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24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24)
남위군은 어느새 연기의 사정권 너머로 훌쩍 물러나 있었다.
수투가 숨을 막아 주는 역할도 하는 것일까? 왼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연기가 새어 들어가지 않는 듯 보였다.
냉랭하면서 열기가 깃든 눈빛이 소호를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바라보는 눈빛과 비슷했다.
‘치사하게!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소호는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근거리는 가슴.
단전에서 내공이 울렁거리면서 날뛰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남위군은 생각보다 신법이 뛰어났다.
한 발만 들고 뒤로 뛰었을 뿐인데 훨훨 날 듯이 물러났다.
소호는 발목의 방향이나 내공의 흐름을 통해 남위군이 사천 당문의 신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챘다.
남위군은 소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양옆으로 단검을 하나씩 던졌다.
퍼퍽―.
철컹! 피슉―.
단검이 나무에 꽂히는 순간, 기관 장치를 작동시킨 듯 강한 격철음과 함께 화살이 하나 날아가 반대쪽 다른 나무에 깊게 박혔다.
휘리릭―.
화살의 뒤쪽에는 손가락 두 개만 한 굵기의 새끼줄이 매달려 있었다.
화살이 날아가 박힌 곳에서부터 처음에 남위군이 단검을 던진 곳까지.
나무와 나무 사이가 새끼줄로 팽팽하게 연결되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화살을 맞은 나무에선 다시 두 개의 화살이 날아갔다.
좌, 우.
각각 다른 두 개의 나무를 향해 새끼줄이 매달린 화살이 날아가 박히고, 또 그 나무에선 각각 두 개의 화살이 날아가 다른 나무에 박혔다.
한 개의 단검이 두 개의 화살을 날리고, 두 개의 화살이 네 개의 화살을 날리는 구조다.
소호는 기관 진식의 위력을 새삼 알게 되었다.
시끄럽게 화살이 날아다니는가 싶더니 어느새 모든 게 끝나 버렸다. 정신 차려 보니 소호는 감옥에 갇힌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주변 삼 장 정도의 공간만을 남겨둔 채 나무와 나무 사이가 새끼줄로 얽혀서 사방을 둘러싼 탓이다.
후방과 좌측, 우측 어디에도 퇴로는 없었다.
‘여기에 함정을 파 뒀었구나. 빨리 뚫고 나가야 해.’
손가락 두 개 굵기의 새끼줄 따위가 위협이 될 리 만무하지만 상대가 같은 무산학관 출신의 만만치 않은 젊은 영재라는 점이 문제였다.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소호는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두 사람.
남위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단검을 날렸다.
날아오는 은빛 광선은 세 개.
셋 다 화살보다 빠르다.
고개를 먼저 옆으로 돌리고, 그다음 목과 어깨를 비틀자 소호의 육체가 비스듬하게 나선형을 그렸다.
단검은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피슈슉―.
섬뜩한 파공음은 덤이다.
소호는 드디어 남위군의 몸에 손이 닿을 수 있었다.
소맷자락을 꽉 붙잡고 그대로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탁!
은위군은 수투를 낀 손으로 소호의 손을 강하게 쳐 냈다.
소호는 힘을 거스르지 않고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듯 팔을 돌려 이번에는 아래쪽에서 위로 궁보추장의 한 수를 내뻗었다.
굽이굽이 끊김이 없는 부드러운 몸놀림.
또다시 태극권의 일격이다.
남위군이 지겹지도 않냐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깔보는 눈빛.
실망이 가득해 보였다.
“합!”
소호는 빙긋 웃으면서 그대로 계속 손을 뻗었다.
그런데 태극권의 투로를 지키던 소호의 장법이 묘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어느새 주먹질을 하는 산타로 전환되었다.
태극산수(太極散手)!
태극권의 무리(武理)를 완전히 이해한 소호가 지금 막 만들어 낸 즉흥적인 무공이었다.
남위군은 깜짝 놀라면서 오른손만으로 막아 보려 애썼다.
하지만 전력을 다한 박투 싸움에서도 안 되던 게 한 손으로 막아질 리가 없을 터.
심지어 소호의 주먹질엔 태극권의 신묘한 기의 흐름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위군이 공격을 쳐 낼 때마다 강한 힘은 옆으로 휘어졌고 소호의 주먹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방어를 뚫고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소호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한층 더 빠르게 움직였다.
