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02화 (331/686)

9권 2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2)

“대의를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래. 너는 그렇게 믿고 있겠지.”

“아니란 말입니까?”

멱살을 잡힌 원한까지 합쳐진 탓일까. 남위군은 날카롭게 반문했다.

“당연히 아니지. 세뇌당한 멍청아.”

진구는 무심하게 쏘아붙였다.

“대국을 보지 못하다니. 생각보다 편협하시군요.”

“철없는 꼬맹이! ……라고 바로 생각 드는 걸 보니 나도 늙긴 늙은 모양이다.”

진구는 씁쓸한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라를 좀 더 올바르게 만들기 위해 내 목숨도 아끼지 않고 사력을 다한다……. 그래. 좋지. 그런데 말이다. 그 사이에서 약삭빠르게 이득을 보려는 놈은 항상 있어. 그걸 잊으면 안 돼.”

“백검회에 그런 자는 없습니다.”

“그래? 잘됐네.”

“……진짭니다. 우린 달라요.”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 세상이 진짜 변해 가고, 흙 묻은 손에 권력이 쥐어지기 전까지는.”

“……!”

“권력을 얻고도 변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지금까지 딱 한 명만 봤어. 그리고 그 영웅은 지금도 나의 우상이지.”

진구는 한 발을 뒤로 물러섰다.

마치 갈 테면 가라는 듯했다

그게 남위군에 대한 무언의 허락이라는 걸, 두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네가 왕진을 죽이는 건 막을 생각 없다. 하지만 그런다고 세상이 변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과거를 회상하듯 먼 곳을 바라보는 진구의 옆모습에서는 마치 경험 많은 노장(老將) 같은 애수가 감돌았다.

평소의 유쾌하고 철부지 같은 인상과는 전혀 딴판인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진구는 과거에 직접 경험한 것을 통해 말하는 것인데, 거기에 어떻게 토를 달 수 있겠는가.

그래도 곧바로 수긍하기에 남위군은 너무 젊었다.

“우린…… 다릅니다.”

남위군은 씹어뱉듯이, 혹은,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았다니까.”

진구는 등을 돌렸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학관에는 소호가 일이 생겨서 고향에 잠시 돌아간 걸로 말해 두겠어. 단.”

“단?”

“소호가 몸이 상하거나 불편한 대우를 받았다고 듣는다면, 너희 백검회는 그 ‘마을’이 어떤 곳인지 뼈저리게 알게 될 거야.”

남위군은 평소의 차가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진구의 위협이 진심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남위군의 눈빛이 점점 더 결연해졌다.

“아참, 이건 네 교관으로서 해 주는 말인데.”

살짝 고개를 돌린 진구의 입에는 미묘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나중에 나 원망하진 마라. 예를 들면……. 능력은 있는데 낄 데 안 낄 데 모르고 활약하는 철부지를 놓쳐 버려서 실패해 버린다든가. 그런 경우 말이야.”

“……!”

남위군은 충격을 받은 듯 입만 뻐끔거리다가, 황급히 포권을 취하고 나무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보인 그의 표정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

진구는 남위군의 멱살을 틀어쥐었던 왼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나대로 움직여야겠군. 우선……. 섭주해.”

소호의 지낭(智囊)이자 심복을 자처하는 또 한 명의 조카다.

날이 갈수록 진구의 셋째 형님을 닮아가는 조카와 상의하면 일이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진구는 백호방에 있는 섭주해의 방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섭주해! 안에 있냐?”

진구는 대답이 없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고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섭주해의 방 안, 서탁 위에는 마치 진구를 기다린 것처럼 서찰이 하나 놓여 있었다.

새하얀 서찰 위에는 진구의 이름까지 쓰여 있었다.

앞날을 내다본 행동.

진구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 생각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설마.”

한달음에 서찰을 펼쳐 본 진구는 탄식했다.

유비입성(劉備入城),

유표지하(劉表之下).

비육지탄(脾肉之嘆),

거거동회(去去同回).

“유비가 유표의 품에 들어가 재능을 펼치지 않고 세월만 보내니, 가서 데리고 돌아오겠습니다?”

진구도 학식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삼국지에 대한 고사는 몇 개 아는 편이었다.

