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17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17)
마치 민들레꽃이 씨를 날리듯, 남위군으로부터 수십 개의 단검이 한 번에 쏘아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저렇게나 많은 양의 단검이 튀어나올 수 있을까?
양팔이 천수관음상처럼 여러 개로 늘어난 남위군의 모습은 관객들의 그런 의문을 일거에 해소해 주었다.
대단한 수공(手功).
경이로운 암기술이었다.
원형주의 검술도 또래 후기지수들에 비해 뛰어난 편이었지만, 남위군은 암기술은 그와 격이 달랐다.
만천화우라니.
예전 같으면 사천 당가의 가주 정도는 되어야 쓸 수 있을 무공이 아니던가.
관객들은 환호했다.
팔파일방의 무공을 제한 없이 섞어 쓰는 무인들의 싸움을 볼 수 있으니, 이래서 무산제전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는 것이다.
무공을 조금이나마 아는 자들은 만천화우라는 기술에 경이를 느꼈다.
특히 사천 당가 출신 교관들은 자부심을 느끼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사람이 있었다니!”
“왜 지금껏 눈에 띄지 않았지? 왜 이제야 튀어나온 거야?”
온몸에 단검을 맞은 원형주는 부들부들 떨면서 잠시 버티고 서 있다가 이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언제…… 이런…… 사일(射日)을 좀 더 연마했어야 했는데……. 천무도 아니고 너 같은 놈에게……!”
원형주의 자존심은 죽지 않았으나, 육체는 한계를 맞이했다.
흔들리는 동공.
가닥가닥 끊겨서 제 할 일을 하지 못하는 내공이 그를 증명했다.
키잉―.
“크윽……!”
검을 땅에 박아 억지로 서 있어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것이다.
원형주는 여기까지였다.
심판을 맡은 무산학관의 수석 교관, 철표가 달려 나와 남위군의 승리를 선언했다.
철표 교관이 원형주의 몸을 살펴보더니 손을 흔들어 대련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원과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행히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으나, 수십 개의 어린단검이 몸에 꽂힌 것은 가볍게 처리할 상처는 아니다.
“손속이 과했군.”
조용히 내뱉는 철표의 한마디가 그의 불편한 내심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대련에는 익숙지 않아서.”
“만천화우는 몇 성인가? 삼 성? 오 성?”
“오 성입니다.”
“대단하군. 그 정도라면 만천화우를 쓰지 않더라도 이길 수 있었을 텐데.”
남위군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 숙여 사죄의 뜻을 보였다.
“무림인이 명성을 탐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라, 위군.”
철표는 대련장 주변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관람객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내지르고, 좋은 것을 봤다는 듯 만족한 얼굴로 ‘은위군’이라는 이름을 외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중에는 동기들도 있었다.
무산학관의 아이들은 만천화우의 위력과 그걸 파훼할 방법들을 찾기 위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남위군은 묘한 기분이 되었다.
약관의 나이가 될 때까지 무산학관을 다녔으나, 이런 관심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무인으로서의 명성은 중요하나, 무산학관 출신들끼리의 끈끈한 우정도 중요하다. 강호는 비정하고 험악하여 혼자 살아갈 수 없어. 독야청청(獨也靑靑)하는 늑대들은 누구나 결국 한계를 맞이한다.”
철표의 목소리에서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듯한 아픔이 우러났다.
“그게 네가 동기, 동문들을 아껴야 하는 이유다. 결국 나중에 네 처지에 공감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저들이기 때문이지.”
“저는…….”
남위군은 섣불리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대사(大事)를 앞두고 있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왜일까.
대사를 위해서 외면해 왔던 것들인데도, 철표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동기. 동문.
육 년이 넘게 이어진 무산학관에서의 시간들.
“아쉬운 점이 있다고는 하나, 학생들의 성취를 폄하해서야 안 될 일이지. 무룡전의 우승을 축하한다, 위군.”
“감사……합니다.”
“이젠 왕 태감의 치하 인사를 받으면 되겠군.”
“예. 드디어…… 그렇군요.”
망설임과 긴장으로 가득한 남위군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철표는 남위군에게 다가와 처음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는 남위군을 가리키며 이번 무룡전의 우승자라고 선언하려 했다.
사람들은 신이 나서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북을 치는 것처럼, 한결 같은 박자로 바닥이 웅성거렸다.
이변의 인물은, 바로 그 때 나타났다.
***
소호는 대련이 벌어지고 있는 단상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사람들은 남위군에게 환호하느라 소호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키가 크고 빼빼마른 체구의 중년 사내 한 명 정도만 소호를 주시했다.
소호는 숨을 가다듬었다.
치기 어린 모습, 덜 자란 철부지처럼 놀던 모습은 이제 없다.
무대 위로 올라서니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미미에게 부탁해서 깨끗한 흰색 비단 무복을 갖춰 입고, 화려한 영웅건까지 착용한 건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남위군의 반응이 특히 격렬했다.
부릅뜬 눈, 흔들리는 눈빛에서 그의 고뇌가 읽히는 듯했다.
“장소호……?”
믿기지 않아 하는 것도 잠시,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 찬 그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도대체 왜 온 거야? 이제 와서.”
“와야지. 널 막으려면.”
소호는 빙긋 웃었다.
평소처럼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한 자세로 철표 교관에게 포권을 취했다.