박자와 박자가 쪼개지고, 호흡이 둘 이상 쪼개지며 한 박자가 빨라졌다.
파바바박!
“……!”
허둥지둥 물러나던 남위군의 움직임이 파탄이 났다.
몸의 균형은 깨졌고 무공의 오묘한 이치와 강인한 내력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저 막는 데 급급한 남위군의 방어를 뚫고 소호의 주먹이 남위군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남위군이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소호는 주먹 끝에 힘을 집중했다.
쩌엉―.
“쩡?”
소호가 눈살을 팍 찌푸렸다.
주먹의 감촉이 예상했던 것과 달랐던 탓이다.
자세히 보니 남위군의 복부에는 얇은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물고기 비늘처럼 엮여 있는 어린단검도 보였다.
소호가 주먹을 뒤로 빼자 어린단검 몇 개가 옷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소호는 그제야 이해했다.
철판과 어린단검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으니, 어찌 권법만으로 충격을 줄 수 있겠는가.
“쿨럭, 쿨럭. 큭, 이 자식.”
다행히 충격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남위군은 입과 코를 막고 있던 손을 떼어낸 채 기침을 쿨럭거렸다.
그 와중에 살기가 번뜩였다.
소호는 곧바로 몸을 옆으로 뒤집었다. 마치 강물에서 뛰어오르는 잉어 같았다.
힘차게 몸을 뒤튼 소호의 곁으로 날카로운 어린단검이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쳇.”
벌떡 일어선 남위군이 다시 단검을 던져 대기 시작했다.
소호는 빠르게 움직였다.
잔상이 남을 정도의 움직임으로 날아오는 단검들을 피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산공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남위군이 원망하듯 소리쳤다.
“어째서 산공독이 효과가 없는 거지!”
발악하듯 던져 대는 단검에선 공포마저 느껴질 정도다.
마보자세를 취한 남위군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는 수투를 낀 양손을 교차시켜서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싸늘한 눈빛이 번뜩였다.
남위군의 주변에서 타오르던 무형기가 점점 내부로 수습되기 시작했다.
“……!”
소호는 정면에서 달려들려던 마음을 바꿨다.
뇌리를 스치는 예감을 믿고 제자리에 급히 멈춰선 뒤 정반대로 몸을 띄웠다.
남위군이 마라폭권을 사용할 때와는 정반대의 느낌이다.
소호와 남위군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남위군은 검집 속의 명검을 뽑듯, 양손을 품 안에서 뽑아들었다.
끼릭―!
피슈슈슈슉―.
“……!”
쇳덩이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남위군은 마치 팔이 서른여섯 개로 늘어난 듯한 모습으로 양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소호는 눈앞이 온통 은색으로 뒤덮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호수에서 본 물고기 떼를 보는 듯했다.
먹이를 향해 우르르 몰려드는 물고기 떼처럼 은위군의 손에서 쏟아져 나온 어린단검 수십 개가 소호를 쫓아왔다.
한 발만 더 앞으로 나갔어도 다 막아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밧줄이 거슬려……!’
멀리 도망쳐서 피해 내는 선택지는 없었다. 소호는 이런 함정을 파놓은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소호는 숨을 멈춘 채 극도로 집중했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듯했다. 주변에서 하나둘씩 색깔이 사라져 간다. 흑백의 영역, 초절정의 경지에 잠시 발을 들여놓았다.
빗발치듯 쏟아지는 단검의 폭풍 속에서 소호는 춤을 추듯 움직였다.
때로는 쳐 내고, 때로는 피해 냈다.
소호는 그저 눈앞에 닥치는 모든 공격들을 상대로 최선의 선택을 했다.
소호의 손과 팔, 다리에 생채기가 남기 시작했다.
영원에 가까운 찰나가 지나갔다.
소호는 남위군으로부터 세 발짝 앞의 정면에 서 있었다.
근처 주변은 온통 은색이다.
소호가 튕겨 낸 어린단검이 바닥에 박혀 있는 탓이다.
“이런 괴물이……!”
남위군은 감탄인지 공포인지 모를 감정을 담아 중얼거렸다.
소호는 몸을 낮추고 제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남위군의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온 소호가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단검을 던지려는 남위군의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펑―.
