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97화 (326/686)

8권 22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22)

어두웠던 하늘에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무산학관에선 언제나 힘찬 기합 소리가 흘러나온다.

연무장에는 수석 교관을 제외한 모든 교관들과 삼백 명이 넘는 학관의 관도들이 모여 있었다. 무산학관의 관도라면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연무장으로 향해야만 한다. 모두가 눈을 뜨자마자 함께 태극권 수련을 하는 것은 무산학관 관도들에게는 상식이었다.

천 명이 들어와도 충분할 넓은 연무장은 무산학관 관도들의 강한 기세로 가득 찬 듯 보였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손동작이 위로 치솟을 때마다 우렁찬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핫!

연무장의 맨 뒤에서 기합성을 적당히 내지르며 몸을 움직이는 한 청년이 있었다.

오늘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흰색 무복도 입지 않았다. 무산학관 아이들이 가장 많이 입는 회색 무복을 입고, 머리도 영웅건 없이 수수하게 하나로 묶어 두니 잘 모르는 후배들은 소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소호의 얼굴을 잘 아는 몇 명만이 인사를 건네 왔다.

특히 조서인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네가 여길 왜 왔어?”

조서인은 타박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놀라서 되묻고 있었다.

“초심을 되찾을까하고?”

“……뭐라고?”

조서인은 조금도 믿어 주지 않았다.

의심스러운 듯했지만, 수련을 좋아하는 성격답게 묵묵히 태극권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역시 수련 바보.

철웅에 이어 수치의 칭호를 얻은 사람다웠다.

소호는 주변에 있는 학생들을 살폈다.

소호와 같은 졸업 예비생들은 태극권 수련에 거의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대부분 소호보다 후배들의 얼굴만 보였다.

사실 소호는 태극권 수련에 나올 생각이 없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학관을 졸업하는 데다가 곧 무산제전에 참가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침 태극권 수련에 빠지더라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내가 너무 나태해졌었나 보다.’

소호는 조금 반성했다.

매일 아침, 매일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이렇게나 많았다.

올해 처음으로 무산학관에 들어온 신입생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애써 찾을 필요도 없었다.

교관들과 제일 가까운 곳에서 제일 열심히 동작을 쫓아가는 아이들이 신입생들이다.

그다음 줄, 그리고 그다음 줄.

뒤쪽으로 갈수록 동작은 정확해졌지만 두 눈에서 내뿜는 열정은 반비례하듯 점점 사라져 갔다.

반쯤 자고 있는 것처럼 졸린 눈을 하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소호는 예전에 조서인과 남위군이 부딪쳐서 싸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저렇게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던 섭주해 때문에 두 사람이 부딪쳐서 싸우게 되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반쯤 졸고 있던 학생은 옆에 있던 친구와 부딪쳐서 주변의 눈총을 받고 말았다.

소호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는 지금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핫―.

다시 한 번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하앗―.”

소호는 적당히 기합성을 지르면서 몸을 우측으로 돌렸다.

사실 태극권에서 태극산수(太極散手)와 태극검(太極劍)의 무리(武理)까지 뽑아낸 소호는 태극권을 수련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리고 소호는 지금 이곳에 온 목적을 찾아냈다.

‘위군.’

놀랍게도 남위군은 연무장의 우측 구석에서 태극권을 수련하고 있었다.

명쾌하고 영리해 보이는 눈빛, 부스러기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외관을 정비한 채 정확한 동작으로 태극권을 시연하고 있었다.

“천무공자다.”

“진짜네. 천무공자야. 태극권을 시연하고 있어.”

“와아. 우리와는 뭔가 달라. 동작이 깨끗해.”

그때, 뒤쪽에서 소호와 가까이 있던 학생들 위주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호는 귀가 좋다.

소곤거리면서 하나둘 시선이 몰리기 시작하는 것을 명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소호에게로 화살처럼 날아왔다.

심지어 슬금슬금 소호의 주변으로 다가와 둘러싸기 시작했다.

‘남위군이 안 보이는데!’

어물쩍거리는 사이 남위군이랑 소호의 사이로 후배들이 파고들어서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런.”

어색하게 빙긋 웃는 호감의 표현들이 소호에게로 향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지금은 반갑지 않다.

결국 소호는 은위군을 시야에서 놓친 채로 태극권 수련을 끝마치고 말았다.

“그만. 여기까지.”

오늘도 성실한 무공 수련을 당부하는 황보 교관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었다. 소호는 수련 시간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후배들이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을 마구 보냈지만 소호는 애써 웃으면서 달래준 뒤 빠져나왔다.

