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07화 (336/686)

9권 7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7)

그 말투, 그 목소리.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준 선배?”

“그래.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은 가능하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억이라는 것은 신기했다.

차분하면서도 산뜻한 말투를 들으니 무산학관을 함께 다닐 때 유준이 싱긋 웃던 얼굴이 반사적으로 생각났다.

공적인 자리에서 남들을 대할 때 사용하던, 마치 벽을 세우는 듯한 의례적인 웃음이다.

무산학관에서의 기억, 함께했던 몇 가지 모험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 저 귀면 너머에선 성장한 유준이 그때의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잘 지냈어요? 무산학관에서 나간 뒤로 어떻게 지냈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

“그 가면을 보니 그런 것 같긴 하네요.”

“그렇지. 난 이게 내 얼굴보다 더 익숙한데, 네게는 이상하게 보이겠군.”

“가면은 벗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안 된다. 그보다 넌 어떻게 지내지? 불패(不敗)의 천무공자라 불린다는 말은 들었다만.”

“하핫, 그냥 애들이 하는 말이죠, 뭐.”

“너무 겸손한 말이군. 무산제전은 더 이상 학관만의 행사가 아니다. 무림이 주목하는 행사가 되었어. 그러니 지금의 평가가 곧 무림의 평가인 거야.”

“글쎄요. 저도 꽤 강해지긴 했는데, 아시다시피 예전에 저도 패배한 적이 있어서요. 제 또래였는데 살기를 뿜으니 너무 강하더라고요. 불패검이라고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죠.”

소호는 어깨를 으쓱했고 유준은 나직하게 웃었다.

“후후, 그랬지. 너도 기억은 하고 있었군.”

“잊을 수 없는 일이죠.”

두 사람은 마치 어제 만났던 사이처럼 어색함이 없다.

소호는 옆에서 팔검이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지금 그는 유준으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보자마자 곧바로 몸을 빼서 도망치지 않은 이유?

간단하다.

도망치면 베인다.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촘촘한 무형기가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다.

무산학관의 불패검은 육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 때보다 더욱 강해졌다.

보자마자 알 수 있는 태양 같은 강함은 아니지만, 거대하고 짙은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측량할 수 없는 존재감이 숨어 있었다.

마치 ‘마을 어르신’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난 육 년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호로서는 티 나지 않게 차근차근 내공을 끌어 올리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신기하네요.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그래. 나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유준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모로 꺾었다.

“백검회와 엮이다니. 좋지 않아. 이건 네게 약속된 미래가 아냐.”

“……엥?”

소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 몰랐는데. 저한테 약속된 미래가 있었어요?”

“물론.”

유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네가 가진 증표, 네가 가진 초대장이 있지 않던가?”

“…….”

소호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철 요대를 붙잡아 감촉을 확인했다.

단단한 철 요대의 안쪽엔 육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사라지지 않는 깊은 흠집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흠집은 소호에게 있어서 많은 의미를 지녔다.

숙적, 결투, 첫 패배.

주변에서 새로운 철 요대로 바꾸라는 조언을 끝까지 거절했던 이유가 바로 이 흠집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야 철 요대를 새 걸로 바꿔 볼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과거의 흠집이 다시 그를 찾아왔다.

그것도 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마차를 타고 말이다.

“그건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네요.”

“흐음.”

“그리고 백검회와 엮였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어요. 저는 그들에게 납치당했었을 뿐이거든요. 지금은 백검회에서 탈출하는 중이에요.”

소호는 족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손목과 발목을 가리켰다.

유준은 맹인이니 보일 리가 없을 테지만, 소호는 그가 초인적인 감각으로 그를 살피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두두두두.

땅이 울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호각 소리와 경호성이 들려왔다. 그들을 쫓던 이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 너는 백검회와는 연관이 없다는 건가?”

“네. 뭐, 그 사람들이 어떤 일들을 하는지 궁금하긴 했지만요. 처음엔 오히려 저를 죽이려고 들었어요.”

“백검회와 척을 졌다니. 그나마 다행이군. 그럼 저자는 뭐지?”

귀면의 시선이 팔검에게로 향했다.

담담한 말투였으나,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짙은 살기가 담겨 있었다.

팔검이 움찔 몸을 흔든다.

소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를 두둔했다.

“저를 탈출시켜 준 사람이에요.”

“백검회인데도 말인가?”

“네. 제가 다치지 않게 도와줬어요.”

“역적의 무리라도 좋은 일을 하나 했군.”

유준의 말투는 신랄했다.

“관리(官吏)처럼 말하시네요, 선배.”

“그분을 위해, 그리고 나라를 위해 일하는 중이다. 관직은 없지만 관리에 가까운 일이긴 하지.”

“그렇군요.”

소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비켜 주실래요?”

“…….”

유준은 침묵했다.

딱딱한 귀면 너머의 유준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소호는 유준의 전신이 시선 안에 들어오도록 방향을 유지한 채 칼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사람과의 관계는 늘 힘들었지. 시간이 지나도 그건 변하지 않는군.”

“사람과의 관계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그건 너라서 그런 게 아닌가?”

“저라서가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솔직하게 대하면 마음을 열어 주거든요.”

“공감할 수 없는 말이군. 역시, 그건 너라서 그런 거다. 솔직하게 대하면 약점만 생겨.”

유준은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다니. 웃음이 나오는군.”

대체 언제 뽑은 것일까.

유준은 손에 들린 세검을 정면 중단으로 겨눈 채 서 있었다.

소호의 칼도 중단을 겨누었다.

세검과 박도.

