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00화 (329/686)

8권 25화

제23장 천무공자(天武公子) (25)

똑…… 똑…….

소호는 맑으면서도 아련한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깨어났다.

며칠 밤을 꼬박 샌 것처럼 온몸이 무겁고 나른했다. 제일 처음 드는 생각은 도대체 누가 물방울을 떨어뜨리는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맑고 고운 물방울 소리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아직 깨어나지도 않은 육체가 아니라 깊숙이 숨은 자아의 옆구리를 바늘로 찌르는 듯했다.

분명히 눈은 계속 감고 있고 육체도 피곤하다고 비명을 지르는데, 정신만 야금야금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더 잠을 청하려 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똑…… 똑…….

한 번 소리를 들으면, 어느새 머릿속에선 다음 물방울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떨어지는가.

물방울과 물방울 사이의 간격은 얼마인가.

물방울이 떨어지고 다음 물방울이 떨어지기 전까지, 소호의 육체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몇 개의 초식을 쓸 수 있을까.

몇 명을 상대할 수 있을까.

그런 원치 않는 정보들이 소호의 머릿속에서 계속 계산되고 정리되어서 시끄럽게 떠드는 듯했다.

“에잇, 정말.”

소호는 결국 눈을 뜨고 깨어났다.

끔뻑끔뻑.

사방이 어둡게 느껴졌다. 빛이 부족했다. 구름 낀 밤에 몇 안 되는 별빛에 의지해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눈앞이 답답했다.

벽면에 걸린 작은 횃불 두 개만이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처음엔 모든 것이 흐릿했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소호는 어둠에 적응하고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꽤나 푹신한 보료 위에 앉아 있었다. 편안한 감촉 너머로 은은한 솔잎 향이 났다. 아무래도 솜 사이에 솔잎을 깔아 둔 모양이었다.

소호는 벽면에 반쯤 기댄 비스듬한 자세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꿈틀꿈틀 몸을 조금씩 움직이다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소호는 자신이 지하 동굴에 왔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 깎은 것이 명백한 석벽이 둥그렇게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어깨를 조금 뒤로 밀어 보니 보료 너머로 석재 특유의 단단하고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철컹―.

그때 사방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소호는 전신의 감각이 그제야 하나둘씩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습기 가득한 축축한 공기, 손목과 발목을 감싸고 있는 차갑고 딱딱한 감촉도 느껴진다.

소호는 양손, 양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리는 그곳에서 나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족쇄에 걸린 쇠사슬을 쭉 따라가 보니 등 뒤의 벽면에 커다란 쇠말뚝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말로만 듣던 지하 뇌옥이네!’

갇힌 공간은 대략 사방으로 십 장 너비.

건너편 의자에 앉아 있던 가면 사내가 족쇄에서 나는 쇳소리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소호를 쳐다봤다.

소호는 그를 힐끔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물이 어디서 떨어지는 거예요?”

“……!”

질문이 너무 뜬금없었던 탓일까?

가면 사내는 당황한 듯 보였다.

허둥지둥 손가락으로 구석을 가리키는 모습에선 얼떨결에 대답한 기색이 역력했다.

횃불의 빛이 잘 닿지 않는 동굴 구석은 생각보다 더욱 어두웠다.

소호는 구석을 보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내공까지 사용해야만 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소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춰 본 뒤 그제야 만족해서 씩 웃었다.

철컹. 철컹.

소호는 양손을 살짝 당겨 보았다.

재질은 철. 족쇄와 사슬이 둘 다 꽤 무거운 것을 보니 다른 재료를 많이 섞지 않은 투박한 적철(赤鐵)이다.

소호는 찌뿌둥한 목을 풀어 주기 위해 좌우로 고개를 꺾었다.

다리를 일자로 벌리고 허리를 쭉쭉 펴면서 뭉친 근육을 풀어 주고 육체의 감각을 되살렸다.

기숙사에서 하던 일과 똑같다.

소호는 평소에도 잠에서 깨어나면 늘 하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후우―.”

소호는 길게 숨을 내쉬며 마무리한 뒤,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겨 보았다.

“하나, 둘, 셋.”

철컹.

딱 세 걸음을 걸으니 손발에 찬 족쇄가 비명을 질렀다.

소호는 이번엔 좌우로 걸어 한계점을 확인했다.

좌우로는 두 걸음 정도다.

가로로 폭이 좁은 타원형의 공간이 소호가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었다.

“그렇구나.”

소호는 타원형 공간의 중심에 털썩 주저앉았다.

빙긋 웃는 얼굴에서는 어떠한 걱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요?”

“…….”

