요.”
“좋아. 조사에 필요한 게 있다고 하면 전폭적으로 지지해 줘.”
“네.”
선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찰에 글을 쓰고, 다 쓴 서찰을 옆으로 넘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금은 충분한데 모산파에 들어가는 자금이 또 늘었어요.”
“얼마나?”
“항주 땅에 객잔 세 개는 충분히 지을 정도예요.”
“지원해 줘.”
“……네.”
선은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따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앞서 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도 무산제전에 가실 건가요?”
“가야지. 특히 올해는.”
“……위험할 것 같아요.”
“그렇겠지.”
왕진은 빙긋 웃었고, 선은 찌푸린 얼굴을 펴지 않았다.
“사흉은 강하지만 과신은 안 돼요.”
“선. 너는 나보다 기억력이 좋지만 사람을 다룰 줄은 모르는구나. 이럴 때일수록 윗사람은 태연하게 나서야 하는 법이야.”
왕진은 탁 하고 손바닥을 마주쳤다.
“백검회를 뿌리 뽑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