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23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23)
“진구 교관!”
목조 건물의 입구를 통해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성숙한 여인이 나타났다.
진구와 같은 무산학관의 연홍 교관이었다.
그녀 또한 전투를 치른 듯, 머리는 헝클어졌고 연한 적색 무복에는 핏물이 튀어 있었다.
그녀는 진구가 이미 적을 제압한 것을 확인한 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세검을 등 뒤의 검집에 집어넣었다.
“두목은 잡았어요?”
“잡았습니다.”
“정보는요?”
진구는 고개를 저었다.
“말 안 해요.”
“……독하네요.”
“눈빛이 저 멀리 북방 초원에 사는 어떤 친위대 놈들이랑 똑같아요. 이런 놈들은 절대로 정보를 누설하지 않죠.”
진구는 드물게 심각한 얼굴로 정신을 잃은 가면 사내를 내려다봤다.
연홍 교관이 그런 진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다친 덴 없어요?”
“지금 저 걱정해 주는 겁니까? 저녁 약속 잡을까요? 뭐 먹을래요?”
“같은 교관으로서 묻는 거예요. 꼭 그렇게 앞서가더라. 걱정한 보람이 없네.”
“고마워서 그렇죠.”
“솔직히 말해 봐요. 여자랑 오래 만난 적이 없죠?”
“어떻게 알았어요? 그런 것도 보면 보이나?”
“척 보면 알아요. 눈치 없는 게 딱 여자들이 오래 못 만날 성격이네.”
연홍 교관이 새침하게 면박을 줘도 진구는 그저 즐겁게 웃을 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말만 들으면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동은 정반대였다.
진구는 가면 사내의 몸을 뒤졌고, 연홍은 검 손잡이를 잡은 채 주변을 경계하며 목조 건물 안을 샅샅이 살폈다.
“특별한 건 없네요.”
“맞아요. 그만 내려갑시다.”
“이 사람들은 동창에 넘길 거죠?”
“…….”
“진구 교관?”
진구는 잠시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넘겨야죠. 넘겨야 하긴 한데.”
“뭘 걱정하는 거죠?”
“넘겨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서요. 이놈들, 보통이 아니에요.”
“그렇게 느꼈나요? 무공은 별거 없었잖아요? 물론, 약하진 않았지만…….”
“강하지도 않았죠.”
진구와 연홍은 같은 느낌을 공유했다.
“맞아요. 뛰어난 무공을 익히긴 했는데 기간이 얼마 안 된 느낌이었어요. 이렇게 말하니 무산학관 신입생들 같네요.”
연홍은 흐트러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정리했다.
진구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맞습니다. 정확한 비유네요.”
“그런데 이들이 위협적으로 보였다고요?”
“무공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공 하나 모르는 필부도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요. 저는 예전에 그런 일들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이렇게 수하들을 세뇌시킨 집단은 위험해요.”
“어떻게 위험하죠? 목숨을 걸고 암살을 한다든가 그런가요?”
“예. 그런 종류일 겁니다. 낙양 땅에 숨어 있는 백검회. 목숨 걸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놈들이 꾸미는 음모라니…….”
진구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연스레 몸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번 사건은 진구에게 특별했다.
습림관 방해 사건을 계기로 가면철왕 철우가 처음으로 진구에게 전권을 맡긴 일이었다. 하오문에서는 무산학관의 대표로 진구가 나와 있다고 생각할 정도다.
거기다가 이번 일에 휘말린 게 누구던가.
다름 아닌 그의 절친한 조카 소호가 걸려 있었다. 목숨을 걸고 조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연홍은 그런 진구의 모습을 옆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툭 던지듯이 내뱉었다.
“하오문에 넘기죠.”
“하오문?”
진구가 미간을 좁혔다.
“거기에 넘긴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있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우리가 넘긴 건 아니니까요.”
“아…….”
“때론 그런 편법도 써야 하는 법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바에는 남에게 떠넘겨야죠. 하오문이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현명한 결정을 할지도 모르고요. 그사이에 새로운 게 나올 수도 있죠.”
연홍은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영리하게 살아야죠.”
“하핫, 그렇죠.”
“가요. 우린 내일 수업도 있잖아요.”
연홍이 먼저 휙 하니 몸을 돌려 나가 버리고 그 뒤를 진구가 따랐다.
“연홍 교관.”
“왜요?”
“정말로 같이 식사 한 번 안 할래요?”
“생각해 볼게요.”
차가운 듯하면서도 여지를 주는 그녀의 말에 진구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지 않은가.
정말로 이길 수 없는 여인이었다.
