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10화 (339/686)

9권 10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10)

“이놈, 계속 반항한다! 재갈이라도 채워!”

양팔을 잡고 끌고 오다가 팔꿈치에 얼굴을 얻어맞은 흑시군이 사납게 소리쳤다.

끌려온 사내는 소호의 눈에 익숙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벗겨진 가면은 목에 걸린 채로 덜렁거렸고, 얼굴은 피투성이에 퉁퉁 부어 있었지만 지난 이틀간 함께 있었던 사람의 체형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건 소호가 아니었다.

누군지는 한눈에 알아봤다.

한참 전에 도망쳤다고 생각했던 팔검이 어째선지 흑시군에 붙잡힌 것이다.

“크륵큭.”

피투성이의 사내, 팔검은 목에서 끓던 피가래를 퉤, 하고 뱉어 냈다. 당연히 그에게 재갈을 채우려 들던 흑시군을 향해서였다. 옷에 끈적끈적한 핏덩이가 묻은 흑시군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퍼억!

“……!”

거칠게 걷어차인 팔검은 비명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는 무릎이 꺾인 채 질질 끌려왔다. 팔검의 뒤로, 마치 붓으로 그린 듯이 핏자국이 길게 남았다.

“사자후에 당해 쓰러져 있던 흑시군들이 열 명이나 당했습니다. 그 뒤에 벌어진 싸움에서도 두 명이 부상을 당해서 중상을…….”

흑시군은 차마 끝까지 보고를 마치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단 한 사람에게 당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피해가 컸던 탓이다.

나타나면 무림 문파도 벌벌 떤다고 소문 난 흑시군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의 분노는 소호에게도 향했다.

도종환의 너머, 유준과 대치하며 서 있는 소호를 바라보는 눈빛에 원망과 살기가 가득했다.

“건방진 놈. 도망친 줄 알았더니 몰래 돌아와서 습격을 해?”

견검대주 도종환이 으르렁거리듯이 물었다.

팔검은 피가래가 끓는 목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크륵! 큭큭. 도망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네놈들 중에 강한 놈들은 다 빠져나간 지금이라면 큰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쿨럭! 쿨럭! 크하핫!”

팔검은 속이 다 후련하다는 듯이 발작적으로 웃어 댔다.

도종환은 팔검의 얼굴을 발로 걷어찼다.

뻐억―!

팔검의 목이 부러질 듯이 꺾였다가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실성한 듯이 꺽꺽거리며 웃는 팔검의 눈빛은 여전히 꺾이지 않고 빛났다.

결연한 그 모습에 도종화은 더욱 분노한 듯 보였다.

“내가 언제 네놈한테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나? 입 닥치고 있어라. 비겁한 역적 놈.”

도종환은 팔검의 뒷덜미를 붙잡고 거칠게 들어 올렸다.

그는 저항하는 팔검의 허리를 몇 번 걷어찬 뒤, 왼팔로 뒤에서 목을 졸랐다.

“끄윽, 크륵!”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팔검을 억지로 질질 끌면서, 도종환은 소호와 유준에게로 다가왔다.

“자, 두 분 다 그만 싸우시지요.”

놀랍게도 도종환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목이 졸린 와중에 발작적으로 몸을 떠는 팔검과는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천무공자. 대인께서 당신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뛰어난지 말씀하시고 꼭 같은 편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저희와 합류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그 칼을 버리시면 그 이상의 상처는 없을 거라 약속합니다.”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준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도종환은 지금 이곳에서 자기만 이성적이라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마치 자신의 마음을 아무도 못 알아준다는 듯 서러운 표정을 연기하는 태도가 딱 그러했다.

소호가 무산학관에서 배운 것은 싸우는 방법만이 아니었다.

적들을 파악하고, 전세를 뒤집을 만한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법도 배웠다.

강하지만 무뚝뚝하고 인간관계가 서툰 유준.

끊임없이 책략을 만들고, 어떻게든 유준의 머리 위로 올라가려 드는 도종환.

얼핏 공손해 보이지만 도종환이 상대를 깔아보는 듯이 행동하는 것은 분명했다.

심지어 팔검을 끌고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돌발 행동을 하기 전에 유준의 의사를 묻지도 않았다.

즉,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삐꺽거리는구나.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흑시군도 완벽한 조직은 아니야.’

당연한 일이지만 소호는 도종환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축 늘어진 팔검을 지그시 응시할 뿐이다.

소호와 팔검.

두 사람은 이틀간 함께 있으며 친분이 생기긴 했지만 서로의 입장이 있으니 친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서로 간에 친해질 이유도, 친해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팔검이 흑시군 열 명을 죽이고 나서 잡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비정 강호라는 말이 왜 있던가.

그 자리에서 쳐 죽이지 않고 끌고 온 것만 해도 도종환의 인내심이 대단하다고 쳐 줘야 할 판국이다.

피차 목숨을 걸고 싸우는 무림인들 사이에 도의 운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않던가.

‘그런데…….’

그런데 신기했다.

소호는, 팔검의 이런 비참한 꼴을 보고 있으니 꼭 말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팔검이 흑시군을 열 명이나 죽였다고 하는데도, 이렇게 눈앞에 있으니 그가 불쌍해 보인다.

“천무공자……. 큭큭…… 세상을 좀 배워 봐…….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 코앞도 못 보는…… 장님…….”

