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16화 (345/686)

9권 16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16)

“그 이름을 부르는 건 그리 반갑지 않군. 오검. 우리는 흑시군을 무너뜨릴 때까지 모두가 그저 백검회의 검이기로 하지 않았는가?”

한때 청성파의 둘째 제자였던 자.

청광은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저 진중한 눈빛으로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회주님. 저는 어린 나이에 회주님을 만났고 왕진을 타도하겠다는 그 뜻에 감동하여 백검회에 들어갔습니다. 그게…… 벌써 육 년이 넘었군요.”

남위군은 손에 들린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러웠다.

기갑문의 친족들을 제외하곤, 그 누구보다 존경하고 따르던 어른이 바로 백검회주 청광이었기 때문이다.

“목적을 위해 어떤 일이든 했습니다. 사문(師門)이나 다름없는 무산학관의 교육 방식도 백검회에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최초의 살생도 백검회를 위해서였습니다. 열네 살 때였죠.”

“그래. 그랬지.”

“그때 제 손에 묻은 피의 촉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백검회의 대의와 악적 왕진을 쓰러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잘 알고 있네. 오검, 자네는 우리 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었어.”

“저희 백검회는 흑시군에 비해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갖 난관들을 이겨 내고, 또 이겨 내다 보니 이젠 왕진에 대한 복수가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회주님께 가면을 벗고, 사람 대 사람으로 한 가지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렇군.”

청광은 고개를 끄덕여 남위군의 뜻을 인정해 주었다.

“뜻대로 물어보게.”

“회주님께서는, 저희의 이번 대업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충분히 준비했네. 이번엔 분명 왕진도…….”

대답하려는 청광을 향해 남위군은 다시 한 번 당부했다.

“가면을 벗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회주님.”

“……그래, 솔직히 말하지. 난 성공할 확률은 절반 정도라고 생각하네. 그것만 해도 지금까지의 우리가 시도한 대업 중에는 최고이지만.”

즉, 나머지 절반은 실패할 거라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남위군은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회주의 입에서 직접 듣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입니까?”

“악적 왕진에게는……. ‘그들’이 있어.”

“그들이라고 하시면…….”

“항상 악적의 곁에 붙어 있는 괴물들을 말함일세.”

백검회에 몸 담은 지 어언 육 년.

아직 약관의 나이에 불과한 철부지인 남위군이지만 그래도 그는 이제 잘 알고 있다.

백검회주인 청광 진인이 ‘그들’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말이다.

“사흉. 신수들을 말함이군요.”

“그래. 구파일방을 팔파일방으로 만든 혈사 때 자네는 없었으니, 자네는 그들의 힘을 모른다. 그건 인간이 아니야. 사람의 형태를 한 짐승. 무공이 무림 십대고수의 수준을 넘어서는, 그러면서도 왕진의 개처럼 생각 없이 힘을 휘두르는 짐승들이다.”

청광 진인은 단언하듯 말했다.

“그들이 있는 이상, 왕진을 시해하는 건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일 터.”

“걱정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게도 일검이 있지 않습니까?”

“일검…….”

청광 진인은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일검은…… 강하지. 화산 혈사 이후로 무공 수련 하는 모습을 보면 광기마저 보여 무서울 정도니까. 그 성취도 타의 추종을 불허해. 하지만 솔직히 신수들과 비교해서는 어떨까? 매화신검께서 신수 두 명에게 당했는데, 일검은 신검과 같은 경지에 올랐을까?”

백검회주는 솔직하게 두려움을 드러냈다.

“나는 두렵네. 오검. 일검은 강하지만 아직은 섣불리 부딪힐 때가 아니야. 그렇게 잃어도 되는 힘이 아니지. 조금 더 힘을 길러 두고 싶네. 화약과 백린은…… 그래서 이용하는 것이야. 황실의 주목을 받을 각오로 화약을 구해 온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단 말일세.”

남위군은 손가락 끝으로 가면의 까끌까끌한 뒷면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거듭했다.

지금부터 그는 한 가지 질문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청광의 대답이 남위군의 인생에서 큰 변환점이 될 것이다.

“회주님.”

“말하게. 오검.”

“만약에 성공한다면? 내일 왕진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청광 진인은 웃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눈만 봐도 기쁨을 읽을 수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기쁜 일이군. 축배를 들어야겠지.”

“그렇다면, 백검회는 그날로 해체되는 것입니까?”

“…….”

청광 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중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가?

남위군은 그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망감을 느꼈다. 얼마 전에 진구 교관이 진심으로 해 준 충고가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린 다르다고?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 세상이 진짜 변해 가고, 흙 묻은 손에 권력이 쥐어지기 전까지는.”

남위군은 눈을 질끈 감았다.

“흙 묻은 손…….”

“음? 뭐라고 했나. 오검?”

“아니, 아닙니다.”

청광 진인은 몸을 비스듬하게 돌린 채, 남위군을 직접 쳐다보지 않으며 말했다.

“만약 성공한다고 해도 우리의 적은 사라지지 않았네. 무림 강호를 지배하고 있는 불합리한 구조를 타파해야 하네. 세상의 모든 무림 문파를 핍박하고 패악질을 부리는 흑시군을 완전히 해체시켜야 하기도 하지. 우리 백검회는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

청광 진인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고, 그 안에는 무림 강호의 안위를 원한다는 대의(大義)도 함께하고 있었다.

누구나 가슴이 뜨거워질 이야기에 훌륭한 언변까지 갖췄으니 그 말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

너무 뛰어나다.

달콤한 꿀에 벌이 꾀듯 사람을 꾀어내는 이상(理想)이다.

“그렇겠지요. 무림 강호에 평화가 온 뒤에야 백검회는 해체되겠군요.”

