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01화 (330/686)

9권 1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1)

최근에 진구는 생각이 많아졌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바뀌지 않는 법이라고들 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는 불혹을 앞둔 나이가 되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든가 체면이란 것들이다.

예전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면, 지금은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을 어떻게 수습할지 생각하면서 움직이게 되었다.

적룡기마대에 있을 때엔 좋았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됐으니까.

심지어 위에 뛰어난 형님들이 있으니 진구는 그저 지시가 내려왔을 때 마음껏 날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진구를 대신해 생각해 줄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 해야만 했다.

세상일이란 어렵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켜 주지 않으면 자신과 다른 자들을 멀리하고 배척한다.

무산학관이라는 커다란 조직에서 사랑스러운 조카를 지켜보면서 일하는 건 그 선을 넘나드는 일의 연속이었다.

‘늙은이 다 됐네.’

진구는 헛웃음을 지었다.

예전의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젊은이를 보게 되면 그 앞날이 훤히 보여서 혀를 차다가도, 한편으론 자신은 이제 그런 무모한 행동을 못하게 되었음을 깨닫고 안타까워지는 것이다.

예전처럼 철부지 행동을 하고 살기엔 너무 철이 들어 버렸다고 종종 생각하곤 했다.

“오늘은 학관장에게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해야 하는데 말이지…….”

무산학관의 동북 방향.

현무방과 청룡방의 기숙사 사이로 가다 보면 담장이 낮은 전각이 하나 나오고, 그다음엔 무산학관의 관장인 가면철왕 철우의 거처가 나온다.

진구는 그 길목에 우뚝 멈춰선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왜 날 따라오는 거냐? 은위군.”

진구의 시선이 길가의 커다란 소나무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니 한 청년이 소나무 뒤에서 조용히 몸을 드러내고는 진구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포권을 취하는 양손에 끼워진 검은색 수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안녕하십니까, 진구 교관님. 교관님은 속일 수가 없군요.”

“안녕 못 해. 요즘 너무 바쁘거든.”

“팔파일방의 중역들도 교관으로 들어오는 이 무산학관에서…… 모든 ‘교관’들을 통틀어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학관장이 신뢰하고 일을 맡기는 것도 당연하겠죠.”

남위군은 차분하게 말했지만 온몸으로 진구를 경계하고 있었다.

긴장한 듯한 눈빛, 뚫어져라 진구를 응시하며 언제든 반응할 준비를 하고 있는 육체는 마치 진구를 이미 적으로 상정한 것만 같았다.

진구는 그런 점을 느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지금은 대화를 해야 할 때였다.

“알아주니 고맙다, 은위군.”

“무산학관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 너도 뛰어난 학생이고, 교관들이 너만큼 가르치기 쉬운 학생도 드물다고 하더라.”

짝!

진구는 씩 웃으면서 손뼉을 한 번 쳤다.

느닷없는 손뼉 소리.

박자를 쪼개면서 기습적으로 터져 나온 행동이었다.

마치 ‘어디선가 전투라도 치르고 온 것 같은 청년’은 긴장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지?”

“……예.”

“말해 봐. 네 말대로 이 학관에서 실력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이 진구 교관님이 들어줄게.”

진구는 웃었고, 남위군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심한 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진구 교관님. 교관님은 왕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진?”

진구는 미간을 좁혔다.

“황실의 태감인 왕진 말이야? 동창의 수장이자 흑시군을 이끄는?”

“예.”

진구는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

“싫어하지. 기회가 되면 혼내 줄 거다.”

“역시 그렇습니까.”

“내 가족들이랑 얽힌 일이 있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아. 지금 무산학관에서 일하고 있으니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그 ‘마을’ 말씀이시군요.”

침묵이 흘렀다.

짙은 먹구름이 몰려온 것처럼 공기부터 무거워졌다.

진구의 분위기도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 마을이라니? 내가 어느 마을에 사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예.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진구 교관님.”

“그래? 어떻게?”

“저는 예전부터 장소호를 지켜봤는데 진구 교관님은 장소호와 같은…….”

