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09화 (338/686)

9권 9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9)

변덕스러운 용이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듯하다.

비룡처럼 솟구쳤던 기파가 이번엔 하늘에서 땅으로 번개처럼 떨어져 내렸다.

쒜에에엑―.

군더더기 없는 자세에, 강력한 내공이 실린 수직 참격.

은빛 세검엔 붉은빛이 감도는 검강이 영롱하게 빛났다.

기의 덩어리.

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초인들만의 전유물이 유준의 검에 맺혀 있었다.

소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싸움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으로 동요했다.

검강은 같은 경지에 오른 무인이 사용하는 똑같은 검강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

개세무적(蓋世無敵).

절세고수(絶世高手)의 지표가 바로 검강이라는 것은 모든 무림인들의 상식이 아니던가.

‘검강이라고? 고작 스무 살 언저리에?’

소호는 처음으로 ‘뒤쳐졌다.’는 기분을 알게 되었다.

이 한 수로, 유준은 자신이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절반의 실력만 사용했다는 말이 허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너무나 놀라웠고, 또 한편으론 분하면서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떻게 그 벽을 넘어섰지? 초절정 고수라니! 나도 아직 못 올라갔는데!’

소호의 최대 성과는 역근경을 팔 성까지 익혔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경악하고 칭송할 만한 성과였으나, 황금빛 서광만 비출 뿐 좀처럼 강기의 경지에 오르질 못하니 소호로서는 불만에 차 있었다.

검기를 겨우 내뿜는 정도의 경지에서 벽에 부딪쳐 버린 것이다.

그런데 또래인 유준이 갑자기 그 벽을 깨부수고 나타났다.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나도 학관을 나가는 게 정답이었을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수련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건 마을의 삼촌들도 이야기해 준 것이니까. 무산학관에서는 무인이 갖춰야 할 온갖 소양들을 배웠잖아. 그런데 신수……? 그 관문을 통과하면 나도 벽을 넘을 수 있는 건가?’

소호는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후우우웅―.

콰아앙!

유준의 검강은 무려 일 장(丈) 이 넘는 거리만큼 날아가며 단단한 흙바닥을 폭발하듯 터뜨려 버렸다.

기분 탓일까?

검강을 쓰기 시작한 뒤로 귀면 너머에서 느껴지던 불길한 살기가 더욱 짙어진 듯했다.

지금까진 사람이 상대였다면, 이젠 진짜로 귀신(鬼神)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하얀 옷을 입고 그를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귀물.

백귀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까가가강! 팡!

소호는 박도를 휘둘러 검강의 여파를 막아 내며 이 장이 넘는 거리를 크게 뛰어 물러났다. 그는 방심하지 않고 유준과 충분한 거리를 벌렸다.

파라락―.

바닥에 발을 딛고 나서도, 태극권의 동작으로 두 번이나 몸을 회전시켰다. 양손을 뻗어 내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팡! 하고 뭔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휴우.”

소호는 그제야 몸에 남은 모든 여력을 해소할 수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뒷목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싸늘하고 소름이 돋는다.

유준과 직접 겨뤄 보니 생각보다 무공의 위력이 차이가 컸다.

고작 주방용 칼을 하나 들고 대검을 든 거한과 싸우는 기분이다.

심지어 대검을 든 거한이 빠르기까지 하니 치사하다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지 않은가.

고오오오―.

유준이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소호는 온몸이 따끔따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쿵. 쿵.

사신(死神)의 발소리가 다가온다. 살기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서로 간에 마지막 선은 이미 넘어섰다.

소호는 유준의 검의 사정거리에 들어와 있다.

검을 내치면 곧바로 몸이 닿을 거리다.

아찔한 순간.

소호의 집중력이 급격히 높아졌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왜 자신이 이런 싸움에 휘말렸는지는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백검회? 흑시군?

모두 잊었다.

소호가 가진 모든 감각이 오로지 유준만을 의식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조차 점멸하듯 사라지며 결국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회백색의 공간 안에 소호와 유준만이 존재했다.

전신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황금빛 서광. 두 눈도 황금색으로 빛나면서 극도의 집중 상태에 접어들었다.

틱.

그 때 유준의 손끝이 작은 움직임을 보였다.