남위군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소호는 묵묵히 뒤를 쫓아갔다.

미행은 미행인데 숨어서 하는 미행이 아니었다.

소호는 당당하게 따라갔다.

남위군은 연무장과 광장을 지나 무산학관의 북동쪽으로 향했다.

끝까지 쭉 올라가면 무산학관의 학관장인 철우의 거처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사신회의 모임 건물이 나오는 길이었다.

“어? 왼쪽에도 길이 있었어?”

남위군은 거기서 좌측으로 꺾었다.

울창하게 나무가 자라난 숲속으로 들어가서 오솔길을 걸어갔다.

“왜 나를 따라오지?”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공터까지 왔을 때 남위군은 비로소 소호와 마주 보았다.

차분한 눈빛.

검은색 수투를 낀 오른쪽 손이 반쯤 품 안에 들어가 있었다.

흐르는 분위기가 싸늘했다. 남위군은 언제든 단검을 던질 수 있는 분위기다.

소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딴청을 피웠다.

“지켜보고 있어야지.”

“네가 왜?”

“네가 죽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남위군은 소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듯했다.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짓더니 소호를 비웃었다.

“그래서 교관들에게 안 이른 거냐?”

“어.”

“오지랖도 너무 넓으면 병이지.”

“너는 내 무산학관 동기고, 오랜 시간 보아 온 친구야.”

“친구? 부끄럽고 유치하다. 더 이상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부탁이다.”

“그러면.”

소호는 솔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너는 왜 나한테 이야기한 거야?”

“……네가 앞으로의 일에 엮이면 안 되니까.”

“거봐, 비슷하네.”

소호가 빙긋 웃자 천하의 남위군이 입을 벌리며 굳어 버렸다.

“그거랑 그건 다르다.”

“비슷해.”

“장난치지 마라, 장소호.”

남위군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히 경고하겠다. 앞으로 내 일에 상관 마. 모른 척 평온하게 행동해라. 방해가 되지 말라고 미리 말해 준 건데 오히려 더 방해가 되겠군.”

“위군.”

“왜?”

“너야말로 말장난하지 마.”

소호의 표정이 달라졌다.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거기에 당당한 눈빛이 합쳐져서 자신만만한 기세를 만들어 냈다.

바람에 펄럭이는 소맷자락.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소호의 몸을 덩치보다 더욱 크게 만들어주었다.

“날 오랫동안 지켜봤다면서? 그런데 날 몰라? 네 생각엔 내가 너한테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했어?”

“…….”

“불의를 보고 듣고도 모른 척 가만히 있는다? 그건 장소호가 아니지.”

멍하니 듣고 있던 남위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도 그렇군.”

“몰랐던 척하지 마, 위군.”

“그래, 알고 있었지. 나도 알고 있었다. 네가 날 분명 가만히 안 둘 거라는 걸.”

남위군은 품에 반쯤 넣고 있던 손을 빼들었다.

검은색 수투의 손바닥 쪽에 가죽으로 만든 갈고리와 원형의 철판이 덧대어진 모습이 보였다.

어린단검을 더욱 빠르고 정확하게 쏘아낼 수 있는 특수한 수투였다.

물고기 비늘 모양 단검의 뒷부분을 자유롭게 탈착시킬 수 있는 가죽 고리와 튼튼한 철판은 단검을 던질 때에 마치 돌팔매질을 하듯 더욱 강력하게 쏘아 보낼 수 있는 역할을 했다.

그 어린단검 투척술에 있어서 무산학관 최강자가 눈앞에 있다.

사천 당문의 후계자인 당자강보다도 한 수 위의 암기술을 가진 청년.

사천 당문에서 온 교관들로부터 유일하게 암기 및 투척술 만점을 받았던 인물이 바로 남위군이었다.

“아무래도 말로는 안 되겠군.”

남위군의 눈빛이 바뀌었다.

싸늘한 기세.

검은색 수투로 은색 어린단검을 꺼내 들었다.

꾸욱―.

소호는 주먹을 움켜쥔 채 양손을 들어 올렸다.

왼손은 살짝 손을 펴서 반장(半掌)의 자세를 갖췄다.

“그래. 우리는 무인(武人)이잖아.”

소호는 도발적으로 손을 까딱거렸다.

“와 봐.”

쒜에에엑―.

은색 빛살이 미간으로 날아왔다.

***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어두운 목조 건물 안에서 조용히 흘러나왔다.

한 사내가 지금 막 나무로 된 상자 뒤로 뛰어든 참이었다. 그는 극도로 긴장한 채 누군가를 경계했다.