“은위군.”

진구는 섬뜩한 기세를 흘렸다.

“내가 너라면 지금부터 말을 신중하게 가려서 할 거다. 지금부터 살얼음판을 딛고 있다고 생각해라.”

남위군의 몸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일순간 떨렸다.

“네가 뭘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몰라도. 이건 네 생각보다 더 중요하고 큰 문제일 거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래? 그럼 말해 봐. 천천히 내가 납득이 될 수 있도록.”

진구는 유쾌한 성격이었으나 적 앞에서는 무자비했다.

남위군은 호흡을 조절하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구 교관님은 장소호와 친해 보였습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써서 조심하지만 밤마다 연무장에서 무공 대련을 해 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저는 장소호가 ‘삼촌’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죠.”

“…….”

“장소호는 하남에 숨겨진 어떤 ‘마을’ 출신입니다. 함께 무산학관에 들어온 섭주해랑 대미미도 그렇죠. 그 애들의 능력이 비범한 것만 봐도 그 마을이 얼마나 놀라운 곳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마을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왕진과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저는 왕진에게 원한이 큰 사람이라 자연스레 알게 되었습니다. 왕진이 그 마을을 신경 쓰고 두려워한다는 걸 말입니다.”

진구는 계속해 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그 마을과 직접 얽히면 내 계획에 방해가 되겠구나. 장소호가 잘못 엮이면 일이 다 틀어지겠구나, 라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잠시 장소호를 데려갔습니다. 무산제전이 끝나면 곧바로 풀어 줄 것입니다.”

“……뭐?”

진구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오랜만에 되새겨 볼 수 있었다.

멀리서 장기린이 그에게 손짓을 하는 듯했다.

웃는 얼굴이다.

내 아들이 납치되는 동안 너는 뭘 했냐고 묻는 듯했다.

“뭐라고?”

진구는 잡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몇 번 흔든 뒤 다시 한 번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엄청난 소식을 들은 터라, 머리가 굴러가질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소호를 납치해서 데리고 있다? 무산제전이 끝나면 곧바로 풀어 주겠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뜻은 맞습니다.”

“허.”

진구는 탄식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두근거렸다.

가슴은 용광로처럼 뜨거운데 머릿속은 북풍한설처럼 차가워지는 희한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남위군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저희는 교관님의 그 마을과 적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왕진에게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고, 마을과 엮여서 일이 틀어지는 건 싫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너였구나.”

“예?”

“소호가 습림관을 통과하다가 습격당한 일, 심증은 있었는데 지켜보는 사이에 이런 일까지 저지르다니. 결국 내 탓이다. 내가 가만히 놔둔 탓에 이런 일이 벌어졌어.”

진구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남위군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희생…… 큭?”

진구는 손을 뻗어 남위군의 멱살을 붙잡았다.

남위군은 재빨리 태극권의 한 수로 방어하려 했지만, 우습다.

진구는 무박자로 움직였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초절정의 경지에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진구로서는 남위군의 반항 따위, 위협도 되지 않는다.

휘리릭―.

남위군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불꽃같은 기세.

손이 여러 개로 늘어나는 듯한 권법을 쓰려고 했지만 진구는 발을 강하게 내딛는 진각 한 번으로 남위군을 제압했다.

쿠웅―.

왼발을 짓밟힌 남위군은 자세가 비틀어지며 권법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그는 암기를 쓸 것처럼 품에서 뭔가를 만졌지만 결국 쓰지는 않았다.

앙 다문 입술에서 충격을 대비하는 결연함이 흘렀다.

콰아아아아―――.

“컥.”

한 번 기세가 제압되니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진구는 마치 말을 타고 있는 것처럼 강하게 돌진하여 남위군을 왼손으로 반쯤 들어 올린 채 나무 사이로 밀어붙였다.

나무와 나무 사이.

숲속 오솔길 안은 밖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남위군은 커다란 소나무에 등부터 거칠게 처박혔다.

진구는 멱살을 틀어쥔 채 남위군과 정면에서 눈을 맞추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네가 무슨 짓을 한 줄 아냐?”