갑자기 뭔가를 말하기 시작하는 팔검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초점 없는 눈빛. 흐리멍덩한 얼굴에선 이미 이성의 빛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종환은 소호가 대답해 주지 않자 더욱 성질이 났는지 팔검의 목을 더욱 강하게 졸랐다.

“조용히 해라. 네놈이 떠들 자리가 아냐.”

도종환이 눈을 가늘게 뜨니 마치 먹잇감을 입에 넣기 전에 숨통을 조르는 큰 뱀 같았다. 팔검은 크륵거리며 피거품만 토해 냈다.

도종환은 그 자세 그대로 선량한 얼굴을 가장했다.

“자아, 어쩌시겠습니까? 아까 굳이 소맷자락을 잡으면서까지 데리고 가던 자를 버리실 겁니까? 이자를 살리려고 하셨지요? 이 버러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생기면 항복해 주시겠습니까?”

상대방의 속이 너무 훤히 드러나면 오히려 우스운 법이다.

소호는 너무 어이가 없어 비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살리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그 심정은 소호뿐만이 아닌 듯했다.

갑자기 유준이 검 끝을 내렸다. 섬뜩한 귀면(鬼面)의 시선이 도종환에게로 돌아갔다.

“때마침 잘됐군. 소호. 너의 가면을 벗길 차례다.”

“……뭐라고요?”

“네가, 불살(不殺)을 유지하는 그 철없는 오만함. 치기 어린 투정. 예전부터 전부 마음에 안 들었었다. 이참에 뭔가를 깨닫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유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도 대주를 죽여라. 그러면 더 이상 쫓지 않겠다.”

유준은 검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도종환을 가리켰다.

“……!”

장내의 모두가 침묵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뻣뻣하게 굳은 채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도종환의 표정은 압권이었다.

충격과 공포, 그리고 배신감이 뒤섞여 소호가 처음 보는 표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백귀공!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소호. 너라면 가능할 텐데.”

“백귀공!”

유준은 악을 쓰는 도종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딱딱한 나무 가면 너머로 유준의 도발적인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도종환을 죽여라?

같은 편인데?

게다가 팔검의 목을 조른 채로 인질처럼 붙잡고 있는데?

유준의 말은 여러모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소호가 무엇을 꺼리는지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소호는 찐득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온몸을 옥죄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압박감이라고 불리는 감정이다.

소호는 그게 자신에게 가능한지를 자문했고, 가능하다는 답을 내렸다.

도종환도 바보는 아니다.

무공이 약한 사람도 아니고, 어딜 가나 일류 소리는 들을 만한 사람이다.

심지어 지금은 위협을 느꼈는지 검을 빼들고 허튼수작을 부리면 팔검부터 죽이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기까지 했다.

“쓸모없는 짓.”

하지만 가능은 했다.

소호의 머릿속에서 도종환을 제압할 수 있는 투로, 그가 사용할 법한 무공과 그에 대한 대응책들이 실제 이뤄지고 있는 일들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구잡이로 수도 없이 떠오르고, 실패하는 것들이 사라지다가 결국 몇 개만이 남았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는 소호도 모른다.

그저 머릿속에서 멋대로 떠올랐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힌 듯한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소호는 결국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유준을 믿어도 되는가?’

소호의 마음속 의문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유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생각은 어떤가? 내가 거짓말을 할 것 같나?”

“……아뇨.”

“약속은 지킨다. 그러니 저자를 없애 봐.”

분명히 담담한 목소린데, 기이하게도 해 볼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이 도발하는 느낌이 든다.

고오오오―.

소호의 눈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세상 모든 것이 느리게 가는 듯한 묘한 감각 속에서, 최단거리로 도종환만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경로가 훤히 보였다.

분명히 가능했다.

소호의 신법과 원하는 목표와의 거리를 정확하게 잴 수 있는 안법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박도를 던져서 죽일 수도 있다.

꾸욱―.

칼을 움켜쥐고 있던 소호의 손이 떨렸다.

고민을 막아 준 것은 기절해 있던 팔검이었다.

쿨럭, 하고 뱉어 내는 것은 누가 봐도 상세가 심각한 핏덩이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입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들었다

“나는…….”

소호의 살기가 사라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소호는 반성했다.

어째서 유준의 말 몇 마디에 휘둘렸는가.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단지 조건이 좋기 때문이었을까.

“난 안 죽일 거예요.”

소호는 결정을 내리고 단호히 말했다.

수적으로 열세에 있으면서도 굽히지 않는 신념.

확고한 자기 생각을 담아서 내린 결정이다.

“역시.”

그에 반해 유준은 그럴 거라 미리 생각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자신의 검을 내리그었다.

촤아아악―!

“……!”

움직임이 먼저, 비명은 그 뒤에 튀어나왔다.

대체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팔검의 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두 동강 나듯 반으로 베였다.

비명을 지른 것은 도종환이었다.

팔검의 목을 붙잡고 있던 그의 왼손이 손목 아래에서 통째로 잘려 나가 바닥에 툭 떨어진 것이다.

“끄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 명의 숨통을 끊고, 한 명의 팔을 잘라 내다니.

“내 팔! 내 팔! 으아악!”

유준은 고함을 질러 대는 도종환에게로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