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15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15)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는 범천과 사미승에게서는 고작 하루를 본 것 같지 않은 짙은 아쉬움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적이었던 사람과의 인연이라니.
신기한 것은 둘째치고, 소호는 왠지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숭산을 떠난 그들은 낙양의 하오문으로 향했다.
대미미에게서 소호에게로 반가운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들은 탓이다.
“미리 알면 재미없어요, 오라버니.”
그 말을 하는 대미미에게서는 장난기가 느껴졌다.
소호는 눈치 없게 계속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깜짝 놀래켜 주고 싶은 대미미의 마음을 존중해야 했다.
하오문에 도착하여 안내받은 방은 낙성다루에서 가장 좋은 맨 윗 층의 귀빈실이었다.
입구에서부터 걸려 있는 황금색 장식품과 고급스러운 비단 천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온갖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 탁자도 눈에 띄었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달콤한 당과를 입이 터져라 넣어서 먹고 있는 건장한 청년.
얼굴과 손이 볕에 그을린 갈색이고, 듬직한 팔뚝과 어깨는 힘깨나 쓸 것처럼 우직한 느낌이다.
식탐을 부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영리함과 재기(才氣)가 가득했다.
“설마…….”
소호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소호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잘 잊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특히 그게 어린 시절 마을에서 만들었던 인연이라면 더더욱 잊지 않는다.
“기옥이?”
“읍?”
양 볼이 터져라 당과를 씹고 있던 청년이 소호를 발견하고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씹던 것들을 재빨리 삼켜 버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어나 몸에 묻은 가루들을 툭툭 털어냈다.
마치 고위 관료처럼 근엄한 표정을 짓는데, 그게 또 꽤나 잘 어울린다.
“오랜만이야. 소호…… 형.”
기옥.
어린 시절 은자촌에서 만나 짜증을 부려 대던 신경질적인 꼬마가 어느새 덩치가 크고 듬직한 청년으로 자라난 것이다.
덩치만 자란 게 아니라 성격도 많이 변한 듯했다.
입술에 묻어 있던 가루들을 혀로 핥아서 먹는 것을 보니 예전의 그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모습이 많이 사라진 듯 보였다.
“세상에. 이게 얼마만이야!”
상대가 기옥이라는 것을 알게 된 소호는 반가움을 숨길 수 없었다.
“오랜만이네, 소호 형. 육 년쯤 됐나?”
“맞아. 무산학관에 입관하고 나서 못 봤어. 배진화 아저씨 때문에 다른 마을로 갔었잖아? 그 뒤로 은자촌에선 광 할아버지만 종종 만나고 갔다면서?”
“사실 지금 지내는 곳도 은자촌에서 그리 멀지 않아.”
“어디에 있는데?”
“은자촌에서 위쪽으로 삼산을 넘어가면 있는 자그마한 대장간에서 살았어.”
“그래? 멀지도 않았네.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어?”
“이래저래 많이 배우느라 바빠서.”
기옥은 씩 웃었다.
사내답게 웃는 모습을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근처에 있었던 걸 알았으면 놀러 갔을 거야.”
소호는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삼산은 기운이 좋은 영산이지만 그 크기 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
미리 위치를 알고 있었다면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갈 수도 있는 거리였던 것이다.
“형이랑 애들은 무산학관에 서 무공을 닦았잖아. 그러니 나도 뭔가 배워야지.”
“그래? 많이 배웠어?”
“꽤. 광 영감은 여전히 못난 놈이라고 구박이지만.”
소호는 이제 덩치만 놓고 봐서는 소호보다도 큰 것 같은 근육질 청년의 어깨와 팔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려 보았다.
탄력 있으면서도 그 안에 숨어 있는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소호는 근육의 모양만 봐도 어떤 동작을 주로 익혔는지 알 수 있다.
기옥의 몸은 일정하고 반복적인 움직임에 의해 강화된 일상적인 근육이었다.
“망치질을 계속했구나?”
“응. 계속하고 있지.”
튼튼한 육신과 불길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
이제야 모든 조각들이 맞춰지는 듯했다.
기옥은 장인(匠人)으로서의 길을 꾸준히 걷고 있었던 것이다.
“멋지네. 얘들아 너희는 다 인사한 거야?”
대미미와 섭주해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을 보였다.
소호는 혼자만 따돌려진 듯한 외로움에 소리쳤다.
“대체 언제! 왜 나만 빼놓고!”
“후후, 저희도 얼마 안 됐어요. 숭산으로 출발하기 직전이었지?”
