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3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3)
붕대를 감은 승려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세 사람을 차례차례 응시했다.
그가 섭주해를 보는 시간은 꽤나 길었고, 반대로 조서인은 무척이나 짧았다. 대미미에게 와서는 아예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섭주해와 대미미로부터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린 듯 보였다.
꿀꺽―.
묘한 긴장감 속에서 세 사람 중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슥―.
붕대를 감은 승려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으려고 했다.
세 사람이 일제히 움찔 몸을 떨었다.
왜일까?
서로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고, 그렇다고 저 거구의 승려가 딱히 위협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무산학관에서도 손꼽히는 재인(才人)들이 맹수를 앞에 둔 것처럼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밤길을 걷다가 호랑이와 마주친 형세였다. 소름이 끼치고 등 뒤에 한기가 느껴졌다.
화아악―.
어떻게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대미미는 그런 의문을 느끼며 살며시 그녀가 익힌 대력만천세 신공의 무형기를 뿜어냈다.
무림인들 중에서도 일류를 넘은 무인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무형기였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무형기에 닿는 순간 한기를 느끼며 섬뜩해하고, 무인이라면 깜짝 놀라 경계한다.
그런데 붕대를 감은 승려는 대미미가 뿜어낸 무형기를 묵묵히 받아들여 삼켜 버렸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의 우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심연(深淵)이다.
대미미는 망망대해에 홀로 던져진 듯한 막막함을 느꼈다.
“범천 스님!”
네 사람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긴장감을 해소한 것은 불당 쪽에서 범천 스님을 목 놓아 부르던 사미승이었다.
그는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붕대를 칭칭 감은 승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여기 계셨군요! 범천 스님도 참, 신출귀몰하시다니까요? 스님, 여기 이분들이 스님의 도움을 필요로 해요. 여쭤볼 게 있답니다.”
정중한 듯하면서도 어린아이 특유의 애교가 묻어나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천진난만했다.
범천이라 불린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궁금해하는 그들에게는 어떠한 답도 주어지지 않았다.
붕대를 감은 승려는 묵묵히 사미승을 향해 몸을 돌릴 뿐이었다.
단지 그뿐인데도, 대미미를 포함한 세 사람은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시주님들, 범천 스님은 묵언 수행을 하신 지 올해로 십 년이 되셨어요. 그래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니 오해는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미승은 정중하게 양손으로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한두 번 설명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사미승은 범천 스님을 본 사람들이 그를 꺼린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일행 모두에게서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묵언수행……? 이분도 소림의 승려인가요?”
대미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사미승은 눈치채지 못했다.
“네! 저처럼 불학(佛學) 쪽의 제자신데 속세에 계시다가 조금 늦게 입문하셨다고 들었어요. 방장님께서 법명도 친히 내려 주셨구요. 범천 스님은 무뚝뚝해 보여도 좋은 분이세요. 항상 이곳을 쓸고 닦아 깨끗하게 해 주시고 불공을 드리거든요. 참된 불제자죠?”
“…….”
“음…… 붕대를 감은 것은 이십 년 전쯤에 화상을 입어서 그런 것이니 오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병마(病魔) 같은 건 없으세요.”
꾸욱―.
범천이라 불린 승려는 마치 강아지처럼 흥분한 사미승의 어깨를 살짝 눌렀다.
그는 사미승을 진정시킨 뒤, 먼저 앞으로 나서서 대미미를 포함한 방문자 모두에게 합장을 취해 예를 표했다.
“…….”
대미미는 범천 스님의 눈빛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위험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맑다.
선과 악이 공존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약간 큰 삼촌 같기도 해.’
나이가 들수록 제대로 알게 되는 삼촌들의 능력. 그릇을 가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는 범천 스님과 삼촌들 간의 공통점을 느꼈다.
‘주해와 서인이는…….’
대미미가 뒤돌아보니 두 사람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다.
조서인은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있었고, 섭주해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었다.
나설 사람은 그녀뿐이다.
“후.”
