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08화 (337/686)

9권 8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8)

“큭……!”

유준은 고개를 한 번 좌우로 흔들더니 부딪쳐서 얽혀 있던 흑시군을 옆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죄, 죄송…….”

밀쳐진 흑시군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가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유준은 그를 두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귀면의 시선이 정확하게 소호를 노려본다.

유준이 지체한 건 한 호흡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한 호흡이 거리를 크게 벌려 놓았다. 거센 사자후는 심지어 아직도 유준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 머릿속이 핑핑 돌아서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사자후라니.

맹인이라서 청각과 다른 감각들이 극도로 발달한 유준에게는 가장 큰 약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때의 충격이 남아 있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후.”

유준은 조금이나마 균형 감각이 돌아오는 순간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발을 찰 때마다 그의 몸이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유준은 멀어지고 있는 소호를 향해서 한 줄기의 흰 선이 되었다.

쉬이이익―.

소호의 일위도강은 속도가 엄청났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일 장씩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데, 팔검의 소매를 붙잡고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고 있음에도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팔검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소호가 아무리 힘을 많이 쓴다고 해도 실제로 달리기 위해선 팔검 스스로도 힘을 많이 써야만 했다.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팔검의 다리가 풀리면서 점점 한계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잡아!”

뒤쪽에서 거센 호통이 들려왔다.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 소호의 기억이 맞다면 견검대주 도종환이다.

그는 주변에 명령을 내렸으나, 그때까지도 아직 제대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짜증 섞인 호통 소리는 연이어 들려오는데 쫓아오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소호의 예민한 청각은 그 소란스런 와중에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한줄기 파공음을 들었다.

파라락―.

가장 앞서서 화살처럼 날아오는 자, 유준이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다. 귀면 너머로 전해지는 투기가 무시무시했다.

강렬한 분노와 살기가 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울컥울컥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대론 안 돼.’

소호는 팔검의 소매를 놓았다.

속도가 급격히 느려진다.

하얀 가면 너머로 팔검이 눈을 부릅뜨는 모습이 보였다. 소호는 그에게 맞춰서 속도를 늦췄다.

“먼저 가요.”

“……!”

“무산제전이 끝날 때까지 잡아 두고 싶었다면서? 어차피 그럴 상황도 아니잖아. 나도 적당히 싸우면서 빠질 테니 도망쳐요.”

“나는…… 아니, 우리는…….”

팔검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백검은, 단죄한다.”

“헛소리하지 말아요.”

소호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럴 능력도, 그럴 여유도 안 되잖아요.”

“우린…….”

“저번부터 느꼈는데 백검회는 좀 지나쳐요. 상식적으로 해 볼 만할 때 덤벼야지. 무조건 목숨 걸고 덤비면 일이 해결이 되나? 그건 멋있는 게 아니야. 쓸데없는 희생이지.”

의기? 의로움?

다 좋다.

협객이 별건가.

불의를 보지 못하고 한 목숨 불태워서라도 의기를 세운다는 것이 바로 협의지사(俠義之士)이며 영웅이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곳에서, 단지 붙잡혔다는 이유로 끝까지 자존심 좀 세워 보겠다고 죽는다?

소호는 그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요. 있어 봤자 방해만 돼. 가서 백검회가 계획하는 그 ‘단죄’에 집중해요. 어차피 서로 지켜 줄 사이는 아니잖아요?”

소호는 빙긋 웃으면서 손을 내저은 뒤 완전히 멈춰 섰다.

팔검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지만 그는 결국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굳어진 옆모습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자아, 그럼.”

소호는 몸을 빙글 돌렸다.

섬뜩한 기파가 다가오고 있었다.

몸이 따끔거릴 정도로 강력한 살기. 귀면 모양의 가면이 진짜 얼굴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분노가 느껴졌다.

한 호흡을 따돌렸는데, 방금 한 호흡을 써 버렸다.

다시 따라잡히는 건 순식간일 터.

“유준 선배.”

소호는 투박한 박도를 느슨하게 붙잡고 자세를 낮췄다.

점처럼 멀었던 게 불과 한 호흡전인데, 순식간에 눈앞에 다가왔다.

정면에 백색의 삼베옷이 펄럭이는 모습이 시야를 한가득 채웠다.

“신법이 빨라졌네?”

스아악―.

서로 간에 무슨 대화가 필요할까.

곧바로 날아오는 날카로운 참격에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쒜에에엑―.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준의 검술은 전보다 훨씬 빨라져 있었다.

워낙 빠른 속도로 달려드니 훤한 대낮인데도 암습을 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반원형의 움직임이 아름다울 정도로 깔끔하다.

세검에 담긴 살기가 만월의 달빛처럼 푸르스름했다. 검의 움직임을 보는 순간 이미 검 끝이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엄청난 속도.

보고만 있어도 식은땀이 흐른다.

소호는 황급히 몸을 비틀었다.

오른발을 대각선 뒤로 쭉 빼면서 신체의 중심선을 옆으로 이동시켰다. 박도를 머리 위에서 사선으로 비트니 불꽃이 튀기듯 거센 쇳소리가 났다.

까가가강―!

막강한 위력에 절로 가슴이 철렁했다.

귀면이 눈앞에 있었다.

뿔 달린 괴물의 모습, 두 눈은 부릅뜬 모양이라 소호를 노려보는 듯했다.

쉬이익―.

옆으로 검을 쳐냈나 싶었는데, 은색 점 하나가 눈앞에서 커졌다.

쒜에에엑―!

어느새 다시 돌아온 세검이 목젖을 노리고 찔러 왔다.

