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11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11)
“어리석은 짓을 했군요, 도 대주. 이런 어설픈 행동으로 날 휘두르려 하다니.”
유준은 뒤로 살짝 몸을 빼는가 싶더니, 튕기듯이 몸을 날려 팔검의 가슴 한가운데를 검으로 푹 찔렀다.
갈비뼈를 건드리지 않고 심장을 찌르는 절묘한 각도였다.
날카로운 세검은, 마치 진흙 속을 찌른 것처럼 별다른 저항 없이 몸속으로 쑥 밀려들어 갔다.
“큽.”
팔검은 헛바람을 들이켰으나, 기이하게도 심장이 찔리자 두 눈에서 더욱 또렷하게 초점이 잡혔다.
죽기 직전 생기를 그러모은 팔검이 회광반조(回光返照)를 보인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백검은 반드시 흑시를 단죄한다(白劍必斷罪黑矢)……!”
목소리가 나직했는데도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은 팔검의 마지막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다 죽어 가는 자의 한마디가 그들 모두를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쉽게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한 사람이, 어떻게 한곳에 이렇게나 큰 집념과 원한을 갖게 된 것일까.
팔검은 허공을 보며 웃었다.
“하북 장산파여, 그립구나……!”
그는 자신의 고향, 자신의 사문(師門)을 중얼거렸다.
자신을 검으로 찌른 유준을 보며 광소를 멈추지 않다가 갑자기 입안에 든 무언가를 뱉으려 들었다.
“풉.”
퍽―!
유준은 번개같이 왼손을 뻗어 팔검이 입을 벌릴 수 없도록 턱을 붙잡았다.
“흡.”
암기 발출에 실패했음에도 팔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는 너무 즐거워서 미칠 것 같은 얼굴로 입속에 있는 무언가를 빠드득 깨물었다.
“……!”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유준은 한 발로 팔검의 가슴을 걷어차면서 몸을 뒤로 날렸다.
자연스럽게 검이 뽑혔다. 유준은 물 찬 제비처럼 날렵한 몸놀림으로 뒤로 훨훨 날아갔고, 팔검은 그 반동으로 튕기듯이 뒤로 날아갔다.
푸화악―.
팔검의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진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새빨간 피가 쥐어짜듯이 튀어나와 허공을 수놓았다.
소호는 팔검의 몸이 서서히 뒤로 넘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가슴을 걷어차인 팔검은 뒤쪽에서 울부짖던 도종환과 부딪쳤다.
고오오오―.
푸확!
불꽃이 피어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광기에 차 웃고 있던 팔검의 입.
얼굴 전체가 내부에서 치솟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퍽― 하고, 마치 과일이 깨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터져 버렸다.
눈, 코, 입이 있던 부분부터 불꽃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끔찍하고 잔혹한 광경이었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터져 나온 것은 덤이다.
쿠와아아―!
백탁(白濁)색의 액체는 팔검의 몸과 닿는 순간 시뻘건 불꽃이 되어 활활 불타올랐다.
불꽃은 탐욕스러웠다.
주변에 닿는 모든 것들을 똑같이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심지어 튀어나간 액체가 팔검의 가슴에서 뿜어지던 피와 만나 허공에서 불타오르기까지 했다.
허공에서 산란하는 불꽃은 마치 팔검의 집념만큼이나 강렬하고 극단적이다.
소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지하 감옥에서 함께 갇혀 있는 동안에 팔검과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북? 장산파라고요?”
“들어 보지 못한 곳이겠지? 당연하다. 작은 문파니까. 삼대(三代)를 거슬러 올라가도 하급 무관 하나 배출한 게 업적의 전부인 곳이었다. 시골 마을에선 그것도 큰 감투긴 하지만……. 솔직히 무공도 별 볼일 없었지. 그래도 모두가 열심히 수련했다. 먹고살기 위해 농사를 지으면서 수련하는 게 어떤 건지 넌 모르겠지.”
“어, 그건 어떤지 잘 아는데……. 으음, 아무튼 계속 말해 주세요.”
“네가? 농사를? 그럴 리가.”
“에이, 더덕 농사도 지어 봤어요. 토끼도 잡아먹어 봤고요. 들에서 뛰놀면서 하는 건 대부분 해 봤어요. ……벌레는 못 먹지만. 아무튼 그래서요?”