“밥은 몇 시쯤에 먹을까요? 자다가 일어나서 그런가? 좀 출출하네요.”

가면을 쓴 사내의 눈빛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너는…… 두렵지 않나? 정신을 차려 보니 족쇄를 찬 채 뇌옥에 갇혔는데.”

“두려워해야 해요?”

“당연…….”

가면 사내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소호가 그의 내심을 꿰뚫어 보듯 맑은 눈빛으로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죠? 위험하지 않죠?”

“…….”

“왜냐면, 저를 없애려면 처음에 학관에서 없애면 됐으니까요.”

가면 사내에게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소호는 그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소호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왜 그런 반응을 하는지 충분히 상상이 된 탓이다.

“게다가 이 보료를 보세요. 누가 괴롭히려고 납치해 온 놈한테 이런 보료를 깔아 줄까요?”

소호는 일부러 벌렁 드러누워 등으로 보료를 팡팡 두드렸다.

보료가 어찌나 푹신한지, 아무리 몸을 방방 흔들어도 등이 아프질 않았다.

“그러니까. 백검회는 저랑 싸우기 싫어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한테 해를 끼칠 리가 없죠. 오히려 저한테 잘 대해 주라고 하지 않았어요? 제가 원한을 품지 않게?”

“……그렇긴 했지.”

“거봐요. 내 말이 맞죠?”

소호는 머리 뒤에서 양손을 깍지 꼈다.

그리고 입을 살짝 벌리며 드러나는 웃음.

태양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을 향해 매몰차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가면 사내는 머뭇거릴 뿐 소호에게 강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렇긴…… 한데…….”

“우린 언제까지 여기에 함께 있어요? 언제 임무가 끝나요?”

“……아마 사흘정도.”

“사흘? 이런, 그럼 무산제전 다 끝나고 풀어 주려나 보다. 그렇죠?”

“그렇겠지.”

가면 사내는 어느 순간 포기한 것처럼 순순히 대답했다.

“그 날 모든 게 끝나요? 그러면 남위군은요?”

“……“

“대답하기 힘드신가 보네요. 알겠어요.”

소호는 자연스럽게 편안한 주제로 다시 넘어갔다.

“목소리가 젊어 보이는데 제 또래죠?”

“……그래.”

“백검회에는 왜 들어가게 됐어요?”

“복수 때문에…….”

“복수? 누구에게 원한이 있는데요?”

“누구긴 누구겠나.”

처음으로 가면 사내가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당연히 왕진이다. 그 천인공노 할 간신은 죽어 마땅해.”

“아아.”

소호는 감탄했다.

“왕 태감은 참, 원한을 많이도 쌓았네요. 복수를 벼르고 있는 게 제가 본 것만 해도 몇 명째인지 모르겠어요.”

“당연하다. 대 화산파를 비롯해 종남에 청성……. 그 간신 놈이 얼마나 패악질을 부렸나? 이 땅에 왕진에게 직접 원한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냐는 말이야.”

“으음…….”

“우리 백검회만 해도 원한이 있는 사람이 천 명이 넘는다!”

소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천 명? 우와, 그 정도로 많아요?”

“그것도 최소한이다! 우리 백검회는 간악한 왕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다들 대의를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모였지. 천 명? 우습다. 만 명이나 십만 명도 모일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어요……?”

“그래. 백검회는 과거라면 쳐다보지도 못 할 대문파의 무공을 아낌없이 가르쳐 준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게다가 이 나라 모든 무림인들은 다 왕진을 없애고 싶어 할 터. 의로움과 실익을 함께 챙길 수 있다니. 이 길을 택하지 않는다면 멍청한 짓이다.”

“백검회는 정말로 큰 집단이네요?”

“당연하다. 우린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왕진은 천벌을 받을 것이야.”

가면 사내는 진심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목소리였다.

그는 의분(義憤)에 떨고 있었다. 이렇게나 감정이 불타오르는 것은 단지 개인적인 복수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대의라는 확신.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지금 그는 큰 뜻을 위해 몸 바쳐 일하고 있다는 신념이 없다면 사람은 이렇게까지 하지 못한다.

“근데 여긴 무산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예요? 멀리 왔어요?”

“무산에서 마차로도 세 시진은 걸리는 거리다. 인적도 드물지. 백검회가 주변을 철저히 지키고있으니 도망치는 것은 포기해.”

“하핫, 제가 어딜 가겠어요. 이렇게 묶여 있는데.”

소호는 양팔을 벌려 자랑하듯이 족쇄를 보여 주었다.

철컹― 하고 쇠사슬이 거친 소리를 내었다.