그가 새끼손가락을 살짝 풀었다가 다시 검을 거머쥐는 그 순간이었다.

소호는 지체 없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젖혔다.

쒜에에엑―.

“……!”

놀란 것은 유준뿐이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소호의 눈은 유준의 검 끝을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세검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고, 잘려 나간 머리카락들이 허공에 흩날리다가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웅웅―.

폭발하는 기세에 귀가 먹먹해지는 것은 덤이다.

소호는 아래로 몸을 낮췄다.

쉬이이익―.

유준이 찌르기 이후에 곧바로 수평으로 그은 검격이 소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서걱.

배춧잎이 뭉텅 썰려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소호의 목덜미 부근의 비단 옷감이 잘려 나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웃고 있었다.

공격을 피할 수 있다.

통하고 있었다.

검강이 없어도, 비록 무공의 격차가 있어도. 소호는 집중력 하나로 유준과 겨루고 있었다.

파라라락― 쒜에엑―! 까강!

불과 세 호흡 만에 수십 번의 공방이 벌어졌다.

신들린 듯 움직이는 소호와, 그런 소호를 베어서 멈추려는 유준의 싸움이었다.

“이럴 수가.”

소호와 유준의 싸움이 훤히 보이는 길목이었다.

견검대주 도종환을 시작으로 소호의 사자후를 이겨 낸 흑시군의 대원들이 차례차례 모여들어 점점 숫자를 불리고 있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한 청년들이 벌이는 대결인데, 무공만 봐서는 명성이 자자한 강호 명숙들의 결투 못지않았다.

서로 간에 내뿜는 살기, 투기. 그리고 무공의 수준까지 대단했다.

익히 보아 온 백귀(白鬼)의 섬뜩한 검술과 시뻘건 피 색의 검강은 여전히 놀라웠지만, 경악스러운 것은 마치 불법(佛法)의 화신인 양 온몸에서 황금빛 서광을 뿜어내며 한 자루 박도로 백귀를 상대하는 흰색 비단 무복의 귀공자다.

공교롭게도 둘 다 흰색 옷을 입고 있은 탓일까.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선계(仙界)에서 내려온 청년신선들이 검을 겨루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저건 누구냐. 도대체 누가 신수(神獸)가 된 백귀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도종환에게 견검대원 한 명이 다가와 귓속말로 전해 주었다.

“천무공자? 장소호?”

도종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호랑이……. 그래, 그랬군. 그놈이었어. 대인이 말씀하신 그놈이야. 기껏해야 이름 좀 날린 애송이인 줄 알았는데. 저 정도였단 말인가. 무산학관이 그 정도로 대단했던가?”

도종환은 감탄하면서도 난감해했다. 왕진과 나눴던 이야기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그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한편 싸움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검강이 난무하고 산산조각난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소호와 유준의 싸움이 극에 달하는 바로 그 때, 뒤쳐졌던 흑시군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와 도종환에게 속삭였다.

“뭐! 열 명?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뭘 하고 있어. 빨리 끌고 와!”

도종환은 분노에 가득 찬 명령을 내린 뒤, 소호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누가 그랬던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때마침 그에게 좋은 수가 생겨났다.

퍼억!

촤아악!

순식간에 벌어진 수십 초의 공방 끝에 소호의 어깨에서 처음으로 피를 보는 상처가 생겨났다.

상처의 고통을 소호는 느끼지 못했다.

극도의 집중 상태에서 고통 따윈 먼 나라의 일처럼 느껴진 탓이다.

소호는 슬슬 무너지기 시작하는 힘의 균형 속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가장 효과적인 해법을 찾아냈다.

유준의 약점.

소호의 장점.

그 사이의 간극을 조절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었다.

“후우웁!”

소호는 훅― 하고 숨을 들이켰다.

마치 비둘기처럼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유준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깜짝 놀라는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쿵!

소호는 기습적으로 발을 내딛으며 입을 벌리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유준이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황급히 태양혈과 그 인근의 혈 자리 몇 개를 점혈했다.

능숙하게 점혈하는 모습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영리한 자는 같은 수에 두 번 당하지 않는 법이다.

아마 유준은 소호가 처음에 사자후를 쓰는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대비하고 있었을 터.

하지만 그런 대비를 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아……!”

소호는 입을 열고 버럭 소리칠 것처럼 턱 근육을 사용했고, 유준은 황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차아앗!”

