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12화 (341/686)

9권 12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12)

진정한 무인이라면 정기신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말은 진부할 정도로 당연한 일이었다.

심성과 내공이 뛰어나다고 해서 고수라고 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무공의 기예(技藝)만 뛰어나 봤자 반쪽짜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조건에서든 완벽히 가진바 무예를 선보이는 자가 진정한 무인이다.

소호는 그런 면에서 본인의 신체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그는 들이쉬고 내뱉는 숨을 미세한 양까지 조절할 수 있었다. 본인이 얼마나 깊게 숨을 쉴 수 있는지, 한계까지 숨을 들이마신 뒤로 얼마나 되는 시간 동안 숨을 참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임독양맥을 포함한 기경팔맥에 흐르는 피와 내공, 사지육신의 근맥 하나하나를 모두 제각각 움직일 수도 있는 게 바로 소호다.

그런데 그 뛰어난 자각 능력이 지금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사실까지도 명확하게 알려 주는 것이다.

마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봉화대에 연기가 올라오고, 성내에 경종을 울리는 것과 같다.

가슴을 갈라놓은 유준의 검격, 좌측 허벅지 부근에 박혀 있는 검은색 화살 한 대와, 오른쪽 귓불과 목덜미를 길게 가른 상처까지 모든 것들이 전부 원인이다.

그 밖에도 자잘한 자상들까지 모두 합쳐지니 낡아서 삐걱대는 수레처럼 조금만 움직여도 전신에서 끔찍한 고통이 예악(禮樂)을 연주하듯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하아, 하아.”

소호는 숨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눌러 줘야만 했다.

이틀간의 추격전은 소호의 혼을 쏙 빼놓았다.

잠시 눈 붙일 시간도 없이 도주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겪어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치열하다 못해 처절한 싸움 끝에, 그래도 끝까지 따라붙은 흑시군 추적자들은 직접 싸워서 쓰러뜨렸고, 나머지는 다른 방향으로 추적하도록 따돌렸다.

흑시군을 쓰러뜨리는 데에는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방패를 들고, 가죽 갑옷까지 입은 그들은 웬만한 타격은 무시한 채 공격하기 일쑤다.

그런 자들을 쓰러뜨리려면 급소를 정확하게 공격해야만 했다. 게다가 죽이지 않고 쓰러뜨리려니 배는 더 힘든 일이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불살(不殺)을 고집하는가?

지금은 소호도 설명할 수 없다.

그저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싸움에 취해서 손속을 과하게 쓰려고 할 때마다 치솟는 살기를 꾹 눌러 참아 왔다.

한 번 목숨을 취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나락에 빠져들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그 덕분인지 소호의 몸은 지금 한계 이상을 달려 버린 말과 같았다.

당장 피를 토하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폐부(肺腑)가 들썩거리고 숨에서 쇠 냄새가 났다.

이젠 한계였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스읍―, 하아. 스읍―, 하아.”

삐이―.

소호는 이명이 들리는 귀를 손으로 문질렀다. 머리가 잘 돌아가질 않았다. 앞을 살피는데 시야가 흐릿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몸이 약해질수록 기감이 예민해져서 무형기가 마치 수족처럼 잘 움직여진다는 것이다.

그런 무형기로 감지해 낸 위험천만한 인물.

소호가 만전(萬全)의 상태였다 하더라도 감히 상대할 엄두도 내기 힘들 막강한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도대체 누구야?’

새로 나타난 상대는 분명 승복을 입었다.

일만 명 중 한 명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덩치에,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위험한 사람으로 보였다.

무형기로 느껴진 그의 무공은 적어도 무림 십대고수의 수준.

아니, 어쩌면 아버지와도 비견된다고. 소호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스릉―.

다행히 손에 잡고 있는 무기의 감촉은 소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묵직하고, 무게 중심이 잘 잡혀 있는 박도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칼을 원하는 방향으로 휘두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직 싸울 수 있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어째서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는지는 지금의 소호에게 있어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지난 이틀간의 시간이 소호에게 준 교훈은 단 하나였다.