“어쩔 수 없어요, 소호 형. 그때는 형이 백검회에 잡혀 있을 때니까요.”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소호는 인정하고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반갑기는 한데, 갑자기 어쩐 일이야. 기옥아?”
“이것.”
기옥은 음식이 가득한 탁자 밑에서 베 보자기에 싸인 큼직한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건장한 청년인 기옥이 힘을 써서 들어야 할 만큼 묵직한 상자였다.
“광 영감이 전해 달라고 했어. 원래는 직접 오려고 했는데 마을이 좀 바빠서. 내가 오랜만에 밖에 나오고 싶기도 했고.”
보자기 속 나무 상자에서 나온 것은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철물이었다.
마치 큼직한 찻잔 같은 모양새였는데 그 주변에 뭔지 모를 철편들이 두어 개 붙어 있어서 특이한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이게 뭐야?”
기옥은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철물을 집어 들고 뒤를 돌려 보여 주었다.
찻잔의 바닥 같은 부분에는 사람이 손으로 누를 수 있는 네모난 요철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건 이번에 광 영감이랑 내가 새로 만든 건데. 이름은 봉신갑(封神鉀)이라고 지었어. 말 그대로 뭐든 봉인할 수 있는 갑주라는 뜻인데……. 알아, 나도. 좀 과장했지만, 그래도 잘 만들어서 뿌듯했다고.”
모두가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가운데, 기옥은 아무것도 없는 벽 쪽으로 봉신갑을 겨누고 요철 부분을 꾹 눌렀다.
철컹.
파라라락―.
“……!”
소호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찻잔 같아 보이던 철물이 둥그렇게 회전하는가 싶더니, 마치 부챗살을 펼치듯 순식간에 사람의 머리통만 한 크기로 벌어진 것이다.
입구가 크게 벌어지자 얇고 가느다란 철편이 몇십 개씩 이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심지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기옥이 뒤로 튀어나온 철사를 강하게 잡아당기자, 갑자기 사람 머리통만 한 물건이 마치 암기처럼 앞으로 튀어나가 허공에서 입을 꽉 다물었다.
깡!
철과 철이 맞물리는 소리가 그렇게나 섬뜩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손가락이 있었다면 다 잘려 나갔을 것처럼 힘도 좋았다.
마치 커다란 맹수가 이빨로 물어뜯듯이, 철편들이 회전하며 커다란 철구를 만들어 냈다.
“와아……!”
소호는 큰 흥미를 느꼈다.
요철을 눌러서 크기를 키우고, 튀어나온 철사를 잡아당겨 앞으로 쏘아 봉인한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물건이었다.
“재질은 백철과 묵철을 섞은 강철이고, 철편과 철편 사이를 매끈하게 다듬고 완전히 밀봉해서 물 한 방울도 새지 않아. 상대방이 어떤 암기를 사용하든 이게 있으면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자부하지.”
기옥은 소호의 반응이 좋아서 그런지 뿌듯한 얼굴이었다.
“광 영감이 저번에 소호 형이 보낸 백린을 보고 굉장히 심각하게 느꼈던 것 같아. 백린을 막을 방법을 찾아보자면서 이것저것 만들다 보니 봉신갑을 만들게 되었어. 나름대로 실험해 봤는데 성능은 다 만족스러워.”
기옥은 철구로 변해 버린 봉신갑에게 다가가 아래쪽의 요철을 꾹 눌렀다.
철컹!
휘리리릭―.
요철이 눌리자, 철구는 다시 원래의 찻잔 모양으로 돌아왔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물건이었다.
기옥은 봉신갑을 집어 들고 소호에게로 건네주었다.
“자. 형도 한번 해 봐.”
소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벽 쪽을 바라보며 요철을 누르고, 철사를 잡아당겼다.
기옥이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봉신갑이 앞으로 튀어나가 허공에서 원형으로 변했다.
“물도 새지 않는다. 즉, 백린탄을 막기 위한 거구나……!”
“참고로, 깨무는 힘이 강하고, 여기 안쪽이 톱날 형태로 되어 있어서…… 벽 쪽으로 쏘면 그 벽을 깨물면서 그 부분에 달라붙을 거야.”
“어? 그건 무슨 소리야?”
“이런 뜻이지.”
기옥은 새로운 봉신갑을 꺼내, 아무것도 없는 나무 벽을 향해 작동시켰다.
봉신갑은 벽에 이빨을 박아 넣는 것처럼 딱 달라붙은 채 반구형의 모습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와아!”