“장소호? 본가에 간 것 아니었나?”
“예. 일이 일찍 끝나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으음, 미안하지만 이미 무룡전은 결승까지 끝나 버렸다. 조금 전에 원형주를 꺾고 은위군이 우승을 했지.”
“네. 저도 오면서 보았습니다. 위군의 암기술은 정말 뛰어나더군요. 하지만 작년의 우승자와 겨뤄 쓰러뜨리지 않고 어찌 무룡전의 우승자라 스스로 칭할 수 있겠습니까?”
소호는 그건 뭇 군웅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며 철표를 설득했다.
자세는 당당했고, 목소리에선 활력이 넘쳤다.
“허락해 주신다면 지켜봐 주시는 군웅분들게 의견을 묻고, 마지막으로 위군과 실력을 겨뤄 보고 싶습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군.”
철표는 공무를 처리하는 기준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그는 귀빈들이 앉아 있는 이 층 관람석을 바라보았다.
가장 중심에 앉아 있던 자.
패왕의 가면을 쓰고 있는 거구의 사내, 가면철왕 철우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일어나서 힘차게 손을 들어올렸다.
“허(許)!”
군웅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소호는 양손을 뻗어 소매를 정리한 뒤, 정중한 태도로 사방을 향해 한 번씩 포권을 취했다.
“무산제전을 보러 와 주신 군웅들께 한 말씀 올립니다. 제 이름은 장소호. 아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으나 작년에 무룡전을 우승했었습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기품 있는 몸동작으로 예를 취하는 소호는 마치 황실의 인물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사방에서 탄성이 터졌다.
안 그래도 그를 알아보고 있던 군웅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천무공자!”
“장소호! 장소호!”
소호는 그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저는 사적인 일로 인해 무룡전에 참가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도중에는 악적들을 만나 싸우는 바람에 부상도 입고 말았지요.”
소호는 비단 장포의 앞섶을 풀어 붕대로 칭칭 감긴 상체를 살짝 보여 주었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아 붕대에 핏물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군웅들이 호기심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
그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어떤 싸움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듯한 시선으로 소호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인생의 마지막 무룡전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넘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신다면……. 저는 위군, 이 친구와 무룡전 우승과는 상관없는 마지막 대결을 한번 펼치고 싶습니다.”
무림 강호를 동경하는 사람 중에 가슴이 뜨겁지 않은 자가 어디에 있으랴.
우승과는 상관없이 치러지겠지만, 가장 보고 싶었던 천무공자가 싸우고 싶다는 말에 관중들이 환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천무공자다!”
“멋지다! 꼭 보여 줘!”
일제히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소호는 계속해서 포권을 취하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최근에 무림 강호에서 가장 이름이 높은 정명(正明)한 후기지수다운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끓어오르는 가운데, 남위군이 다가와 소호에게 으르렁거리듯이 속삭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도 ‘저 사람’을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
“별로 좋아하진 않지. 하지만 지금 내가 막으려는 건 너야, 위군.”
“대체 왜……!”
“동고동락(同苦同樂)한 학관의 동기가 나쁜 길로 빠지려는데, 이를 막지 않고 서야 어찌 친구라 하겠어?”
씩 웃는 소호의 얼굴을 남위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싫어? 이대로 싸우지 않고 물러설 거야? 무룡전의 우승자가.”
“이 자식……!”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남위군의 얼굴 위로 어두운 기운이 휙휙 지나가는가 싶더니, 잠시 후에는 강한 분노와 어긋난 증오만이 남았다.
“웃기지 마라. 가만 안 두겠어. 이젠 정말로 생사결이다, 장소호.”
“그래? 긴장해야겠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호는 싱긋 웃고 있었다.
남위군은 가면철왕 철우의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검은색 천으로 자리를 가려 놓은 채 그 뒤에 앉아 있는 비밀스러운 인물이다.
남위군은 뒤로 물러났다.
철컹거리는 수투에서 섬뜩한 살기가 느껴진다.
소호는 허리춤에서 박도를 뽑아 들었다.
잘 무두질된 가죽 손잡이가 손에 착 달라붙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싸움 직전의 긴장감은 늘 소호를 즐겁게 한다.
“휴우.”
차분하게 숨을 가라앉히고, 역근경 진기를 끌어 올리면서 몸 안의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유준에게 베인 가슴의 상처가 너무 뼈아프다. 대흉근 두 개가 모두 상처를 입어서 몸의 움직임에 제약을 주고 있었다.
‘몸 상태는 칠 할……. 아니, 육 할 정도야. 그 안에서 승부를 봐야 해.’
철표가 다가와 대결의 시작을 알릴 때까지, 소호는 계속 웃는 얼굴로 진기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럼 번외로 마지막 대결을 시작한다. 두 사람 모두 따로 준비는 필요 없겠지?”
소호와 남위군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 자세를 잡았다.
‘지금쯤이면…….’
소호는 은밀하게 귀빈실 쪽으로 다가가고 있을 섭주해와 대미미, 그리고 조서인의 안위를 속으로 빌었다.
‘잘 확인해 줘, 얘들아. 여기는…… 내가 맡을게.’
“시작!”
철표 교관의 기합성과 함께 두 사람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번뜩이는 은광(銀光).
소호의 몸이 한 박자 빠르게 빛살처럼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