문제는 소호가 사자후를 외칠 것처럼 굴다가 기합만 질렀다는 점이다.

극도의 경계 태세를 보이며 사자후를 막으려던 유준이 눈을 부릅떴다.

소호는 씩 웃으면서 유준의 품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빈틈의 빈틈을 노린 공격이었다.

영락없이 사자후라고 생각했기에 모든 것을 놓고 귀만 틀어막았던 유준이다.

품 안으로 파고드는 소호를 속수무책으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오오오―.

소호가 내뻗는 오른손 장타가 거인의 손처럼 크게 느껴졌다.

황금빛 서광이 유준에게로 쏟아졌다.

대력금강장.

부처님의 손처럼 자비로운 손길이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그야말로 무한하다.

퍼어어엉!

양 가죽으로 만든 북채로 가죽 북을 전력으로 치면 이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컥.”

유준은 울컥 치솟는 핏물을 자신의 내공으로 그대로 찍어 눌렀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 마치 장타에 얻어맞은 부위 전체가 통째로 뜯겨나간 듯한 감각이었다.

유준이 익힌 육합구소신공은 뛰어난 내공이었지만,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유준은 청각을 막은 점혈을 풀지 못한 채, 그대로 해왕십삼기의 일격을 전개했다.

쒜에에엑— 푸확!

“……!”

소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가슴이 쩍 하니 갈라졌다.

동귀어진의 한 수라고 할까.

대력금강장에 얻어맞은 유준은 절대로 순순히 맞지 않고, 소호의 가슴을 갈라 버린 것이다.

“큭……!”

소호는 유준이 비틀비틀 물러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정말로 안전한 곳까지 뒤로 휙― 하니 멀어졌다.

그러고는 유준이 점혈을 푸는 것을 보다가 태연하게 질문했다.

“이건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유준과의 거리가 고작 다섯 걸음에 불과한 곳에서였다.

“그 검술은 뭐예요?”

“이놈……! 대화를 나눌 여유가 있나? 검강으로도 네 높은 안목을 채워 주지 못한 모양이군.”

“그럴 리가요. 선배는 강하네요. 지금의 나는 따라가지 못 할 정도로. 지금은 그저 궁금할 뿐이에요. 대체 어떤 무공을 익혔기에 이렇게 강한지.”

“……그런가.”

“어디 출신 무공이에요? 학관에서도 못 봤고, 분명히 처음 보는 무공인데. 예전에는 해왕십삼기만 썼었잖아요?”

“으음.”

소호는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듯 태연히 물었지만 그리 쉽게 할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강호의 어떤 무림인이 자신의 무공을 소상히 밝힌단 말인가.

심지어 주변에선 흑시군들이 속속들이 다가오고 있는 와중이었다.

섣불리 비밀을 떠들 때가 아니었다.

“그런 게 너다운 건가.”

유준은 상대가 소호라서 모든 것을 납득하는 모양이었다.

“천무공자는 세상 모든 무공을 익혔다던데, 모르는 것도 있나?”

“당연히 많죠. 다 헛소문이에요. 저는 무산학관에서 배우는 것만 다 배운 거예요. 아직 절반 이상의 무공이 저 바깥세상에 있다구요.”

마치 세상의 모든 꿈이 거기에 있는 듯이 소호는 결연하게 말했다.

유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학관에선 다 배웠다? 여전히 오만하군.”

“제가요? 에이, 배울 게 없어서 먼저 뛰쳐나간 사람이 그렇게 말하시면 안 되죠.”

“…….”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어조는 태연하지만, 소호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갈라진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앞섶을 붉게 물들였다.

“청조각.”

“청조각……! 아! 그러면 모르죠. 무산학관에 없는 무공이니까. 해왕십삼기에 청조각의 검술이라……. 어째 바다랑 연관이 많네요?”

“바다는 아직 한 번도 못 봤다.”

소호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제 슬슬 까끌까끌해진 턱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못 본 것 같네요. 이런, 바다도 못 보고 살아왔다니. 인생 헛살았어요.”

“또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

잠시 자세를 낮추던 유준이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이번에도 역시 세검에서 붉은색 강기가 오연하게 빛났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변을 둘러싼 흑시군으로부터 비명과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