두 개의 무기가 한 발만 내딛으면 벨 수 있는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네요.”

“그래. 많이 흐르긴 했지.”

소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는 흑시군에 들어가 있어요?”

“아니.”

“그럼 왜 흑시군을 돕죠?”

“흑시군을 지휘하는 사람이 나니까.”

유준의 담담한 대답에 소호는 격동하는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쿵. 쿵. 쿵. 쿵.

철컹. 철컹.

그 사이에 뒤따라오던 흑시군들이 주변을 포위했다. 자신을 견검대주라고 소개했던 도종환도 포위망에 합류해 소리쳤다.

“뭘 하고 있나! 저놈들을 당장 붙잡……!”

유준이 손바닥을 펼친 채 위로 들어 올리자, 도종환은 황급히 말을 멈췄다.

꽤나 권위적인 사람이었는데, 유준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고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도종환을 포함한 모든 흑시군들이 유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곳의 지휘권을 쥔 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육 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꿨지. 너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하지만 선배의 ‘그 사람’을 향한 충성심은 안 변했네요.”

“그건 내가 죽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을 거다.”

유준의 단호한 대답은 육 년 전과 비교해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소호,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분을 위해 함께할 의향이 있나?”

“선배처럼요?”

“그래. 나처럼. 내가 받았던 관문을 통과해라. 그럼 너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

“관문……?”

소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관문은 학관에서도 지긋지긋하게 통과했어요. 이제 겨우 다 통과했는데 또 다른 걸 통과하라고요?”

“그런 애들 장난과는 전혀 다르다.”

“흐음, 믿기지 않는데요.”

“내가 그 증거다.”

유준은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렸다.

“너라면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이미 느끼고 있을 텐데. 아닌가?”

“……”

“원한다면 보여 주겠다. 황실에선 신수를 기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어.”

“신수요?”

“지금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은 살면서 기회가 세 번은 온다고 하더군. 결정해라, 소호. 함께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길을 갈 것이냐.”

유준의 제안은 담담하지만 또한 위협적이었다.

“강요하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요?”

“인생은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는 법이지. 모든 것을 가진 너라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걸 가졌다니. 넘겨짚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못 가진 게 얼마나 많은데요?”

소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그 관문을 통과하면 지금의 선배처럼 온몸에 피 냄새가 배나요?”

“…….”

유준은 왼손 소매를 들어 귀면에 가까이 들이대고 냄새를 맡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 탓에 소매가 살짝 내려오면서, 탄탄하게 단련된 전완근과 그 위에 징그러울 정도로 새겨진 수십 개의 흉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준은 가늘고 긴 손가락들로 허공을 꽉 움켜쥐었다.

“혈향이라……. 그런 말을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다 해도 상관없고.”

“제가 거절하면요?”

“베어야겠지.”

담담한 말투 속에 격정(激情)이 담겼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던 살기가 강렬해졌다. 귀면 너머에서 섬뜩한 한기가 훅― 하고 불어오는 듯했다.

위압감을 느낀 것은 소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싸던 흑시군들이 주춤거리며 반 보를 물러섰다.

“섭섭하네. 선배는 역시 변하지 않았네요. 그리고 이렇게 보니까 제가 아는 사람이 왜 백검회에 들어갔는지 알겠어요.”

“누구지, 그건? 학관 사람인가?”

“지금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에요.”

소호는 유준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뒤 칼을 살짝 기울였다.

소호는 싱긋 웃었다.

상대가 강하다?

언제는 안 그랬던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막강한 방해물을 뛰어넘는다.

그게 천무공자, 장소호였다.

“선배, 사람이 많으면 방해가 되죠?”

“뭐……?”

소호는 유준이 대답을 하려는 찰나에 움직였다.

―귀를 막아요!

“……!”

팔검의 머릿속으로 혜광심어(慧光心語)가 흘러갔다.

역근경이 팔 성에 이르면서 쓸 수 있게 된 소림의 비기였다. 소리가 아닌 뜻을 전달하기에 잘못 이해할 리도 없다.

소호의 몸에서 황금빛 서광이 눈이 부실 정도로 뿜어졌다.

한 손에 칼을 든 채로 마치 승려처럼 합장을 취했다.

자세를 낮추고, 호흡을 크게 들이킨다. 소호의 가슴이 비둘기처럼 부풀어 올랐다.

터엉―.

강하게 내딛는 진각.

땅이 울릴 정도의 강렬한 반탄력이 양발의 용천혈을 통해 소호의 내부로 되돌아왔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땅.

그것이 소호의 단전(丹田)이다.

단전이 좁혀졌다가, 다시 팽창했다. 소호의 미간이 공명하며 상단전(上丹田)이 호응했다.

상단은 곧 자연(自然).

주변의 모든 자연기가 소호의 의지에 화답했다.

“가아아아아알(喝)―!”

거대한 범종이 깨지는 듯한 충격파가 소호의 입을 통해 터져 나갔다.

인근 십 리를 뒤흔드는 듯한 막강한 위력이다.

근처에 있던 대부분의 흑시군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기침을 쿨럭거렸다.

몇몇은 토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지가 흐려진 눈, 대부분이 몸의 균형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

그나마 미리 귀띔을 받아 귀를 막았던 팔검조차 몸을 휘청거렸다.

소호는 곧바로 그의 소매를 잡고 몸을 날렸다.

뒤돌아본 소호의 시선에 휘청거리는 몸으로도 곧바로 몸을 날리다가, 주변을 둘러싼 흑시군에 몸을 부딪치는 유준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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