“……믿기지가 않는군. 어쨌든, 장산파에선 진전이 더뎌도 다 같이 느리니 즐거웠다. 하루는 사형이 이기고, 하루는 사제가 이기고, 하루는 내가 이기고. 무공 실력도 다 고만고만했지.”
“즐거웠던 것 같네요.”
“즐거웠었다. 흑시군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이 동네에 무공을 익힌 게 몇 명이고,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밝혀 보라면서 패악질을 부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떻게 당했어요?”
“잔인하게,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듯이 짓밟혔지. 사부님은 자결했다. 사형은 숨만 쉬는 산송장이 됐고, 사제는 다리병신이 됐다. 나는…… 그날, 멀리 장을 보러 갔었다. 나만 멀쩡했지.”
“그래도 다행이네요.”
“다행? 아니, 나는 지금까지도 매일 생각한다. 차라리 그날 같이 싸우고, 같이 짓밟혔더라면. 그래서 셋 다 장렬히 죽었다면 이렇게나 원통하진 않았을 텐데.”
“…….”
“미안하군, 넋두리를 해서. 왠지 너에겐 속이야기를 하게 되는군. 이상한 일이다. 넌 나랑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텐데.”
“복수할 거예요?”
“할 거다. 내 목숨을 불태워서라도. 흑시군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릴 것이야.”
“으음…….”
“그게 나 같은 놈을 믿고 상승 무공을 아낌없이 전수해준 백검회에 대한 의리이고, 나라를 위한 대의이며, 장산파에 대한 내 개인적인 복수이기도 하다.”
“의외로 말을 잘하네요. 그래도 목숨까지 불태우진 마요. 삼촌들이 그랬어요.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소용없다고. 전쟁터에서도 끝까지 살아야 뭔가를 더 해 볼 수 있대요. 사람이 뭐든지 한 번에 성공할 수는 없잖아요? 실패해도 일단 살아남아서 다음에 성공하면 되는 거지.”
“고마운 말이군. 생각은 해 보겠다.”
“결국 불태웠네요.”
소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북 장산파 출신의 무인.
아직도 본명을 모르는, 백검회의 무인, 팔검.
그는 온몸이 활활 타오르면서 마지막에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백린탄은 너무 잔인하네.”
심지어 함께 갇혀 있던 내내 팔검도 입속에 백린탄을 넣고 있었다는 게 더욱 충격적이었다.
백검회라는 집단은 무서운 곳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의문이 생겼다.
위군은?
무산학관의 동료이자 오랜 시간 보아 온 그 친구도, 입 안에 백린탄을 넣고 살아온 것일까?
고오오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퍽, 퍽. 소리가 나면서 공기가 터지기까지 했다. 이러다 산불이 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끄아아아악!”
도종환이 액체가 튀어서 활활 불타고 있는 자신의 팔을 다른 쪽 손으로 두드리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불꽃이 불꽃을 부르고 있었다. 도종환의 잘려 나간 왼쪽 팔에서 시작된 불꽃이 어깨까지 번졌다.
손이 잘린 것만 해도 아픈데, 거기에 불까지 붙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도종환은 화살을 맞은 멧돼지처럼 비명을 지르며 발작했다.
근처의 흑시군이 달려들어 불을 끄려 노력했지만 불은 기세가 죽지 않았다.
천으로 누르니 더 번지지는 않았으나, 도종환의 왼팔과 왼쪽 어깨 전체가 화상을 입어 참혹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역시 백검회는 대단하군.”
유준은 하얀 천으로 왼손을 닦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면 때문에 안색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무표정한 얼굴일 것이 분명했다.
“소호, 이건 다 네 탓이다. 네가 도 대주만 죽였어도 이자는 죽지 않았어.”
소호는 유준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외치고 싶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유준의 의견에 동의하는 또 다른 ‘장소호’가 있었다.
유준의 말은 냉정하지만 틀리지 않았다.
만약 불살(不殺)이니 뭐니 멋 부리지 않고 곧바로 적을 죽였다면 어땠을까?
유준은 빈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니 팔검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이젠 하체까지 활활 불타고 있는, 저런 비참한 모습으로는 더더욱 죽지 않았다.
