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13화 (342/686)

9권 13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13)

“헉.”

정신이 든 소호는 생전 처음 숨을 쉬어 보는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기절한 게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듯한 기분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마치 귓가에서 누가 소리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바싹 마른 건초에 물을 뿌리듯, 심장이 쿵쾅거릴 때마다 온몸에 피가 흘러 점차 감각이 되살아났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딱히 특별한 특징이 없는 투박한 목재 천장이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대들보와 그 위에 덮어 둔 지붕이 안쪽에서 그대로 보이는 구조였다.

우측의 자그마한 창으로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낮인가?’

소호는 일어나기 위해 고개를 들려다가 커다란 거인이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근육통에 휩싸였다.

“으어어.”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면 절대로 낼 수 없는 멍청한 신음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살아있는가?

신체 부위 중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손가락이다. 더듬대며 만져 보니 사지 육신 잘려 나간 곳 없이 멀쩡한 것을 확인했다.

다만 가슴팍의 상처는 여전한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따끔하면서도 간질간질한 감각이 느껴졌다.

소호는 잠시 눈을 끔뻑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으음.”

이곳이 어디고, 누구의 도움을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호가 낑낑대며 자리에서 상반신을 일으켜 보니 옆에는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아……!”

안 그래도 피를 많이 흘려 목이 많이 마른 상태였다.

찻물은 이미 다 식어서 미지근했지만 지금이 어디 찬물 더운물을 가릴 때던가.

소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물을 따라서 입가에 가져갔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독이 들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무산학관 암행관(暗行關)에서 지겹도록 배운 것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기껏 치료해서 살려 놓고 도로 죽일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덕분이다.

찻물은 입술에 닿는 순간 곧바로 목으로 넘어갔다.

미지근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마셔 보니 약간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아아…….”

한 잔을 마시고 나니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소호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차를 방금 마셨다고 확신했다.

바싹 말라 있던 몸 안이 생명수로 채워지는 느낌이다.

그대로 연거푸 세 잔을 마시고 나니, 그제야 주변의 환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세월이 느껴지는 투박한 목재 건물의 안이었다.

소호는 방 한구석에 놓인 자그마한 다탁과, 그 옆에 쌓여 있는 불교 경전들을 발견했다.

얼마나 읽었는지 책을 묶어 둔 제본 끈이 다 헐어서 일부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은은하게 향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절……?”

너덜너덜한 불교 경전이 쌓여 있는 방이 그리 흔하겠는가.

이 단출한 살림살이가 절간의 검소한 방이라는 생각이 들던 바로 그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면서 자그마한 인영이 들어왔다.

귀여운 얼굴에 승복을 입은 사미승이었다.

쟁반 위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몸을 닦을 수건을 들고 들어오던 사미승은 이미 반쯤 몸을 일으키고 앉아 있는 소호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어찌나 놀랐는지, 사미승은 입을 쩍 벌린 채로 굳어 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바닥에 쟁반을 내려놓고 종종걸음으로 소호에게로 다가왔다.

“시주님! 깨어났어요? 언제 깨신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나 빨리 깨어나다니. 난 시주님이 죽는 줄 알았어요. 숨도 되게 가늘었다고요!”

호들갑을 떨면서 소호의 온몸을 자그마한 손으로 매만지는 사미승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평생 알고 지낸 친척인가 싶을 정도로 허물이 없었다.

소호는 당황하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어, 저기……. 넌 누구야?”

“저는 그저 이름 없는 사미승입니다. 십계와 구족계를 받고 법명을 받기 위해 수련 중이지요.”

갑자기 합장을 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현기가 흘렀다.

호들갑을 떨면서 어린아이처럼 굴 때와는 전혀 딴판이다.

“그나저나 시주님, 이렇게 깨어났으니 어서 범천 스님께 알려야겠어요. 그분께서 시주님을 데려온 뒤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몰라요.”

“범천 스님……? 걱정……?”

범천이 누군지 모르는 소호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소호는 문득 기절하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드넓은 숭산의 산세.

비참한 최후를 맞은 팔검의 비명 소리와 가슴을 갈라 버린 유준의 날카로운 공격.

이틀 밤낮동안 이어진 기나긴 추격전.

그리고 기억이 흐릿한 가운데 만났던 승복을 입은 거구의 사내와의 결투.

“그 사람이 범천 스님……?”

“그 사람이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몰라도, 마지막에 시주님을 구해 내고 어깨에 짊어지고 온 사람이 누구냐고 하시면, 그분이 범천 스님이 맞아요. 뭔가 싸움도 있었다고 하던데요.”

“아……!”

소호는 작은 새처럼 쫑알대는 사미승의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모습을 발견했다.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아 얼굴을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은 여전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는데도 존재감이 엄청났다. 안 그래도 그리 넓지 않은 방 안이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꽉 차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 사람은……!’

소호는, 그때의 자신이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왜 그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웠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선과 악.

그런 걸로 구별할 수 없다.

