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04화 (333/686)

9권 4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4)

“소호 오라버니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이 들렸던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야.”

철문이 꺾이면서 드러난 내부의 모습은 꽤나 재밌었다.

음습하고 살벌한 비밀 공간이 드러날 것이라는 예상과는 반대로 놀랍게도 철문의 앞은 주방이었던 것이다.

모든 게 갖춰진 주방은 아니었지만, 단출한 원형 식탁과 그 곁에 세워 둔 통나무 의자는 다섯 명 정도가 한꺼번에 앉아도 무리가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한쪽엔 감자와 쌀처럼 오래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나무 상자에 쌓여 있었고, 반대쪽에는 솥에 담긴 물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식탁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듬직한 덩치를 지닌 사내 한 명과 빼빼 말라 가죽만 남은 듯한 사내 한 명이다.

그들은 각각 삶은 감자와 뜨거운 국수를 입에 넣은 채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특히 감자를 깨물고 있는 사내가 놀라웠다.

감자에서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매우 뜨거울 게 분명한데, 입으로 한껏 깨문 상태로 감자를 떼어내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저러다가 잇몸이 익어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다.

부릅뜬 눈과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들의 경악을 짐작케 했다.

“으음, 미안하네요.”

대미미는 그들을 동정했다.

가장 행복해야 할 식사 시간에 옆에서 철문이 뜯겨져 나갔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앗뜨, 씁, 으읍!”

“푸훅.”

잠시 후, 마침내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들고 있던 감자를 내던지고 입에 물고 있던 국수를 뱉어냈다.

그들의 옆에 있던 새하얀 가면들이 그들의 정체를 증명했다.

“누구냣…… 쿨럭.”

백검회의 두 사람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습격! 습……!”

습격을 알리려던 빼빼마른 사내의 옆구리를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 창대가 강하게 찔렀다.

퍽!

“……!”

마른 체구의 사내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옆구리를 붙잡고 휘청거렸다.

“큭!”

그는 허리춤의 검을 뽑으려 했으나 이미 선기를 잡은 조서인의 창술은 거센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그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쒜에엑―.

퍼버버벅―!

강맹함을 담은 조가창의 창이 사내의 발끝부터 상박까지 전신의 요혈을 일거에 격타했다.

조가창법 제이 식(式), 선풍(旋風)이다.

상대방은 검을 뽑지도 못한 채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쿠웅.

조서인은 서서히 다가오는 폭풍 같았다.

쿵, 하고 내딛는 진각에는 무게감이 있다.

단정한 얼굴, 올곧은 눈빛에서 빈틈은 절대 좌시하지 않을 듯한 완고한 분위기가 드러났다.

“십오검! 이놈들!”

덩치가 큰 사내는 그래도 동료가 쓰러지는 사이에 반격의 틈을 얻어 냈다.

감자를 내뱉고, 곧바로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면서 매화검을 전개했다.

쉭―.

투박한 청강검이 제법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냈다. 직선적이면서 강맹한 기세가 화려하게 뿜어져 나왔다. 날아드는 매화검은 순식간에 검첨이 세 개로 늘어난 것처럼 잔상을 흘리며 허공에 매화꽃을 꽃피웠다. 조서인은 장창을 양손으로 거머쥔 채 좌우로 휘둘렀다.

쩌어엉!

검날과 창날이 부딪치는데 종이 울리는 것 같은 강렬한 금속성이 튀어나왔다.

검이 뒤로 튕겨나는 것을 확인한 순간, 조서인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창끝을 위로 치켜세웠다.

쒜에엑―.

그리고 일격.

“……!”

조가창법 제일 식(式), 낙일(落日)이 마치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창을 내던진 것처럼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상대방은 들고 있던 검을 놓쳤다. 입고 있던 무복의 가슴팍이 크게 갈라졌고, 창에 실린 경력이 우상단의 어깨를 때려 쇄골을 박살 냈다.