대미미는 범천을 향해 포권을 취해 예를 돌려주었다.
섬세한 꽃무늬와 연분홍 색깔을 좋아하던 소녀는, 무산학관과 낙양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유년 시절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당당한 여걸이 되었다.
지금의 그녀는 무산학관의 대력제일인(大力第一人).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무산 철공주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곧은 시선으로 범천을 바라봤다.
“대미미예요. 범천 스님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
통성명을 하니 또 한 번, 범천에게서 묘한 기색이 감돌았다.
“누군가가 제 소중한 가족을 데려갔어요. 지금 그 범인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이 근방에서 수상한 사람들을 본 적이 있나요?”
“…….”
“작은 단서라도 좋아요.”
범천이 잠시 침묵하는 그 순간이 그렇게나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천년만년처럼 긴 시간 끝에, 범천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구 척 장신의 거구가 걸으면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야 마땅했지만, 범천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워 사뿐사뿐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대미미를 포함한 모두는 당황하면서도 그의 뒤를 쫓았다.
마차 뒤에 숨어 있다시피 하던 흑서도 대미미의 뒤에 재빨리 따라붙었다.
“아저씨, 어디 가셨었어요?”
“크흠, 마차가 조금 삐걱거려서…….”
“…….”
“어이쿠, 놓치겠네. 공주님, 어서 가야겠는데?”
대미미는 흑서가 분명히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걸 탓하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범천은 암자의 뒷문으로 나가 숭산의 산길에 접어들었다.
그는 험한 산세 속에서 야생 동물들이나 지나다닐 법한 작은 길을 통해 움직이고 있었다.
허리가 넘도록 길게 자란 풀들을 헤치고 움직이는 모습이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범천 스님. 정말로 수상한 자들이 근처에 있었어요? 왜 저는 몰랐을까요?”
“…….”
“아미타불, 가까이 가도 괜찮은 걸까요?”
사미승이 아무리 재잘거려도 범천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일각 정도 걸음을 옮기다가 사람의 키만 한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에서 멈춰 섰다.
그는 대미미와 섭주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손짓으로 바위 너머를 가리켰다.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직접 들어가 보라고 종용하는 듯이 보였다.
“감사해요. 도와주신 건 잊지 않겠습니다.”
대미미가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는 것을 시작으로, 함께 온 네 명이 동시에 포권을 취했다.
범천은 짧게 합장하여 예를 받은 뒤, 갑자기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일동은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했지만, 사미승에게는 당연한 일인 듯 했다.
“불도를 닦는 일에는 격식이 없지요. 시주님들 일이 잘 되시길 바랍니다.”
사미승은 그들에게 빙긋 웃으며 합장을 한 뒤, 범천의 곁에 똑같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염주를 돌리며 불경을 읊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몸집은 크게 차이가 나지만, 그들은 각자 똑같은 불제자들이었다.
나직한 불경이 이어질수록 두 사람의 숨소리가 똑같은 박자로 가라앉았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갑작스럽기는 했으나 그게 이상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쉬이 볼 수 없는 모습에서 불법의 신묘함이 느껴졌다.
“아…….”
대미미는 뭔가 방해해선 안 된다는 느낌을 받고 범천이 가리켰던 바위 뒤쪽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나머지 세 사람도 묵묵히 대미미의 뒤를 따라왔다.
“어, 저기…… 신기한 분들이네.”
조서인은 머뭇거리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데 나머지 세 사람이 아무도 말이 없었다. 마치 식사 시간에 밥상이 엎어진 것 같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주해야? 미미야?”
섭주해는 대답이 없었고, 대미미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맞아, 서인아. 신기한 분들이야.”
“그렇지?”
“응. 범상치 않은 분이야.”
“……그 스님, 강한 것 맞지?”
“응.”
“함정은 아닐까? ……아니겠지? 그래도 소림승인데?”
“아닐 것 같아. 그보다 지금은 일단 조용히 가자.”
대미미는 말을 아끼면서 뒤를 힐끔 바라봤다.