“네가 결단을 빠르게 내리지 못한 탓이다. 그 탓에 자기 분수 이상의 욕심만 가득했던 이자 대신 저렇게 신념이 강한 무인이 당한 거야. 네 탓이다, 장소호.”
유준은 하얀 천으로 자신의 검날도 한 번 닦아 낸 뒤, 그대로 허리춤의 검집에 도로 납검했다.
더러운 걸 닦아 낸 흰 천은 바닥에 던져서 버려 버렸다.
“흑시군.”
유준이 손을 들어 올리자, 흑시군들은 일제히 움직여 자세를 갖춰서 정렬했다.
공포와 규율.
흑시군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강자인 유준이 명을 내리자, 도종환이 명령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강한 기세를 뿜어냈다.
“누군가를 죽이지 못하는 멍청한 놈이다. 마음껏 물어뜯고 잡아와.”
유준이 손을 내리쳤다.
기르던 개에게 물어뜯으라고 명령을 내리듯, 안 그래도 감정적으로 억눌려 있던 흑시군들이 모두 살기 가득한 기세를 뿜어냈다.
마치 눈빛에 무게가 실린 듯했다.
척. 척.
쿠웅! 쿠웅!
흑시군이 검을 뽑고, 방패를 들었다.
그들은 대열을 맞춰 선 채로 유준을 지나쳐서 소호에게로 달려들었다.
소호는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이제 와선 정면 승부를 고집할 이유도, 의미도 없었다. 가슴의 상처는 점혈을 통해 지혈시켰다.
몸을 날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유준은, 귀면 가면을 쓴 채, 묵묵히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잡아!”
“활을 쏴라!”
일위도강 신법이 펼쳐지며, 소호는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검은색 화살이 소호의 등을 향해 날아왔다.
기나긴 추격전의 시작이었다.
***
숭산은 고요하다.
무공의 성지인 소림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산 전체가 갖고 있는 분위기부터가 그러했다.
하남의 복건산계(伏牛山系)에 들어가 있으며 숭산 하나의 크기만 해도 웬만한 도시 몇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크니, 그 거대하고 풍요로운 산세야말로 측량할 수 없을 지경이다.
숭산은 역사도 깊었다. 크게 태실봉과 소실봉으로 나뉘며 북쪽으로는 황하와 낙수, 남쪽으로는 영수와 기산이 있다.
서쪽에는 오래된 도읍지인 번량이, 동쪽으로는 유명한 고도(故都) 낙양이 있어 판락양경 기내명산(汴洛兩京, 畿內名山)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중원 오악(五岳) 중의 중악(中岳)이라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다.
사방이 다 명소들로 둘러싸여 있는 명당이니, 숭산이야말로 중심이라는 뜻의 중(中)자와 어울린다고 본 것이다.
숭산에 존재하는 일흔두 개의 봉우리에는 각각 절이 하나씩 있으며, 소림사는 그 수많은 절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무학의 성지인 소림마저 품 안에 있는 일개 사찰로 만드는 그 거대한 그릇이야말로 숭산을 숭산답게 만드는 가치인 것이다.
“…….”
한 명, 온몸을 붕대로 감은 거대한 체구의 승려가 길도 없는 산속을 묵묵히 걸어갔다.
분명히 승복을 입고 있었지만, 붕대 사이로 드러난 눈빛은 승려라기엔 너무 강렬했고, 그렇다고 악인이라 하기엔 너무나 맑았다.
그가 조금 더 걸음을 옮기자 산속의 공기가 웅성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혈향이 짙어져 있었다.
키가 큰 나무들 사이로 본래는 하얀색 비단 옷이었을, ‘피 색깔의 무복’을 입은 한 청년이 숨을 쌕쌕거리며 짐승처럼 몸을 낮추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승려를 좋게 보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뿜어지는 투기.
청년은 섬뜩하리만치 정확하게 무형기를 운용하면서 승려의 무력을 가늠하려 했고, 그 속에 잠재된 무시무시한 힘을 알아챘다.
“누구……시죠?”
목소리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틀 밤낮을 잠도 안 자고 싸운 듯한 모습이다.
승려.
소림에서 받은 법명은 범천이며, 과거에는 푸른 하늘의 늑대[蒼天狼]라 불리던 그는 이렇게, 소호와 처음으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