“크악!”

단말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내던져진 청강검이 까가강―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휘리릭―.

조서인은 창을 비스듬하게 돌려서 뒤로 수습했다.

몸을 반회전할 때 발끝조차 허투루 쓰지 않는 모습은 지극히 안정적이다.

정기신이 하나로 맞물려 경지에 이른 모습.

일류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엄연히 달인의 경지를 엿보는 무인이 이곳에 있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하며, 혹시라도 있을 반격마저 살피는 태도까지 빈틈이 없었다.

무산학관에서 배우는 수많은 관문들로 단련이 된 덕분이다.

타다닥―.

그사이에 대미미는 안쪽으로 뛰어갔다.

그녀의 움직임은 곤륜의 운룡대팔식을 닮아 있었다. 몇 번 발을 옮기지도 않았는데 마치 구름이 흘러가듯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복도의 끝에 도달했다.

대미미는 아래쪽으로 이어진 통로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숨을 세 번 정도 쉴 시간이 지나갔다. 대미미는 손을 내저어 아무런 기척도 없다는 뜻의 신호를 보냈다.

조서인은 다시 창을 뻗어 바닥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백검회 사내의 목에 창날을 들이댔다.

“큭?”

조서인은 완고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움직이면 베겠다는 경고였다.

실제로 강한 위압감이 뿜어져 백검회 사내를 제압했다.

“흑서님.”

조용히 있던 섭주해가 나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천리향은 어떻죠? 계속해서 나나요?”

“으음, 나고 있기는 한데.”

흑서는 허공에 대고 코를 몇 번 씰룩거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주방을 벗어나 대미미가 경계하고 있는 통로 쪽으로 가서 코를 킁킁거렸다.

“이쪽인데…… 으음, 아니, 아닌가? 묘한데…….”

흑서는 스스로 말해 놓고도 결과가 신통치 않다는 점에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그는 미간을 좁힌 뒤 바닥에 네 발로 기면서 냄새를 추적했다.

“여기에 있었어. 분명히 있었고……. 그 뒤에 이동했군. 그런데 뭔가를 한 모양이야. 냄새는 여기서 끊겼어.”

“아저씨. 냄새가 끊겼다고요?”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대미미였다.

불안해하면서도 화가 난 듯한 분위기다.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흑서는 재빨리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어이쿠, 끊겼다고 해도 끝은 아니야. 이곳에 없다면 밖으로 나갔다는 거고, 그럼 다른 흔적이 남았겠지. 일단은 좀 더 찾아봐야 해.”

대미미는 살짝 볼을 부풀리면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불안하네요. 어서 빨리 찾아야 해요.”

“알았어, 공주님. 최선을 다할게.”

대미미는 바닥을 샅샅이 훑고 다니는 흑서를 지그시 바라보면서도 소호에 대한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건 소호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아무리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 걱정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도 칼에 찔리면 죽는다.

이는 무산학관에서도 늘 강조하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학관에서 졸업하기 위한 수많은 관문들이 있는 것이다. 관문은 빈틈을 줄여서 완벽한 무인을 만들어 내겠다는 교관들의 집념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게 왜 이런 계획을 세워 가지고.’

대미미는 섭주해에 대한 원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대미미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섭주해는 그저 괜찮다는 듯이 안심하라며 손만 흔들었다.

“자, 그럼 저는 제가 할 일을 해야겠네요. 우리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요. 백검회. 맞죠?”

섭주해는 꼿꼿한 자세로 걸음을 옮겨 식탁 옆에 놓여 있는 흰색 가면을 들어 올렸다.

눈과 코가 뻥 뚫려 있는 흰색 가면은 나무로 만든 가면 위에 흰색 천을 덧붙여서 만들어져 있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개성이 강해요. 누가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어요. 조직의 이름을 알리는 게 목적이긴 하겠지만요. 조금 더 은밀한 게 좋지 않을까요?”