거구의 승려는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패도(覇道)와 살기(殺氣), 그리고 현기(賢氣)가 공존하니. 그야말로 세상사 복잡한 이치를 한데 모아 둔 듯한 사람이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초원처럼 자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가만히 몸을 웅크린 채 이쪽을 노려보는 것처럼 위험한 느낌도 있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그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가와 소호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소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범천 스님! 오셨네요. 안 그래도 시주님에게 스님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어요. 스님이 얼마나 먼 곳에서 이 시주님을 어깨에 들쳐 메고 구해 왔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도착했을 때 안색이 얼마나 하얗게 질렸는지 제가 시신을 업어 온 줄 알았던 일도요.”

사미승은 제발 자신이 설명하게 해 달라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거구의 승려, 범천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소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소호는 그가 먼 과거의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빛은 복잡해 보이긴 했지만, 절대로 적대적인 원망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이 사람은 뭐지?’

두 사람의 침묵을 불편하게 느꼈던 것일까.

사미승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시주님,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이분께선 지금 십 년째 묵언수행 중이셔서. 대화가 안 되더라도 섭섭해하시거나 놀라지 말…….”

“너와 닮은 자를 본 적이 있다.”

사미승이 묵언수행 중이라고 하는 것과, 범천 승려가 입을 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묵직한 목소리에 짙은 북방 억양이 섞였다.

만인을 통솔해 본 듯, 말 한마디에 실려 있는 중량감이 엄청났다.

소호는 그의 목소리와 눈빛이 ‘그’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저와 닮은 사람을 보았다고요?”

“벌써 이십 년이 넘은 일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생생하다. 나는 하늘의 인도를 받아 그를 만났다. 서로 지금의 네 나이보다 어렸을 것 같군. 그때 그의 얼굴이 지금의 너와 판박이다.”

옆에서 사미승이 “시, 십 년 적공이……!”라고 중얼거리면서 혼란에 빠진 표정을 지었지만, 소호도 범천 승려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보다 훨씬 중요한 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소호는 백설지만큼이나 어색한 한어를 사용하는 눈앞의 승려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이미 깨달은 상태였다.

무림 강호에서 강자는 강자와 만나는 법이다.

왠지 모르게 과거의 인연이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묻겠다. 네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인가?”

아니나 다를까. 범천 승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범천 스님께선 그게 왜 궁금한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가 그의 아들이라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아…….”

“어제 너를 찾는 동료들이 왔었다. 그들도…… 내가 아는 얼굴들과 닮았더군.”

범천 승려는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붕대로 칭칭 감긴 그의 옆얼굴에서 아련한 애수가 감돌았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필연만 있을 뿐.”

목소리에 담긴 깊은 여운은 그가 과거에 대체 어떤 경험을 해 온 것인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근데 동료들? 주해랑 미미가 온 걸까?’

소호는 잠시 고민했으나, 어쨌거나 상대는 그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었다.

가슴에 감겨 있는 붕대에는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뿐인가.

그를 눕혀 두었던 침상과 침구는 잘 마른 햇볕 냄새가 나는 새 것이고, 주기적으로 몸을 닦아 주었는지 그의 몸은 끈적거리지도 않았다.

첫 대면에 자신에게 칼까지 들이댄 배은망덕한 사람을 끝까지 데려와 치료해 주었다.

이걸 생명의 은인이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

심지어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의 인사도 못했는데, 뭔가를 감추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아버지. 좋은 인연……이었겠죠?’

소호는 아버지의 과거를 믿어 보기로 했다.

“저의 아버지는…… 장 씨 성에 기 자, 린 자를 쓰십니다. 스님께서 아는 분이세요?”

“장기린……!”

침묵은 잠시.

자신의 추측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은 범천 승려의 분위기가 변했다.

후와아아악―.

막강한 기파가 당장이라도 흘러나올 듯 넘실거렸다.

장기린이라는 이름 석 자가 텐챠이라는 화약의 기폭제가 되었다.

애써 꾹 눌러 참고는 있으나, 거대한 황소를 노끈 하나로 묶어 둔 듯 불편하고 불안하게 일렁이는 기파였다.

거대한 힘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넘실거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당장이라도 구토를 할 것 같은 지독한 긴장감을 동반한다.

소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미승만 태연할 뿐.

지금 이곳은 온몸이 따끔거릴 정도로 섬뜩한 패기에 지배당했다.

“그런가. 역시 붉은 악귀의 아들이었나.”

“……!”

마을에서 많은 것을 듣지는 못했으나, 소호는 자신의 아버지 장기린이 과거에 붉은 악귀라 불렸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전쟁터.

원의 잔당들과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는 북로전쟁 시절의 이야기다.

‘적이었나!’

소호는 자신이 실수한 건 아닌가 불안해졌다.

“장장 이십 년. 시간의 흐름조차 잊을 만큼 불경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후회는 없으나 죄가 있다면 씻으려 했었다. 그 끝에 이러한 만남이라니. 하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텐챠이는 하늘을 향해 넋두리를 하다가 다시 소호를 보며 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장소호.”

“작은 호랑이인가.”

북원의 장수이자 강호 무림사에 한 획을 그은 북천맹을 이끌었던 자.

강호관직론을 내세우며 남경을 빼앗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했던 천고의 역적.

사적불가로 모든 기록에서 지워졌으나,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는 자들 사이에선 마교의 교주보다도 더욱 공포스러운 인물로 손꼽히는 자.

창천랑 텐챠이는 소호를 향해 말했다.

“나는 네 아버지의 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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