남위군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 뼈가 있군, 오검.”

“회주께서는……. 제가 본 분들 중에 가장 무림 강호를 걱정하는 분이셨습니다. 부디 그 마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남위군은 깊이 허리를 숙여 청광 진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한참 동안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예(禮)에 진심이 담겼다.

“떠나려는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왕진을 죽이겠습니다.”

잠시 말을 잃었던 청광이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런가. 그럼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리겠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위군이 관제묘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청광은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

“자네 그 이야기 들었나? 이번 무산제전에는 천무공자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군. 본가에 일이 생겨서 귀향을 했다는 소문이야.”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천무공자가 없다니. 무산제전을 보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천무공자가 보고 싶어서 온 것일 텐데!”

“나야 어찌 알겠나. 매년 우승을 해 왔으니, 이젠 질렸을지도 모르지.”

“나 원, 이래서 범부(凡夫)는 안 되는 걸세. 무인이라는 사람들이 어찌 만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던가? 이기면 이길수록 더 이기는 거에 목마르는 아귀들이지. 게다가 올해는 천무공자가 무산제전에 나올 수 있는 마지막 해인데! 절대 그리 떠날 리가 없어. 암! 무슨 변고가 생긴 게 분명하네.”

“예끼, 이 사람. 범부라니. 자네는 범부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나야 알게 뭔가. 무산학관에서 일하는 친구가 말해 준 것뿐일세.”

“허어. 큰일이군. 큰일이야.”

무산제전은 이미 낙양 인근에서 가장 큰 축제이며, 모든 강호인들이 최고의 후기지수를 구경하기 위해 모이는 큰 행사가 되어 있었다.

무산학관 출신의 무인이 무림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무산학관 출신들의 절반가량은 황실이나 군부에 투신하지만, 무림인이 되어 강호에 나오는 학생들도 꽤나 많았다.

물론 자기 문파의 무공만 심도 있게 파고든 무인들도 강하지만, 학관에서부터 온갖 무공을 눈에 익히고 대응법까지 세세하게 배워 나오는 관도들은 무림에 나가자마자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 주었다.

철탑패웅(鐵塔覇雄) 이태산, 섬전검객(閃電劍客) 태성천, 투웅(鬪熊) 철웅은 이미 무림 강호의 신성으로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태산이 종남파의 삼협을 상대로 막강한 곤술을 선보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섬전검객 태성천은 살수들의 문파를 쫓아다니며 쾌검을 겨뤘고, 투웅 철웅은 남권북퇴를 가리지 않고 권법가들을 찾아다니며 백승불패를 이뤘다고 했다.

무산학관 출신의 강자들이 점점 더 명성을 떨치는 상황이다.

그러니 누가 알겠는가?

이들 중에 무림을 제패하는 초고수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무산학관의 명성은 끝없이 올라갔고, 그들 중의 백미(白眉)가 바로 천무공자였다.

십삼 세 때 무산제전을 재패하고 그 뒤로 한 번도 왕좌를 내준 적이 없는 기린아(麒麟兒).

거기에 더해 준수한 외모와 화려한 의복은 절로 추종자를 만든다는 소문이다.

거기에 올해를 마지막으로 무산제전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이번 무산제전을 보겠다고 남해 끝에서 장강을 가로지르며 찾아온 사람도 있을 지경이라, 무산학관 앞은 무산제전이 벌어지기 한 달 전부터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는 상황이었다.

“무룡전이 벌써 결승인데…….”

“진짜로 안 오네. 얘들은 진짜 뭐하는 거야.”

주근깨에 뻐드렁니, 영리한 눈빛을 지닌 청년이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통통한 얼굴에 화장을 짙게 한 여인이 입술을 깨물며 분을 참지 못하는 모습도 보인다.

윤지관과 마희희.

소호와 동갑인 백호방의 친구들이다.

두 사람은 무룡전의 결승에 오른 두 명을 보자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위군과 원형주라니. 최소한 서인이는 올라갔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서인이까지 어디로 간 거야! 왜 불렀는데 안 나오냐고!”

“위군이는 우리랑 같은 백호방이긴 한데……. 으음, 응원해 줘야 하나…….”

“같은 백호방은 무슨. 칠 년간 같이 수업 받아도 쌀쌀 맞게 인사도 안 하고 찬바람 풀풀 풍기는 애를 왜 응원해?”

거칠게 쏘아붙이는 마희희의 말에 윤지관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그래도 현무방이나 주작방이 올라간 것보단 낫잖아?”

“그야 그렇지. 그래도 응원할 맛이 나는가 아닌가는 다른 문제야. 안 그러니, 얘들아?”

마희희가 뒤를 돌아보자, 함께 있던 백호방의 후배들이 모두 동의를 표했다.

“그렇긴 해요. 마 선배.”

“천무공자님이나 서인 선배가 올라갔어야 하는데……!”

같은 백호방 후배들에게도 남위군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모두가 떨떠름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산제전의 결승전은 시종일관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남위군은 북경 원가의 후손인 원형주보다 무공이 훨씬 뛰어났던 것이다.

원거리에서 던지는 어린단검은 날카로웠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대처하는 태극권에는 빈틈이 없었다.

한 자루 검을 든 채 점창의 사일검법을 중심으로 쾌검을 전개하는 원형주는 이렇다 할 타격을 성공시키지 못한 채, 온몸에 상처만 점점 늘어갔다.

피슈슈슉―!

“크윽!”

그러다가 남위군의 일격.

일수에 여섯 개의 단검을 뿌리는 비도술로 수십 개의 단검이 벽을 만들 듯 폭발적으로 뿜어지자 순식간에 승부가 났다.

“만천화우!”

“대단하다!”

지켜보던 관객들로부터도 탄성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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