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6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6)
흑시군 백 명과의 싸움이라니. 생각만으로도 흥분되고 긴장되지 않은가.
“이쪽은……헉, 헉. 안 돼……!”
“이쪽이요?”
“지하의 입구 쪽이다. 거긴 위험……. 다른 쪽으로……!”
팔검은 숨을 헐떡이며 경고했다.
소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팔검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흑시군으로 보이는 검은 무복의 사내들이 꽤나 많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
흰색의 투박한 베옷을 입고, 얼굴도 가면을 써서 숨긴 그는 유독 존재감이 강렬했다.
아직 거리가 십 리(里)는 떨어져 있음에도 그 가면의 사내와 눈이 마주친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늦었네요.”
앞에는 가면의 사내, 뒤에는 견검대주 도종환이 쫓아오는 상황이다.
소호는 망설이지 않고 방향을 꺾었다.
오른쪽.
서른 명의 또 다른 흑시군 무리가 그들을 포위하던 방향이다.
“그쪽은……!”
팔검의 경호성이 귓가에 닿는 것과 동시에 소호의 몸이 쏜살같이 앞으로 쏘아졌다.
소호는 무산학관에서 배운 전술과 스스로의 본능을 믿었다.
팔검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속도였다.
땅을 밟은 반탄력이 소호의 몸을 앞으로 밀어 주고 있었다. 일위도강. 극한의 경신술로 공간을 뛰어넘어 순식간에 흑시군들에게 도달했다.
경악으로 치켜뜬 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흑시군을 향해 소호의 각법이 날아갔다.
“적……!”
흑시군들의 반응은 충분히 빨랐다. 방패를 들고, 암기를 투척할 준비를 하고, 일부는 화살을 활에 장전했다.
다만, 소호에 비해 빠르지 못했을 뿐이다.
퍼억!
소호는 바닥을 휩쓰는 듯한 발차기로 흑시군의 다리를 걸고 족쇄에 묶인 양손을 쫙 펼쳐서 흑시군의 방패를 후려쳤다.
터어엉!
“흡!”
황금빛 서광이 번뜩인다 싶더니 흑시군 일인의 몸이 뒤로 붕 떠서 날아가 버렸다.
철로 만들어진 방패가 거칠게 우그러졌다.
뒤따라 달려오던 흑시군들의 대열이 엉켰다. 급격한 제동으로 넘어지는 사람도 발생했다.
근처에 있던 흑시군이 반격하려 했지만 소호는 이미 그를 지나친 상태였다.
질주하는 소호.
일위도강의 신법으로 훌쩍 거리를 벌리니 흑시군들이 모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잡아!”
“둘러싸!”
흑시군들이 일제히 소호를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멀어지는 줄 알았던 소호가 갑자기 다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는 움직임이 마치 하늘을 비상하는 매 같았다.
목표를 노리고 번개같이 쏘아진다.
흑시군의 눈에는 소호의 흰색 비단 무복이 갑자기 커진 듯 보였다.
“흐업!”
가장 앞에 있던 흑시군이 반사적으로 칼을 휘두르자 소호는 합장하듯 모으고 있던 양손을 옆으로 펼쳤다.
촤르륵!
소호의 양손 족쇄를 묶고 있던 쇠사슬이 칼을 휘감는다.
소호는 그 자세 그대로 태극의 원을 그렸다.
빙글 돌아가는 양손.
그는 그 상태로 마치 칼을 타고 넘듯이 몸을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시켰다.
쇠사슬이 칼을 단단하게 휘감고, 소호는 그 상태로 양손을 펼쳐 장력을 유지시켰다.
지이잉―.
칼이 멈추고 쇠사슬이 떨린다.
힘의 균형이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순간, 소호는 앞으로 나오며 강하게 진각을 내딛었다.
터엉!
꾸웅!
황금빛 서광이 다시 한 번 번뜩였다.
강하게 내딛는 진각.
소호의 내공이 양손 장타에 도도하게 흘러 들어갔다.
파캉!
퍽!
마치 가죽 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흑시군이 뒤로 튕겨나갔다.
경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난 쇠사슬이 허공에 흩뿌려진다.
소호는 장타 이후의 여력을 담아 허공에서 태극의 문양을 한 번 더 그린 뒤, 번개같이 양손의 손날을 서로 부딪쳤다.
쩡! 하고 허무하게 두 동강 난 족쇄가 양 팔목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소호는 웃었다.
가벼워진 몸.
사라져 버린 족쇄의 무게 대신 완고한 자신감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이제 시작이네.”
소호는 발로 살짝 걷어차서 바닥에 떨어진 칼을 위로 차올렸다.
포위 벽을 향해 달려드는 그의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터엉! 까가가강―.
서른 명이 넘는 인원에게 망설임 없이 달려든다.
강한 진각과 함께 펼쳐지는 것은 신들린 듯 강맹한 도법이다.
흑시군의 방패도, 방어 위주의 단단한 무공들도 소호를 상대로는 별반 도움이 되질 않았다.
소호의 싸움법은 일반적인 강호 무인들과는 달랐다.
그때그때, 상대방에게 가장 취약한 무공을 사용한다.
짧은 단검에는 긴 창을.
민첩한 권법에는 단단한 방패를 사용해 막는 식이다.
소호는 억지로 강한 힘으로 방어를 깨부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공격들을 피하면서 스스로 균형을 잃게 만드는 방식을 사용했다.
흑시군이 방패로 막는 위쪽을 검으로 때리면서 동시에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방식이다.
소호는 흑시군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단체로 방패를 들고 진형을 짜면 무섭지만, 개개인의 역량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잘 봐줘야 일류에 가까울 정도는 될까?