“어때. 괜찮지? 사실 원형(圓形)으로 만든 데다가, 내가 생각해 낸 거라 원기옥이라고 하고 싶었는데…… 크흠, 어때?”
“봉신구가 좋아.”
소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신조차 봉인할 수 있는 갑주라니. 얼마나 멋있는 이름인가.
기옥은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이었지만 그 이상 주장하지는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철이 들었다는 증거였다.
“그래, 그럼 봉신구로……. 이건 스무 개 정도 만들어 왔어. 가능하면 조심해서 사용하고, 다른 사람이 가져가지 않게 쓰고 나서는 꼭 다시 회수해 줘. 광 영감이 그러는데 밖으로 나가면 악용될 수도 있다더라.”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는 무공의 비기 같은 거구나. 알겠어. 주의할게. 역시 광 할아버지야. 대단하셔. 이건 지금 우리한테 딱 필요한 물건이야.”
소호는 봉신구가 마음에 들었다.
지금부터 그들이 할 일을 생각한다면. 마치 마른하늘에 단비처럼 간절히 필요한 물건이었다.
“기옥이 너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거야? 우리가 지금 급한 일이 있는데, 그것만 마치고 와서 같이 놀러 다녀도 될까?”
“얼마든지. 어차피 나도 할 일이 좀 있어서.”
“좋아!”
소호는 기옥을 끌어안았다.
“반가워. 기옥아. 오랜만에 봐서 정말 좋다.”
“……그래. 나도 반가워. 소호 형.”
기옥은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얼굴로 애써 감정을 억누른 채 대답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너무 늦으면 가 버릴 거야. 소호 형.”
“하핫, 얼른 돌아올게. 기회가 되면 무산제전에 놀러와. 거기서 할 일이 있는 거거든.”
기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른스럽게 웃는 얼굴로 소호와 아이들을 배웅해 줄 뿐이다.
“얼른 돌아올게!”
소호는 봉신갑이 든 상자를 챙긴 채 밖으로 빠져나왔다.
대미미와 섭주해. 그리고 낙성다루 일 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서인도 데리고 마차에 탔다.
“자, 이제부터 진짜야.”
소호는 흥분과 전의(戰意)를 불태우며 마부에게 행선지를 말해 주었다.
그들이 다음에 가야 할 곳.
그건 한창 무산제전이 열리고 있을 무산학관이었다.
***
낙엽이 썩어 가는 달콤한 냄새와 오래된 먼지 냄새가 공존하는 낙양인근의 관제묘에서 또다시 세 사람이 모였다.
백검회의 오검, 칠검.
그리고 백검회의 회주인 백가면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거사의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백근의 화약과 수십 개의 백린탄이 그 날, 왕진을 집어삼킬 것입니다.”
세 사람 중에 유난히 키가 크고 마른 사내, 칠검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훌륭하군. 칠검, 이번에 거사가 성공한다면 자네야말로 모든 백검회의 영웅이 될 걸세.”
“과찬의 말씀. 당연히 받아야 할 천벌을 내리는 것뿐이니. 우리 동지들 모두의 공입니다.”
백검회주의 칭찬은 칠검의 목소리를 들뜨게 만들었다.
“오검, 자네는 어떤가?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는가?”
“예. 천무공자와 무산철공주, 낙일창이 모두 없으니, 무룡전에 나올 만한 자는 북경 원가의 장손뿐인데……. 그는 제 상대가 못 됩니다.”
“훌륭하군.”
무산제전 무룡전의 우승자는 원래 왕진과의 독대가 가능하다.
오검은 그 독대 자리를 꼭 따내고 말겠다는 열정과 자신감을 아낌없이 표출했다.
“그런데 오검.”
“예.”
“정말로 괜찮겠나? 자네는 이제 몸을 빼는 게 어떻겠나? 우리 백검회의 총단에선 자네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네.”
“……제 능력을 말입니까?”
“물론일세. 자네는 기갑문의 하나뿐인 전승자이지 않은가. 그처럼 정교한 수투를 만들 수 있는 재능은 백 명의 무인보다 귀중하지.”
“…….”
오검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무거운 목소리로 칠검을 불렀다.
“칠검, 미안한데 잠시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소?”
“……회주?”
칠검은 백검회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짧게 포권을 취한 뒤 밖으로 빠져나갔다.
“청광 진인.”
오검, 남위군은 백검회주의 본래 이름을 말하며 가면을 벗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