하얀 가면을 쓰고 온몸을 검은색 무복으로 가렸지만, 그럼에도 공포에 질린 눈빛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괴물 같은 놈…….”

가면 사내는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질긴 재질의 가죽 주머니가 그의 목숨 줄처럼 느껴졌다.

이 안에 있는 산공독이 그를 위험에서 구해 줄 것이다.

오로지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지금 절박하게 몰려 있었다.

언제 던져야 할까?

오로지 그 생각만을 반복하며 그는 목조 건물의 하나뿐인 입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두운 건물 너머, 밝은 불빛이 마치 하늘의 인도인 것처럼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후우. 후우.”

귓가엔 그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콧등에서는 흘러내린 땀이 방울져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나무 벽이 터져 나갔다.

콰아앙―.

“……!”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충격이 가면 사내를 덮쳤다.

벽을 뚫고 뛰어 들어온 건 턱수염을 짧게 기른 젊은 사내였다.

갈색 무복을 입었고, 그 위에 회색 장포를 걸쳤다.

강렬한 기세, 온몸으로 뿜어지는 내공이 강렬했다.

장난기 많아 보이는 얼굴이지만 두 눈에서 비치는 광기 어린 살기는 무시무시하다.

진구.

적룡기마대의 막내이자, 지금은 무산학관의 차기 수석교관으로 거론되고 있는 ‘실전 무학’의 교관이다.

진구가 강인한 오른손을 창처럼 세워 앞으로 내찔렀다. 가면 사내가 한껏 고개를 젖혀 피해 보지만 진구의 손끝이 가면에 닿았다.

툭.

가면에 닿는 순간, 진구는 손바닥을 펼쳐 가면 사내의 얼굴을 붙잡았다.

빠직―.

“쿠왁!”

일격에 가면은 박살 났고, 그 파편이 얼굴에 박혀 들었다.

찢겨진 얼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래도 그는 가죽 주머니를 던지려고 했다.

동귀어진의 한 수.

같이 산공독을 들이마시더라도 던지겠다는 일념이다.

턱.

“끄으으.”

하지만 실전 경험이 많은 진구를 상대로는 동귀어진의 한 수 조차 사치였다.

공격은 막혔고, 가면 사내의 손목은 진구의 손에 붙잡혀 제압당했다.

우드득―.

붙잡힌 손목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산공독이 들어 있던 가죽 주머니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한 채 바닥에 툭 떨어졌다.

가면 사내는 혀를 깨물거나 입속에 숨겨 둔 암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진구는 모든 방식을 알고 있었다.

백검회와 싸운 게 지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해 봐. 무산학관에서 너희가 하려는 일이 뭐야?”

“끄으.”

“말 안 할 거야?”

쉭―.

대답 대신 발을 이용한 퇴법이 날아왔다.

진구는 쿵― 하고 강하게 진각을 내딛은 채 ‘한 박자’ 빠르게 가면 사내의 얼굴을 뒤로 밀어 버렸다.

후웅―.

가면 사내가 차 낸 각법은 중심축이 흔들리면서 진구가 아니라 진구의 머리 위만 스치고 지나갔다.

파라락―.

퇴법이 빗나갔다 싶은 순간, 가면 사내는 좌수로 검을 거꾸로 뽑아 들고 위로 쳐올렸다.

날카로운 예기가 위로 솟구친다.

진구는 잠시 가면 사내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몸을 뒤로 젖혔다.

쉬이익―.

찔러 오는 검격.

고고한 동작에서 매화향이 나는 듯했다.

“하!”

진구는 찔러 오는 칼로부터 종이 한 장 만큼의 틈만 남긴 채 곧바로 다시 앞으로 손을 뻗었다.

“……!”

가면 사내는 속수무책으로 다시 얼굴을 붙잡혔다.

진구의 첨격(尖擊)이 상상 이상으로 빨랐던 탓이다.

진구는 얼굴을 손으로 붙잡은 그 상태 그대로 가면 사내를 바닥에 메다꽂았다.

“컥.”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진구는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의 눈과 눈을 맞대고 진지하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멍청하고 세뇌당한 불쌍한 놈아. 이번에 대답 안 하면 동창에 넘겨 버릴 거다. 동창에 넘겨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크큭.”

“말해 봐. 이번에 노리는 게 뭐야?”

가면 사내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얼굴은 피투성이지만 두 눈은 여전히 살기를 띈 채 물러서지 않았다.

진구는 두 번 묻지 않았다.

“그래. 그럼.”

꽈앙―.

나무 바닥이 움푹 패고, 가면 사내로부터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진구는 묵묵히 손을 털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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