특히 비육지탄이라면 자신의 허벅지에 살이 찐 것을 보고 자신의 나태함을 경계했다는 유비의 유명한 일화가 아니던가.

“백검회가 왜 유표냐. 유표가 유비를 납치했어? 소호는 거기서 비육지탄을 논할 만큼 편하게 지내고 있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진구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의 주변에 있는 어린놈들은 왜 다 이 모양인가.

“나한테 왜 이러냐, 얘들아.”

저 멀리 장기린이 웃으면서 손짓하는 모습이 다시 한 번 보였다.

고요한 방 안에서 진구의 시름은 깊어져만 갔다.

***

개는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후각으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낸다.

냄새의 흔적을 쫓는다든가, 눈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은밀한 비밀을 찾아낸다든가. 그런 종류의 일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흑서는 날 때부터 후각이 좋은 편이었고, 그걸 발달시켜 보통 사람들의 몇 배나 되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홀로 만들어 낸 무공을 광비공(廣鼻功)이라 불렀다.

광대한 냄새를 다 맡을 수 있는 코 무공이라는 뜻이다.

“이쪽.”

흑서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코를 몇 번 킁킁거린 뒤 마차의 방향을 바꾸길 수차례 반복했다.

헌데 마차가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흑서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왼쪽? 아냐, 아니야. 방향을 꺾었어. 제법이네. 추적 안 당하도록 신경도 쓰고. 다음은……. 이쪽.”

흑서가 이끄는 마차는 숭산의 끝자락에 있는 자그마한 암자에서 멈춰 섰다.

“결국 여기로 오다니……!”

흑서는 탄식했다.

돌을 쌓아 만든 담장은 고작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높이였다. 키가 웬만큼만 큰 사람이라면 한 손만 대충 짚고도 넘어갈 수 있을 정도다.

담장 안쪽에는 사람의 키만 한 석탑들이 열 개가량 세워져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암자에는 자그마한 불상이 하나 놓여 있긴 하지만 사찰이라기엔 전체적으로 규모가 너무 작았다.

그나마 잘 관리되고 있는 듯 깨끗한 게 장점이랄까.

암자의 입구에서부터 불상까지 이르는 길에는 먼지 한 톨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인적이 워낙 드문 곳에 있는 탓인지 암자 전체에서 묘하게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공주님, 여기야. 냄새는 저 암자의 뒤쪽으로 이어져 있어. 여기부터는 걸어가셔야 할 것 같은데?”

흑서는 하오문 문주를 대하듯이 공손하게 예를 차리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마차 안에 있던 세 사람이 나오는 것보다 암자 안의 승려가 인기척을 느끼고 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흑서는 재빨리 뒤돌아보았다.

날카로운 눈빛.

그는 티가 많이 날 정도로 암자를 대놓고 경계하고 있었다.

“누구신지……?”

암자에서 나온 것은 앳된 얼굴에 소림의 승복을 입은 사미승이었다.

나이는 십 대 초중반 정도 되었을까.

황색 승복과 이마에 새겨진 계인은 분명 그가 소림의 문하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소림승……?”

“예, 부족하지만 소림에서 법명을 받았습니다.”

정중하게 합장을 하는 자세는 꽤나 제대로 된 승려 같지만, 합장을 한 뒤 호기심 어린 눈빛이 반짝거리는 모습에선 영락없이 어린애 같은 모습이 보였다.

“소림승이 여기에? 언제부터 계셨어?”

“사실 얼마 안 됐습니다. 저희 방장 스님께서 불학에 매진하려면 여기서 하라고 하셔서…….”

“여기서……?”

“예.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사실은 긴나라 신승이 머물던 암자랍니다. 역사가 오래된 곳이죠?”

“긴나라 신승이라니. 홍건의 난 때 유명해진 그 긴나라 승?”

“예. 그분입니다. 허름한 옷을 입고 늘 잡일만 하던 분이었으나 소림의 위기 때에 지켜 주셨던 분이지요. 여기에도 비슷한 한 분이 계십니다.”

끼이익―.

그때 마차 안에서 한 사람이 내려섰다.

보통의 성인 남성보다도 한 뼘은 더 큰 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젖살 하나 없이 매끈한 얼굴이었다.