커다란 바위에 가려 이제 더 이상 범천과 사미승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라면 멀리 떨어진 곳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아직 방심하면서 대화를 나눌 상황은 아닌 것이다
“아…….”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조서인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고, 대미미를 선두로 한 네 사람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토굴이야.”
불과 백 걸음도 움직이기 전에 그들은 툭 튀어나온 둔덕 아래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토굴을 발견했다.
토굴은 입구가 비스듬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흙을 파서 구멍을 뚫었으나 내부의 동굴은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듯 보였다.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큰 대미미도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공간은 넓었다.
야생 동물이 가끔 자고 간 곳일까?
퀴퀴한 공기 사이로 맹수 특유의 누린내가 났다.
자세히 보니 작은 동물들의 뼈도 중간중간 떨어져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길인 듯 보였다.
토굴로 들어가 불과 몇 걸음 걷기도 전에 그들은 잠겨 있는 철문을 맞이했다.
여러모로 수상한 공간.
범천이 가르쳐 준 곳이 그들이 찾던 곳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철문이네?”
“응. 철문이다, 미미야.”
조서인은 대미미를 바라봤고, 대미미는 섭주해를 바라봤다.
“어떻게 할까?”
“으음…….”
그때까지도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섭주해는 고개를 붕붕 젓더니 곧 눈을 총명하게 빛냈다.
“분명히 예전에 비슷한 걸 들었던 것 같은데……. 으음, 지금 고민한다고 답은 안 나오니…… 할 일부터 하자.”
섭주해는 아이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단단하게 잠겨 있는 철문을 둘러보며 꼼꼼하게 살폈다.
“기관 진식은 아니야. 두꺼운 철문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고…… 안에서 이중으로 잠갔네. 운기자의 방식? 아니야. 그와는 다른 것 같은데 그보다는 좀 더 최근에 만들었어…….”
섭주해는 손가락으로 철문을 몇 번 퉁퉁 두드린 뒤,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얘들아, 지금부턴 정말로 백검회와 싸워야 할지도 몰라. 우리가 뭘 포기하고 왔는 줄 알지?”
대미미는 빙긋 웃었고, 조서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산제전?”
“우리의 ‘마지막’ 무산제전이야. 미미야.”
“어머, 아쉬우면 지금이라도 돌아갈래, 서인아?”
대미미는 차분하게 웃었다. 사해에 명성을 떨친 무산 철공주는 당대의 여걸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요조숙녀처럼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도 낼 수 있게 되었다.
낙양의 내로라하는 기녀들에게 배운 처세술이다.
조서인은 대미미가 기녀 같은 말투를 쓰기 시작하면 나중에 큰일 난다는 사실을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가. 일단 친구부터 구해야지.”
“잘 생각했어, 서인아. 고민할 것도 없는 일이잖아? 오라버니가 최우선이야.”
“……소호 이 녀석, 나오기만 해 봐라.”
대미미는 빙긋 웃으면서 철문의 가운데에 있는 두툼한 잠금장치를 맨손으로 붙잡았다.
후욱―.
그녀를 향해 공기가 훅하고 빨려들어 간다 싶더니, 철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섭주해와 조서인, 흑서는 황급히 손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빠지지직―.
거무튀튀한 철문 사이를 단단하게 붙잡아 주던 잠금장치가 노인의 얼굴처럼 구깃구깃 구겨지더니 한순간에 솔방울처럼 툭 떨어져 나왔다.
까드드득―.
대미미가 손을 한 번 털자 손바닥만 한 철 조각이 흙바닥을 퍽― 하고 두부처럼 파고들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대미미는 빈틈이 생긴 철문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양쪽으로 당겼다.
끼이이이익―.
섬뜩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반으로 접히듯이 활짝 열렸다.
대미미는 손에 묻은 먼지를 팡팡 털어낸 뒤 조서인을 바라봤다.
“서인아, 뭐라고?”
그녀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붉은 비단 장포가 불꽃처럼 펄럭였다.
조서인은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것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