“반한 게 죄지.”
진구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
소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육각형의 단검이 붙잡혀 있었다.
지잉―.
검 날이 부르르 떨려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단검에 실려 있던 내력이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탓이다.
은빛 섬광을 내뿜으며 날아온 단검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랐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잠시라도 방심했다면 이미 단검이 미간에 박혀 있었을 것 같았다.
“미간을 노리는 건 너무한 거 아냐?”
“건방떨지 마, 장소호.”
쉭―.
섬뜩한 소리와 함께 어린단검이 한 번 더 날아왔다.
이번엔 다리.
소호는 부드럽게 왼발을 뒤로 빼서 단검을 피했다. 날아온 단검은 흙속에 푹 박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남위군의 기세가 점점 더 강해졌다
“목숨 걸고 덤벼라. 안 그러면 죽어.”
암기술은 일수일비(一手一飛)를 기본으로 한다.
화살도 검으로 쳐 내는 무림인들끼리의 싸움에서 어설프게 숫자만 많은 것은 아무런 위협도 안 되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도 일반적인 경지의 이야기일 뿐.
일수일비가 경지에 오르면 이제는 한 번에 날릴 수 있는 숫자가 다시 중요해진다.
무산학관에서 가르친 암기술은 일수육비(一手六飛)까지.
검지에서 약지까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단검을 끼워서 날릴 수 있는 숫자가 여섯 개가 한계이기 때문이었다.
끼긱―.
철컹.
그런데 남위군은 이상한 소리가 나는 수투를 양손에 끼웠다.
재질은 철편과 기이한 도구를 섞어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전체적인 형상은 둥그런 모양이다. 검은색 반구형의 철 수투가 남위군의 손등 위를 덮고 있었다.
“스읍―.”
남위군은 입술을 얇게 벌리더니 숨을 짧고 강하게 들이마셨다.
배 속에 공기가 가득 들어차 복부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남위군은 오른발을 땅에 내딛고, 동시에 오른쪽 손을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쳐올렸다.
피슈슈슉―.
“……!”
소호는 진심으로 놀랐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한 손에서 여섯 개의 단검이 날아온 것이다.
일수육비라고는 하지만, 이건 양손으로 여섯 개가 아니라 한손으로 여섯 개다.
소호는 순간 눈앞이 단검으로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파라락―.
쉬익―.
소호는 땅에 닿을 것처럼 몸을 낮췄다가 튕기듯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여섯 줄기의 은빛 섬광이 소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파바바박―.
조그마한 단검이 나무에 박히는데 도끼질을 하는 것처럼 큰 소리가 났다.
소호는 남위군을 향해 달렸다.
거리를 주면 안 된다.
남위군은 이번엔 왼발로 진각을 밟으며 아래에서 위로 손을 올려치고 있었다.
번뜩이는 은색 섬광.
피슈슉―.
“흡!”
여섯 줄기의 잔상이 소호의 미간을 포함해 전신의 요혈을 노렸다.
소호는 아지랑이처럼 움직였다.
상체를 불규칙하게 비틀면서 축지법을 쓰듯 상대방의 사각을 노리고 이동하는 신법이다.
살수계의 전설, 묵신의 신법이다.
세월이 흘러 더욱 완숙해진 무공으로 소호는 남위군의 좌측 사각지대를 파고들었다.
‘이번엔 보였어!’
소호는 남위군이 손에 끼운 수투가 발사 직전에 손가락 하나 당 단검을 두 개씩 잡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검을 던지는 순간, 수투에 장착된 철편이 팍― 하고 튕기며 날아가는 단검에 힘을 더 가해 주었다.
손에 기관 진식을 심은 듯한 놀라운 방식.
기갑문의 힘이 돋보였다.
파바박―.
날아간 단검들이 땅바닥에 박히는 소리는 그 뒤에 들렸다.
소호의 손이 남위군의 겨드랑이와 무릎 쪽을 향했다.
예전에 백검회의 무인들을 제압했던 태극권의 한 수다.
딱!
“……!”
그런데 남위군의 태극권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추장(錐掌)의 형태로 손바닥을 세운 채 소호의 공격을 정확하게 막아 냈다.
팟! 투툭! 퍽!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강맹한 장법이 똑같은 방식으로 순식간에 십여 번이나 교차했다.
손바닥이 거의 달라붙은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손을 섞으며 서로 태극권 실력을 겨루다가, 두 사람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훌쩍 뒤로 물러섰다.
“쉽지 않네, 위군. 역시 무산학관 출신이야.”