가면 사내는 진중한 눈빛으로 소호의 족쇄를 응시했다.

“네가 그렇게 차고 있으니 족쇄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군.”

“뭐, 신기한 경험이긴 하네요.”

“나는…….”

가면 사내는 잠시 입을 다물고 말을 골랐다.

“네가 오검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봤다. 대단하더군. 그의 만천화우를 그렇게 피해 낸 건 네가 처음이다.”

“오검? 만천화우?”

소호는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가 말한 것이 남위군과 놀라웠던 암기술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남위군이 오검이구나. 근데 그게 만천화우였어요? 그 유명한 사천 당문의 만천화우?”

“……자세히는 모른다. 우리끼린 그렇게 부를 뿐.”

소호는 왠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사천 당문의 비기이긴 하지만 아직도 그들만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문의 절기를 절반 가까이 내놓은 당문이다. 어떤 무공을 내놓을지는 그들이 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중 만천화우가 끼어 있대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소호처럼 스스로 익혔든, 아니면 당문의 누군가에게 배웠든.

충분히 남위군은 만천화우를 쓸 만한 인재였다.

“어째서 네가 천무공자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학관을 졸업하기도 전에 그 정도의 명성을 쌓다니.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론 그 이상이었지. 부탁하겠다. 이 이상 무의미하게 다투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다오. 우리의 복수가…… 이 손에 쥘 수 있는 눈앞까지 다가왔다.”

가면 사내의 목소리는 진지했고, 절박했으며, 강한 열망을 담고 있었다.

그가 벌린 손에는 금방이라도 왕진을 타도하는 복수가 손에 쥐어질 것만 같았다.

“어어…….”

소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누가 옳은 것일까?

원한과 원망을 그토록 뿌리고 다녔음에도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끝내 무림을 평정한 왕진?

그런 왕진을 타도하겠다고 목숨조차 내놓고 또 다른 원한을 만들고 있으면서도 무림의 평화를 되찾으려는 백검회?

‘세상일에 정답이 없네. 나도 학관에서의 마지막 한 해가 망쳐지는 건 싫은데.’

소호는 들풀을 씹은 것처럼 입 안이 쓴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서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어 봤자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소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다시 소소한 주제로 돌아갔다.

“그래서, 백검회 생활은 어때요? 지낼 만했어요? 무공은 많이 배웠고요?”

친근하게 묻는 소호에게 스스로를 ‘팔검’이라고 밝힌 가면 사내는 웬만한 건 숨기지 않고 모두 대답해 주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횃불이 갈아 끼워지고, 식사와 용변 시간이 다섯 번이 넘게 반복되었다.

소호와 팔검은 이틀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냈다.

이변은 그때 벌어졌다.

***

고요한 산골 마을 근처를 평범한 마차 한 대가 묵묵히 나아갔다.

마차를 끄는 말은 어두운 갈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찌나 힘이 좋은지 마차를 끌고 가면서도 힘든 내색도 한 번 하지 않았다.

마차에는 마부를 제외하고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남일녀의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척 봐도 평범하지 않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고, 심지어 마차를 끌고 있는 못생긴 외모의 마부도 뭔가 특출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한참을 묵묵히 마차를 타고 나아가던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히힝―.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마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지그시 감더니, 쥐를 닮은 입술을 쭉 내밀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냄새를 쫓았다.

“천리향(千里香)은 이쪽에서 나고 있어. 확실해.”

하오문 하남지부의 부지부장.

직책상으로는 지부장인 공진표보다 조금 낮지만, 나이도 더 많고 하오문의 경험도 훨씬 많은 능력 있는 간부였다.

“흑서 아저씨, 잘 찾아주셔야 해요?”

“당연하지, 공주님. 이 일이 잘못되면 난 큰일 나. 목숨이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하오문을 살리려면 혀 깨물고 자결을 해야 할지도 몰라.”

“또 그러신다.”

향긋한 찻잔을 들고 나직하게 웃는 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조신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흘러나왔다.

흑서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핏발선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건 그쪽이야, 공주님. 이건 하오문이 사활을 걸어야 하는 문제라고. 아무튼, 이쪽이 맞아.”

흑서는 코를 몇 번 더 킁킁대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근데 이상하네. 소림사 아래. 이쪽으로 가면 내 기억엔 붕대로 온몸을 칭칭 감은 기분 나쁜 거구의 땡중이 있을 텐데…….”

“네? 누가 있다구요?”

“아냐, 아무것도. 공주님. 일단 한번 수색을 해 볼까? 방향은 이쪽이 확실해.”

흑서는 마차 안의 세 사람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천무공자님을 찾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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