이류는 확실히 벗어났지만 일류 무림인과 비교해서는 부족하다. 갑주와 온갖 무기를 갖고 있으니 일류 무인들과도 싸워 볼만은 하겠지만……. 절정을 넘어선 무인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
즉, 진형을 무너뜨리고 개개인의 싸움으로 바꾸면 된다.
미묘한 거리감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지금 싸움을 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소호다.
천무공자는, 거리감을 조절하는 것이야말로 특기가 아니던가.
꽈아앙! 퍼벅!
한 손엔 칼을, 다른 한 손으로는 소림의 대력금강장을 뿜어내자 달려들던 흑시군 무인들 세 명의 옆구리가 터져 나갔다.
“커헉!”
신음이 울려 퍼진다.
그들은 터져 나간 무복 사이를 황급히 더듬거렸다.
마치 옆구리가 통째로 뜯겨 나간 듯한 감각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그들은 당황하면서도 휘청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과감한 손속이지만 살계(殺戒)를 열지 않는 것.
그것이 소호의 방식이자 능력이다.
칼과 권장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소호는 마치 무(武)의 화신 같았다. 상대를 뚫고 나가는 움직임에 망설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흑시군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칼을 휘둘러 방패로 막게 만들고, 그 방패와 갑주로는 막을 수 없는 장타(掌打)와 격공장(擊空掌)으로 흑시군을 차례차례 무너뜨렸다.
일격, 일격의 자세에 허점이 없었고, 모든 공격과 타격은 위력이 극에 도달할 때 정확하게 상대에게 적중했다.
회피하는 신법이야말로 무섭다.
흑시군의 공격은 소호를 스치지도 못했다.
퍼버벅! 푸확!
소호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즐거웠다.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고, 방어를 뚫고 공격을 적중시키고, 중간중간에 날아오는 화살과 가죽 주머니는 다시 주인에게로 걷어차서 돌려줬다.
소호 한 명의 무력은 흑시군 서른 명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침내 포위망이 뚫리고 길이 열렸다. 소호가 내딛는 발걸음을 따라 바닥의 흙이 비산했다.
소호는 다시금 달려 나갔다.
흑시군은 화살을 쏘아 대며 소호의 뒤를 다시 추적하려 했지만, 그때 이미 숫자는 삼분의 이로 줄어 있었다.
장쾌한 광경이었다.
달리는 소호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헉, 헉…… 세상에.”
뒤쳐졌던 팔검이 다시 합류한건 소호가 막 싸움터를 벗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그는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쓰러진 열 명가량의 흑시군을 힐끔거렸다.
“천무공자……!”
감탄일까 두려움일까.
팔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반면에 소호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싸움은 즐거웠지만 잠깐 시간을 지체했다. 그들은 본래 흑시군이 막고 있던 우측 방면으로 도주했다.
포위망을 벗어나 모든 추적자들을 뒤에 둔 셈이다.
이제 전력으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될 터.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그들의 도주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온다.”
소호의 귀가 움찔거리며 움직였다.
좌측에서 거센 말발굽 소리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마차였다.
그것도 쌍두마차급의 육중한 소리였다.
달리는 소호와 팔검의 주변에서 점차 나무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이 나타났다.
마차는 그들보다 한발 앞서 앞에 도착했다.
히히힝―.
마차가 멈춰 서자마자 문을 열고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가벼운 몸놀림.
머리카락 한 올도 허투루 흘리지 않은 깔끔한 차림새가 인상적이었다.
소호가 멀리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그 사내였다. 투박한 흰색 무복을 입고 나무 가면을 쓴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까이서 보니 나무 가면은 귀면(鬼面)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치우(蚩尤)라고 했던가.
벽사(闢邪)를 기원하는 고대의 얼굴이다.
눈코입이 모두 가려진 가면인데 대체 어떻게 시선이 마주친 느낌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어째서일까.
소호는 그를 보자마자 짙은 혈향을 느꼈다.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속이 비릴 정도의 피 냄새가 실제로 코끝을 찌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마차를 끌던 말 두 마리는 전력을 다해 달려왔는지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귀면의 사내는 천천히,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지극히 가벼워 날아갈 것만 같다.
편안하게 늘어뜨린 전신에서 치고 들어갈 빈틈은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죽이지 않다니. 여전히 무르구나.”
듣기 좋게 울리는 귀면 사내의 목소리는 퍽 평탄했다.
차분한 목소리는 무척이나 친근했다. 기억보다 성숙했으나 누구인지 알기엔 충분했다.
“……!”
소호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한차례 몸을 떨었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잔뜩 좁혀진 미간, 짙은 눈썹 아래 새카만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상대방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소호는 폐부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숨을 쉴 때마다 얼음장처럼 시린 숨결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시야가 좁아지고 뒷덜미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섬뜩한 기분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길 바라지만, 이미 전신의 모든 감각과 본능은 소호의 생각이 옳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래전의 기억을 뒤져야 했지만 익숙한 신체 비율 덕분에 그가 누구인지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았다.
더 이상 지팡이는 들고 있지 않았으나, 허리에 차고 있는 폭이 좁은 세검 또한 익히 알고 있던 ‘그 사람’의 성명병기다.
“설마, 그럴 리가.”
소호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아직 숨을 헐떡이면서도 검을 빼들고 이미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팔검과는 대조적이었다.
육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소호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가르쳐 준 또래의 소년이 바로 그러하다.
“오랜만이구나, 소호.”
귀면의 사내는 차분한 말로 소호의 의구심을 해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