―방심하지 마라.

적들은 무자비하며, 작은 약점조차 이용하기를 꺼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철저하게 배웠다. 잘 따돌렸는지 퇴로를 확인하는 사이 화살이 허벅지에 박혔고, 상대가 만만하다고 방심했을 때 귓불과 목덜미를 베였다.

소호는 누구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 저 거구의 승려를 적으로 규정했다.

절박한 상황에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었으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적이 있으면 싸운다.

마치 들짐승처럼 투쟁심을 드러내며, 박도를 휘두를 준비를 할 뿐이었다.

“스으읍―.”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챠하앗!”

소호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천무공자는 아무리 만신창이의 몸이라도 가진 바 한계까지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왼쪽 허벅지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둔부와 종아리의 힘을 이 할가량 더 쓴다. 팔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허리와 광배근의 힘을 절반가량 더 사용해 전신의 힘을 사용한다.

쒜에에에엑―.

한 손으로 내리치는 도격이었지만, 온몸의 무게와 기경팔맥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역근경 진기를 가득 담았으니 그 위력은 천근 거력에 필적한다.

거구의 승려는 자신의 어깨를 쪼갤 듯이 내리치는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분명히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 맨손인데도, 마치 그에게 커다랗고 묵직한 대도(大刀)가 한 자루 쥐어져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소호는, 자신의 그 예상이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화아아악―.

“……!”

숨이 턱― 하니 막힌다.

풀려 나오는 기세가 막강했다.

막혔던 둑이 무너진 것처럼 승려의 몸에서 물밀 듯이 밀려드는 기파가 소호의 몸과 정신을 마비시켰다.

어두운 밤에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난다면 이런 느낌일까.

전신이 뻣뻣하게 굳고, 너무 소름이 끼쳐서 온몸의 털이 위로 곤두섰다.

소호는 아버지와 겨룰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진 바 모든 것이 박살 나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소호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우우웅―.

승려의 오른쪽 손에는 기(氣)로 만들어진 푸른빛 강기가 커다란 대도의 형상을 유지하며 선명하게 솟아오른 상태였다.

파캉!

소호가 휘두른 박도가 강기에 닿자마자 절반으로 쪼개졌다.

부러진 칼날 파편은 강기의 힘에 휩쓸려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고오오오오―.

승려의 동작은 단순했다.

양손으로 대도를 감아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가 무게 중심을 낮추면서 비스듬히 내리치는, 단순한 일격.

그 단순한 한 번의 공격에 소호는 하찮은 돌멩이처럼 뒤로 튕겨져서 근처의 땅바닥에 거칠게 처박혔다.

“쿠왁!”

소호는 피를 토했다.

막강한 기의 흐름이 땅바닥에 처박힌 지금도 전신의 혈도를 강타하면서 몸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만들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검이 부러지면서 대부분의 힘을 해소했음에도 이 정도다.

사람이 아니라 천신(天神)의 일격 같았다.

“하핫…… 무슨, 이런…….”

소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상대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찌 이런 인간이 있을까.

다시 일어나기 위해 땅을 짚는데도 양팔과 양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데 신기했다.

고통으로 고통을 잊는달까.

어느새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느끼던 고통들은 다 사라지고, 단 하나, 승려가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던 도법의 모습만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상대방 무공의 약점?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거리감?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일시에 대응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단 하나다.

“아……!”

소호는 멍한 머리로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했다.

예전의 가르침 따위는 잊는다.

눈앞에 완벽한 도법(刀法)이 있는데 다른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무엇이겠나.

부러진 박도를 잡고, 승려가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따라한다.

“……!”

말은 없지만, 상대방이 놀란 기색이 느껴졌다.

소호는 그 자세 그대로 내공의 흐름도 상상해서 만들어 냈다.