“큭, 일단…… 이것 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아냐고 물었다.”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하는 진구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 담겼다.

철부지?

그런 말로도 부족하다.

감히 소호를 납치하다니.

소호의 가족이 누군지, 그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영감님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말로 알고 있다면 이들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 소호의 삼촌인 자신이 북방전장에서 광견 취급을 받으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을 이들은 알고 있을까?

“장소호……와 가족인 걸…… 숨기고 있지요……. 그게 알려지면…… 곤란하실 텐데…….”

“이젠 협박인가? 재밌네.”

“우린…… 그저…… 원만하게 일을 해결하고 싶을 뿐…….”

“되도 않는 말 지껄이지 말고 입 닥쳐.”

진구는 오른손을 창처럼 꼿꼿하게 세웠다.

“소호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못 말합……니다.”

“말해.”

“말…… 안 합니다.”

“말해!”

남위군은 결연한 눈빛으로 진구를 마주 노려보았다.

목표를 위해선 목숨도 버릴 수 있는 강직한 신념이 담긴 결연한 얼굴이었다.

“너…….”

진구는 감탄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한 뒤, 진심으로 살기를 뿜어냈다.

화아아악―.

오랜만에 뿜어지는 핏빛 기세에 처음으로 남위군이 혼란하여 눈빛이 흔들렸다.

“네 진짜 정체가 누군지. 네가 소속된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너희는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린 거다.”

“큭, 어쩔 수 없…….”

“어쩔 수 없다? 왜? 이야기도 안 해 보고? 납치했다가 풀어 줄 테니 참으라고 하면, 그저 참아야 하는 존재인가? 내 조카가?”

막강한 기파에 짓눌린 남위군이 숨을 헐떡거렸다.

진구의 손끝이 아마 진짜 날카로운 창날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건 올바른 판단이었다.

진구가 마음만 먹으면 맨손으로도 사람의 몸을 뚫을 수 있으니까.

남위군은 부들부들 떨었지만, 한편으론 오기가 생긴 듯 버럭 소리쳤다.

“우리도! 크윽, 어쩔 수 없이!”

“……뭐라고?”

“말을 해도 안 먹히는데! 계속 쓰잘데기 없는 호기심으로! 계속 달려드는데 도대체 어쩌라는 겁니까!”

남위군은 감정이 폭발한 듯 씩씩거렸다.

진구는 그런 남위군을 지그시 응시했다.

흥분했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동안의 경험을 동원해, 남위군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

“미리 이야기했다고? 그런데도 통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어서, 어쩔 수 없이 소호를 납치했다?”

“……조카를 잘 알 것 아닙니까?”

“잘 알지. 너무 잘 알지.”

진구는 소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한번 마음으로 정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달려드는 조카였다.

그러니 그럴 만하다.

하지만 그 곁에서 현명한 조언을 해 주고 보좌해 주는 소호의 동생들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소호가 납치되도록 가만히 두었을까?

“큭.”

진구는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풀어 주었다.

남위군은 격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진구를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이 납치했고, 궁여지책으로 나에게 말하러 왔군. 소호가 없어진 상태로 무산제전을 진행할 수 없을 테니 내 도움이 필요한 거고. 그러면 너의 그 ‘계획’도 실패할 거고.”

“……이제야 대화가 통하는군요.”

진구는 건방 떠는 남위군을 보며 코웃음 쳤다.

“다 말해.”

“예?”

“지금까지 있었던 일. 앞으로 너희가 할 일. 계획까지 다 말하라고.”

“…….”

“왕진에게 복수하겠다며? 설마 그 정도도 생각 안 하고 나한테 접근한 건 아니었겠지? 그것도 감히, 내 조카가 납치되었다고 말하면서?”

진구는 팔짱을 낀 채 냉랭하게 남위군을 내려다보았다.

키로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존재감 때문일까.

진구의 몸집은 남위군의 배는 더 커 보였다.

“말해.”

남위군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에게서 백검회의 계획이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을 들은 뒤, 진구는 이마를 손으로 감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나한테 왜 이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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