섭주해는 가면을 골똘히 응시하며 무언가를 고민했다.

한편 부러진 쇄골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백검회의 사내는 핏발 선 눈으로 그런 섭주해를 노려보았다.

“무산학관 놈들이 여긴 무슨 일이냐……!”

“무산학관이라는 걸 알아보는군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펄럭.

섭주해는 넓은 소맷자락을 뒤로 잘 젖힌 뒤에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백검회 사내와는 한층 더 가까이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천무공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까지 왔었던 것 같은데, 여기서 어디로 옮겼습니까?”

“…….”

“대답을 안 하는군요?”

섭주해는 조서인에게 힐끔 눈짓을 보냈다.

스릉―.

“끄윽……!”

조서인의 창날이 백검회 사내의 부러진 쇄골 위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살가죽 밑에서 뼈가 삐걱거리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하세요.”

섭주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화아악―.

바람도 불지 않는데 갑자기 그의 단정한 머리카락이 흔들리더니 온몸에서 귀기가 감돌았다.

섭주해는 어느새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등골이 시리고 목 뒤가 따끔거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시퍼런 안광이 번뜩이자 백검회의 사내는 겁에 질린 것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난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

“아뇨, 모를 리가 없습니다. 천무공자에 대해 답하세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 어디로 실려 갔죠?”

섭주해의 두 눈에서 귀기가 더욱 짙어졌다. 뿜어지는 위압감, 백검회 사내의 눈빛이 흐려지며 이지가 탁해졌다.

“천무공자…… 천무공자는…….”

백검회의 사내는 더듬거리며 고민하다가 대미미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저쪽으로 갔다고요? 그게 끝입니까? 그 이후로는 보지 못했어요?”

“…….”

“그렇군요.”

섭주해는 상대방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단검에서 손을 뗐다.

귀기가 가라앉고 눈에서 뿜어지던 시퍼런 안광이 사라졌다. 섭주해의 눈짓을 받은 조서인은 곧바로 사내의 혈도를 짚어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통로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조서인과 대미미는 수긍했고, 흑서는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주변을 경계하며 천천히 통로 아래로 내려갔다.

***

소호는 동굴 전체를 관통하는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커다란 용이 발돋움을 하는 듯했다. 천장에선 돌가루가 떨어졌고, 바닥에 고여 있던 물에서는 파문이 일었다.

함께 있던 백검회의 팔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초조한 듯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통로 저편을 노려보았다.

‘하나, 둘. 하나, 둘. 흥분했네.’

소호는 본능적으로 팔검의 호흡수를 세고 있었다.

또르르륵. 톡.

동굴 구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조금이지만 빨라진 듯했다.

잠시 기다리니 평소에 식사를 가져다주던 흰 가면의 사내가 헐레벌떡 안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습격입니다!”

“어디야?”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백귀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소호는 팔검의 뒷모습에서 빨갛게 타오르는 숯처럼 뜨겁고 짙은 분노를 느꼈다.

“나는 간다.”

“예, 계획대로 하셔야죠. 이제 막바지입니다. 오검은 이미 ‘그곳’으로 가 있습니다.”

“그래. 계획대로 해야지. 우리가 꿈꾸는 건…….”

“……백검의 단죄.”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며 백검회의 구호를 읊고, 고개를 끄덕이며 작별하였다.

흰 가면의 사내는 다시 통로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소호는 왠지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가 습격했나 봐요?”

“그래. 지금은 이동해 줘야겠어.”

소호는 팔검의 눈빛에서 분노와 공포를 동시에 보았다.

“누가 왔는데요?”

“아마 흑시군일 거다.”

“흑시군? 동창의?”

“항상 우릴 쫓고 있지. 잡히면 다 죽는다. 너도 마찬가지야.”

“저는 이 싸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잖아요?”

“그놈들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팔검은 담담해서 더욱 신뢰가 가는 말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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