‘기가 자연스럽게 날뛸 수 있도록. 산야를 질주하는 늑대처럼……!’

우우웅―.

단전에 머물던 역근경 진기가 대해(大海)처럼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 준다.

소호의 부러진 박도 위에서 금사(金絲) 같은 진기가 흘러나와 한 올, 한 올 얽히면서 도기(刀氣)를 만들어 냈다.

아니, 보는 사람은 모르지만 그건 초기 단계의 도강(刀罡)이었다.

우연일까?

소호는 상대가 웃는 것 같다고 느꼈다.

‘적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싸우면 죽을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뿐, 살기를 뿜지는 않았던 것도 같았다.

‘상관없어.’

소호는 혼탁한 와중에도 재미를 느꼈다.

무공은 재미있다.

거구의 승려가, 마치 따라할 테면 따라해 보라는 식으로 처음과 똑같은 초식을 전개하는 것을 보라.

말없이도 서로 교감을 하는 듯하지 않은가.

비스듬한 수직 내려치기.

북방 초원을 닮은 푸른색 강기와 소호의 어설프지만 강력한 황금색 강기가 만났다.

쿠와아아―.

쩌어엉!

마치 화탄이 폭발한 것 같은 충격이 소호의 온몸을 덮쳤다.

소호는 뒤로 밀려나는 힘을 겨우 버텨 낸 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버텼다!’

반쪽짜리 박도와 그 위를 감싼 황금색 강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버텼어! 내공 소모는 심하지만…….’

역근경 진기가 쑥쑥 빨려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팔은 저리고, 다리도 후들거리지만 그래도 천신의 일격을 버티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할 수 있어.’

소호는 용기백배하여 전력을 뿜어냈다.

무산학관에서 배운 모든 것.

기본 검술 삼십육형부터 불주연사까지 모든 것을 사용해 봤지만, 승려의 천랑도(天狼刀)는 그 자체로 무너지지 않는 철벽(鐵壁)과도 같았다.

천근갑에 원앙각.

거기에 태극권까지.

늘 승리하던 무공을 사용해 보아도 이번만큼은 열세를 느낀다.

무공의 부족함.

무산학관의 수많은 무공을 다 익혔으나 지금 이 시점에, 격상의 상대에게 통용될 만한 무공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건 대체 어찌된 일일까.

아니, 어쩌면 온갖 무공을 섞어 쓰는 응용력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을 칭찬받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소호는 알지 못했다.

그런 소호에게로 승려의 일격이 다시 한 번 날아왔다.

처음과 비슷한 비스듬한 수직 참격이다.

똑같은 초식으로 막으려 한 소호는 칼을 서로 맞대는 순간, 이 일격이 처음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쩌어어엉!

파캉!

승려는 칼이 닿는 순간, 칼끝으로 원을 그리듯이 돌려 위로 쳐올렸다.

초식 자체는 단순했으나, 승려가 겪어 온 경험과 막강한 내공이 그 단순한 초식을 천하의 절세무공으로 둔갑시켰다.

초식의 변화에 반응한다?

소호는 하려고 했으나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채애앵―.

소호의 손에서 박도가 날아가 버렸다.

쿠와아아아―.

소호의 강기가 산산조각 나고 온몸을 융통무애하게 흐르던 역근경 진기가 가닥가닥 끊어졌다.

소호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여기까지다.

이 이상은 무리였다.

“…….”

소호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승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

승려. 범천.

아니, 북방 초원 제일의 전사이자 북천맹의 맹주였던 자.

텐챠이는 그런 소호를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하늘에서 먹구름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한 줄기 서광이 비추었다.

천의(天意)란 신비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하였는데, 어찌하여 기회를 주는가.

“…….”

텐챠이는 햇빛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잠시 후, 망설임이 사라진 눈빛으로 바닥에 쓰러진 소호를 들어 올려 어깨에 들쳐 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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