또다시 수투에서 하얀 가루가 뿜어져 나왔다.
이번엔 정통으로 맞아서 소호의 얼굴이 하얗게 분칠을 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왕 내친걸음이다.
소호는 개의치 않았다.
남위군이 반격을 가하기 위해 손을 꺾으려 들었지만, 신묘한 손놀림으로 남위군의 오른쪽 어깨 부근 견정혈을 제압했다.
“큭?”
견정혈은 어깨의 중심.
제압당하면 팔과 어깨 전체가 마비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치명적인 혈도였다.
결국 남위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팔과 어깨를 제압한 소호는 땅바닥에 턱을 대고 처박힌 남위군을 그 자세 그대로 바닥으로 짓눌렀다.
‘부었네.’
가까이에서 보니 소호가 원앙각으로 내리찍었던 남위군의 목덜미는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때 이미 정신이 아득했을 텐데 여기까지 싸우다니.
무인으로서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목표를 향한 집요한 의지가 없었다면 쓰러져도 진작 쓰러졌을 싸움이지 않은가.
“도대체…… 왜…… 산공독이 안 듣는 거지? 널 정면에서 이길 방법은 없는 건가?”
남위군은 억울한 듯 보였다.
소호를 바라보는 눈길에,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보듯 생경한 감정이 담겼다.
“무슨 소리야. 퉤! 산공독은 다 통했어.”
“뭐?”
“온몸이 얼얼하네. 손에 내공이 들어가질 않아.”
“……!”
그 순간 남위군은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듯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호를 쳐다보던 그는 그제야 소호가 입 속에 들어간 산공독 때문에 침을 뱉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날 이길 방법이 왜 없겠어. 예전에 나도 다른 사람한테 진 적도 있는데.”
소호는 무룡전에서 유준과 겨뤘던 기억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산공독이 통했다고……?”
남위군은 모든 내공을 다 끌어올려서 반격을 가해 보려 했지만, 전신에 아무런 힘도 들어가질 않았다.
방금 전에 산공독을 뿜으면서 남위군도 그 일부를 들이마셨기 때문이었다.
겨우 한 모금.
아니 반 모금 정도 마셨음에도 속이 울렁거리고 내공이 말을 안 들어서 토할 것만 같았다.
“이러고도 움직였단 말인가.”
남위군은 방금 전 두 사람의 싸움을 머릿속에서 복기해 보았다.
그는 온몸에 흰 가루를 뒤집어쓴 채 씩 웃고 있는 소호를 멍하니 바라봤다.
“넌…….”
“어?”
“넌 괴물이군. 요괴인가, 사람인가.”
“그런 말 어릴 적에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쨌거나 내가 지는 건 싫어해서.”
소호는 남위군을 제압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밧줄 위에 올라서 있는 십수 명의 가면인들이 보였다.
각자 어두운 검은색 무복으로 몸을 감싼 채 하얀 가면까지 쓴 자들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열 명.
그들은 제각각 번뜩이는 무기를 든 채, 일부는 밧줄에 올라서서, 일부는 바닥에 내려와 소호를 향해 다가왔다.
“백검회가 무산학관까지 들어와? 와, 대범한데?”
소호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위군, 너는 날 오랫동안 지켜봤다고 했잖아?”
“……그랬지.”
“네가 아는 나라면 잡힐 때 잡히더라도, 지고 잡힐 리 없잖아? 너라면 알겠지?”
“그래. 안다.”
남위군은 자존심이 상하는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잠시 후에 냉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소호는 남위군의 그런 표정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다가 툭 던지듯이 물었다.
“감당할 수 있어?”
“그래.”
남위군은 쫓기듯이 곧바로 대답했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다시 한 번 말했다.
“대가가 무엇이든, 감당해 낸다.”
“그래.”
소호는 남위군의 위에 올라탄 채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의 뜻이다.
“그럼 됐어.”
다가온 가면인들이 소호의 머리 위에 두꺼운 검은색 천을 씌웠다.
펑.
나지막한 폭음과 함께 소호는 아릿하면서도 달큼한, 그러면서도 뒷맛이 씁쓸한 향이 콧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하오문에서 제공해 주었던 고급 마차가 생각났다.
황금색 보료.
비싼 값을 하는 푹신한 보료에 온몸을 파묻듯이.
소호의 정신은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