쩌어어엉―!

소호는 박도의 옆면에 구멍이 난 것은 아닌지 한 번 살펴봐야만 했다.

검에 실린 기세가 단단하고 강맹했다.

심지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연이어 검이 날아오는데 일격 일격이 위협적이었다.

지금 이 싸움이 생사결(生死決)이라는 실감이 났다.

상대는 진심으로 소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박도의 검 면으로 막았는데 손이 떨릴 정도로 충격이 대단했다.

겉보기와는 다르다. 단순한 찌르기에도 천근거력이 담겨 있는 것이다.

‘강해졌네. 신법이 빨라졌고 무공의 위력도 상승했어. 약점을 보완해 낸 거야.’

소호는 지난 육 년간 자신이 꽤나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유준의 모습을 보니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괄목상대(刮目相對) 정도가 아니라 천지개벽(天地開闢)이었다.

진실로 무서운 자.

유준은 이미 후기지수의 수준이 아니었다.

절정의 경지도 뛰어넘어 자신의 무공을 완성해 가는 강자(强者)가 눈앞에 있었다.

‘이길 수 있을까?’

소호는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상대를 보며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대적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로 무서운 적.

한순간의 방심이 곧바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수준의 상대다.

한 수, 한 수, 펼치는 검술의 깊이가 강호에 이름을 떨친 무림명숙들 이상이다.

‘재밌어. 하지만 두려워.’

소호는 웃었다.

힘든 상대를 만날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심장이 크게 쿵쾅거려서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 정도다.

까아앙!

소호의 박도와 유준의 세검이 단단하게 얽혔다.

밀고 밀리는 힘의 균형이 절묘하게 맞춰졌다.

소호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강해졌네요?”

“그래.”

“이게 신수의 힘인가요?”

“그래. 하지만 아직 절반도 보여 주지도 않았다.”

소호의 웃음이 짙어졌다.

화아아악―.

소호의 몸에서도 황금빛 서광이 눈부시게 빛나며 뻗어 나왔다.

역근경 팔성의 힘이다.

좌수는 손날을 꼿꼿이 세운 체 반장의 예를 취하고, 우수에 든 박도는 칼끝을 바닥으로 향한 채 언제든 치솟아 올라 베어 낼 준비를 했다.

“그럼 보여 주세요.”

호기심이 없다면 소호가 아니다.

도발적인 그 모습에 유준의 검에도 힘이 들어갔다.

쒸이이익― 촤아악!

유준은 평범한 체구에서, 자신의 팔 길이의 몇 배나 되는 거리까지 닿는 검격이 한 호흡에 수십 번이나 쏟아져 나왔다.

분명히 검을 들고 있는데, 마치 채찍을 휘두르는 듯했다.

탄력 있고 날카로운 몸놀림.

수많은 검기들이 소호의 주변을 그물처럼 둘러쌌다.

날카롭게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는 실제로 피부에 닿지 않아도 소름이 돋을 만큼 섬뜩했다.

‘집중해야 해.’

단 한 번이라도 공격에 닿는다면 그 피해는 짐작할 수 없다.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소호의 두 눈은 더욱더 짙은 황금색으로 변해 갔다.

쩌저정―!

소호는 처음에 닿는 검격을 막아내자마자 바닥을 밀듯이 툭 찼다.

마치 길가의 돌멩이를 걷어차듯 가벼운 발놀림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소호는 훨훨 날듯이 뒤로 물러났다.

유준의 검술이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면, 소호는 신법이 달인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다.

칼을 휘두르면서 방향을 이리저리 바꿔서 유준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소호는 일곱 번의 검격을 막아내면서 땅은 고작 단 한 번만 내딛었다.

그나마도 잠깐 내딛고 곧바로 위로 뛰어올라 유준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휘리릭―.

검을 회수한 유준이 왼쪽 다리만 길게 뻗으면서 자세를 낮추고 상단세를 취했다.

칼날이 하늘을 보는 자세.

거기서 공기가 유준 쪽으로 훅―하고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호의 눈이 반짝였다.

예전에 봤던 자세였다.

소호가 살면서 또래 소년에게 유일하게 패배했던 대결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조금 전처럼 뒤로 뛰어서 피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눈도 깜빡일 수 없는 찰나의 순간, 아니나 다를까 허공을 가르며 바닥에서 위로, 거대한 반월의 잔상이 나타났다.

촤아아아아악―.

전면에 검광이 번뜩이고, 바람이 갈라지는 듯한 파공음은 그 다음에나 들렸다.

예전이라면 그 정도로 끝났을 터.

하지만 유준은 훨씬 더 강해져있었다.

마치 거대한 용 한 마리가 위로 승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검격 한 번에, 위로 상승하는 검을 따라 섬뜩한 살기와 뜨끈한 바람 같은 흐름이 위로 솟구쳤다.

찐득하게 녹은 떡을 막대기로 들어 올리듯이, 위로 쳐올리는 유준의 검을 따라서 주변의 공기가 다 딸려 올라가는 듯 보였다.

후와아아악―.

소호는 세 치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검격을 피해 냈다.

피하긴 피했는데, 여파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다.

태풍의 눈을 코앞에 둔 기분이었다.

바람이 한쪽으로 쏠리고, 새하얀 비단 영웅건이 퍽―하고 터져 나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버렸다.

딱딱한 귀면 너머로 소호는 유준과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교감을 느꼈다.

‘이걸로 끝이 아냐.’

소호는 자신의 본능을 무시하지 않았다.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움직임으로 재빨리 몸을 뒤로 날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