“쓸데없는 소리.”
출신 무공은 달라도 지금껏 보고 배워 온 것이 같으니 태극권 같은 기본공은 서로의 수법을 훤히 꿰고 있었다.
이걸로는 승부가 안 난다.
그것을 깨달았는지, 남위군이 먼저 무산학관에서 배우지 않은 무공을 썼다.
화아악―.
남위군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뿜어지는 기파.
내공을 한껏 끌어 올렸는지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무형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팡!
남위군은 야생 짐승처럼 네 발로 기는 듯한 움직임으로 자세를 낮춘 채 달려들었다.
여전히 태극권으로 제압하려 드는 소호의 공격을 피하면서 바닥을 휩쓸듯이 몸을 한 바퀴 회전했다.
“……!”
소호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예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남위군이 앞으로 쭉 팔을 뻗으면서 손등과 손등을 깡! 소리가 나게 서로 부딪쳤다.
금강여래상을 보는 듯했다.
양손의 잔상이 수십 개로 늘어나며 금나수 같은 손놀림으로 소호의 옷자락을 잡아채려 들었다.
‘세 치 반.’
소호는 뛰어난 감각을 발휘해 모든 공격을 피해 내며 뒤로 몸을 날렸다.
코앞에서 남위군의 검은색 수투가 지나갔다.
그 순간.
까앙!
“……!”
기다렸다는 듯이 남위군이 손등을 뒤집더니, 왼손 손등으로 오른쪽 손등을 후려쳐 그 반동으로 소호의 팔을 강하게 가격해 버렸다.
마치 돌을 던져서 돌을 밀어 내는 듯한 모양새였다.
특이한 무공이다.
튕기듯이 날아간 주먹이 소호를 처음으로 가격하는 데 성공했다.
“아야야.”
소호는 얼얼한 팔을 붙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기세를 잡은 남위군은 소호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휙― 하니 몸을 낮추는가 싶더니 분명히 땅을 짚었는데, 손등과 손등을 다시 부딪쳐서 이번에는 소호의 다리를 노렸다.
후웅―.
소호는 위로 뛰어올라 공격을 피해 냈다.
양손으로 땅을 짚는 남위군.
그가 검지를 꺾어 기묘한 수인을 맺으니, 손등에서 펑! 하는 폭약 소리가 터져 나오며 불꽃이 소호를 향해 솟구쳤다.
“우왓?”
상상할 수 없는 공격.
소호가 입고 있던 무복이 검게 그을릴 정도로 수투에서 뿜어진 불꽃은 생각보다 화력이 강했다.
“마라폭권(魔羅爆拳).”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남위군의 목소리가 그가 사용하는 무공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아직 꺼지지 않고 펑펑 화염을 터뜨리는 양손의 수투가 눈을 현혹시키며 빠른 속도로 권격을 내뿜었다.
어째서 무공의 이름에 ‘마라’가 들어가는지 알 것 같았다.
불꽃에 휘감긴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화 속의 한 장면 같다.
소호는 재빠르게 움직이며 항상 반 박자 빠르게 남위군의 공격을 피해 냈다.
불꽃 때문에 거리감을 재기가 어려웠지만, 각법으로 거리를 벌리면서 문제는 해결했다.
퍽―.
가죽 주머니를 터뜨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남위군이 옆구리를 손으로 감싼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대로 소호의 몸이 허공에서 반 바퀴 회전했다.
그림으로 그린 듯 매끄러운 원앙각 일격이었다.
허리를 회전시켜 힘을 더한 각법이 남위군의 목덜미를 내리찍듯이 걷어찼다.
“큭!”
남위군은 비틀거리긴 했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오히려 눈빛이 더욱 독해졌을 뿐이다.
남위군이 상상 이상으로 잘 싸우긴 했지만, 그래도 맨손 박투에서 소호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제길, 난 결투를 하는 게 아냐. 흑시군만 싸움에 강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겠다.”
남위군은 결심을 한 듯 손뼉을 팡!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그 뒤에 내뻗은 정권 일격은 소호의 얼굴 근처로도 오지 못했다.
그런데.
퍼펑―.
“윽?”
남위군의 수투에서 흰색 가루가 뿜어져 나와 뿌연 연기를 만들어 냈다
“큽!”
소호는 곧바로 숨을 멈췄지만 완전히 피해 내는 것은 무리였다.
콧속이 따끔따끔하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상한 음식을 먹고 토하고 싶어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몸속 단전의 내력이 울렁거리면서 소호의 말을 듣지 않고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소호는 충혈된 눈으로 정면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