갸름한 인상에 흑단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을 앞머리만 조금 남겨 놓고 뒤로 묶었는데, 양 갈래로 먼저 묶은 뒤 뒤로 합쳐서 땋은 형태의 머리 모양이 특이했다.

금실로 꽃무늬가 새겨진 붉은색 비단 당혜를 신었고, 그 위엔 잡티 하나 없는 고급스러운 연분홍 무복을 입었다. 복부 앞에 양손을 모은 채 걸음을 옮기는데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붉은색 비단 장포가 날개옷처럼 펄럭였다.

어디로 보나 강렬한 느낌.

소처럼 순박해 보이는 눈매만 아니라면 보통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무서워할 만큼 강렬했다.

붉은색만 있어도 눈에 띌 텐데, 그걸 입고 있는 것은 심지어 인근에서 쉽게 보기 힘든 키가 큰 거구의 미인이다.

심지어 그 거구의 미인이 어깨에 걸친 비단 장포엔 어깨와 등 부분에 커다란 금색 꽃이 수놓여 있었다.

그녀가 바로 대미미였다.

은자촌 삼인방 중의 홍일점이자 최근엔 낙양 밤거리에서 거화신녀의 재림(再臨)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무산학관의 철공주다.

“큰 꽃(巨花)……!”

소림승 소년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가, 자기 스스로 깜짝 놀라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스님. 우리 공주님은 크다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하시니까 조심해 주시면 좋겠는데?”

“아, 예. 예. 제가 저기 실수를…….”

“그런 실수를 하면 안 되지. 불제자가. 잘 봐. 스님, 우리 공주님 멋지지? 저 위풍당당한 모습에 반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니까?”

“아 예. 예. 그럴 만도…….”

흑서가 의뭉스럽게 장난치고, 순진한 사미승은 얼떨결에 대답하다가 얼굴이 새빨개졌다.

흑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미승에게 캐물었다.

“스님, 우린 비밀 공간을 찾고 있는데 말이야. 희한하게 흔적이 이쪽으로 향하더라고. 혹시 주변에서 사람이 드나든다든가, 아니면 아무도 없는데 이상한 흔적이 점점 늘어난다든가. 그런 일 없었어?”

“여기 주변에요……?”

“그래. 큰일이야. 우리 공주님의 지인이 거기로 잡혀갔거든 나쁜 사람들이라서 구해 내려고 그래.”

“으음…….”

“잘 생각해 봐, 스님. 짚이는 것 없어?”

“음…… 아!”

잠시 고민하던 사미승이 뭔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쳤다.

“저는 잘 모르는데 물어볼 만한 분이 있어요.”

“물어볼 만한 분……?”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미타불.”

“아니, 잠깐. 잠깐만.”

사미승은 정중하게 합장한 뒤 서둘러 암자 안쪽으로 들어갔다.

뭔가를 미리 알고 있던 흑서가 황급히 말리려고 했으나 그 전에 이미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버렸다.

그는 불상이 있는 법 당쪽으로 가더니 크게 소리쳤다.

“범천(凡天) 스님! 범천 스님! 잠깐만 와 주세요. 여쭤볼 게 있어요!”

암자는 물론이고 숭산 끝자락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사실 사미승이 불법에 심취한 게 아니라 사자후를 익히고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음?”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대미미였다.

그녀는 복부 앞에서 모으고 있던 손을 풀고 자연스럽게 길고 가는 양손가락을 손톱을 세우듯이 살짝 굽혔다.

대미미의 뒤에 내린 조서인과 섭주해는 그다음에 반응했다.

조서인은 들고 있던 창을 세웠고, 섭주해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는 단검의 손잡이를 손으로 꽉 붙잡았다.

스으으―.

서늘한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체 언제 다가온 것일까.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허름한 승복을 입은 거구의 사내가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미미를 포함한 세 사람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를 경계했다.

나지막한 담장 너머에서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저분한 붕대 너머로 보이는 두 눈은 얼핏 차분해 보였지만, 그 너머에서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범상치 않은 패기가 느껴졌다.

조서인은 그렇다 쳐도, 은자촌에서 날고 기는 고수들을 모두 보아 온 대미미와 섭주해마저 긴장을 숨길 수 없었다.

그들은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누구야, 이 사람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