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18화 (347/686)

9권 18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18)

“이쪽인가?”

섭주해는 신기(神氣)를 번뜩이며 어둠 저편을 노려봤다.

“이쪽이군……. 이쪽? 아니, 이쪽이야.”

섭주해는 따로 추종술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신기, 상단전의 힘으로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거침없이 찾아냈다.

두 눈에 타오르듯이 떠오른 푸른 기운은 보통 사람이라면 감히 마주 보기 힘들 기묘한 기세를 뿜어냈다.

지금 그들은 가면철왕 철우와 왕 태감이 앉아 있는 건물의 뒷문으로 들어온 상황이었다.

여기서 위로 올라가면 귀빈석이 나오지만, 일 층은 대부분의 공간을 창고로 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식기들로 가득한 방, 의자를 쌓아 둔 방, 족자나 장식용 천 같은 물건들로 가득한 방이 연이어 있었다.

가끔 일하는 시비들만 지나다닐 뿐인데, 그들은 섭주해와 아이들이 차고 있는 철 요대만 힐끗 보고 지나쳐갈 뿐 따로 출입을 제지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무산학관이니까. 학관의 학생들이 돌아다니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섭주해는 당당하게 창고를 몇 개 열어 본 뒤, 건물을 지을 때 중심을 잡아 주는 기둥과 대들보를 중심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가 백검회라면 화공을 위해 일 층에 불을 놓을 거야. 그중에서도 대들보는 좋은 목표지.”

대미미와 조서인은 섭주해의 한 발 뒤에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드득!

스릉―.

대미미는 언제든 조법을 출수할 수 있도록 긴 손가락을 오므렸고, 조서인은 등에 메고 있던 창에 손을 얹고 있었다.

서로 간에 긴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무산학관에서 배운 간략한 수신호만으로 의사를 소통하니 서로 간에 불편함이 없었던 덕분이다.

그들은 섭주해를 따라서 건물 안에서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다.

등불 하나 없이 어두운 공간이 그들을 반겨 주었다.

“이쪽.”

마치 심장 소리 같은 진동이 천장과 벽을 뚫고 세 사람에게로 와 닿았다.

쿵. 쿵. 쿵…….

소호와 남위군의 싸움이 시작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응원하는 모양이었다.

천무공자 장소호를 부르는 함성이 계속해서 아련하게 들려왔다.

“이쪽…… 같은데.”

섭주해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갑자기 나타난 벽을 바라보았다.

바닥과 천장은 단단한 오동나무 재질이었고, 양쪽 벽면 역시도 웬만한 사람 몸통만 한 통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바닥에 쌓여 있는 나무 상자 몇 개가 없었다면 사람이 단 한 번도 안 온 곳이라 생각할 만큼 외진 곳이다.

“건물 구조상 여기에 가장 큰 대들보로 이어지는 기둥이 있어야 해.”

섭주해는 머릿속으로 건물의 구조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확신을 갖고 말했다.

“응, 확실해. 대들보는 분명히 여기보다 일 장 정도 더 뒤에 있어.”

오면서 본 기둥과 공간들을 계산해 봤을 때 이 너머에 그들이 찾는 길이 있었다. 그런데 길은커녕 벽이 세워져 있으니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이제 이 너머로 가는 길이 어디에 있을지 찾아야 했다.

섭주해는 중지를 세워 벽을 톡톡 두드려 보았다.

퉁― 퉁―.

나무 벽 너머로 공기가 울리는 게 느껴졌다.

“저기, 주해야. 잠깐 비켜 볼래?”

섭주해가 한 발 옆으로 비켜서자 대미미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손가락을 모으고 자세를 낮추더니, 그대로 눈앞의 벽면을 뚫어 버렸다.

“관수(貫手)……!”

조서인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질렀다.

대미미의 관수 자세는 너무나 깔끔해서 더할 나위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힘의 집중(集中)이다.

손끝 중지에 막강한 힘이 실리니 단단한 통나무를 두부처럼 뚫어 버린 것 아니겠는가.

대미미는 통나무 틈에서 다시 손을 뽑고, 이번에는 양손을 살짝 오므려서 조법의 자세를 취했다.

하오문 무상의 독문 무공.

혈룡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까드드득!

푸확!

순식간에 잡아 뜯긴 통나무 두 쪽이 양옆으로 튕겨 나갔다. 소리도 크지 않았다. 윗층 사람들은 그저 어디서 누가 물건을 하나 떨어뜨린 정도로밖에 못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 남성 한 명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산산조각 나서 결대로 찢어진 통나무 조각이 처참해 보일 지경이다.

대미미의 신력과 무공에 감탄하기도 잠시, 세 사람은 일제히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틀어막았다.

“이게 무슨 냄새야?”

“기름……?”

벽을 뜯어내자마자 지독한 냄새가 훅― 흘러나왔다.

상한 음식 냄새 같기도 했고, 코를 찌르도록 숙성된 술 냄새 같기도 했다.

세 사람이 조심스레 안쪽을 살펴보니 섭주해의 예상대로였다.

일 장 정도의 공간 안에 어유(魚油)인지 등유(燈油)인지 모를 기름 항아리가 꽉 차 있었다.

게다가 그 사이사이에 있는 네모난 상자. 그 안에 가득 들어 있는 것은 분명 화약이었다.

황실에서 직접 다루는 물건인 만큼 그 상자 겉에 새겨진 황실 문장이 확신을 더했다.

저곳에 불씨를 던진다면?

생각만으로도 섬뜩했다.

여기 있는 기름과 화약만으로도 이 건물 하나쯤은 삽시간에 불태울 수 있었다.

“저 위를 봐……!”

조서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게 다 백린탄이야.”

“……!”

심지어 기름 항아리 위쪽 천장에는 한 뼘 간격으로 백린탄 다섯 개가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백검회가 이번 일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잠입해서 가벽을 세우고, 거기에 백린탄까지 붙여 두다니.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준비했단 말인가.

“확실해? 백린탄이야……?”

“확실해. 저 모습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어.”

조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도자기 같은 특이한 재질의 몸체에 손가락 하나만 한 크기까지. 전에 봤을 때와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이라 알아보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이미 위력을 체감한 적이 있는 조서인은 물론이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섭주해와 대미미도 섬뜩해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숨겨진 공간 자체에서 누군가를 해치겠다는 큰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미치광이 검객이 목덜미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듯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어떻게 하지?”

“일단은 백린탄부터 제거하자. 우리 중 한 명은 교관님들께 알려야 해. 진짜로 암기가 설치되어 있는 이상 도움이 필요…….”

섭주해는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휙― 하니 몸을 돌려 그들이 걸어온 반대쪽 방향을 노려보았다.

거리는 삼 장(丈) 정도.

복도 좌측에서 나타난 한 사람이 어느새 그들의 퇴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휘리릭―.

후웅!

세 사람의 반응은 빨랐다.

혈룡조와 장창이 상대의 습격에 대비했다.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놀라운 수준의 은신술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벽은 뜯으면 안 되는 것인데. 골치 아픈 짓을 했군.”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사내가 쓰고 있는 하얀색 가면에서 칠(七) 자가 눈에 띄었다.

빼빼 말랐지만 키가 크고 골격이 좋은 체구였다. 허리춤에는 길이가 긴 장검을 차고 있다.

어떤 무공을 사용할까?

자연스레 추측하게 된다.

그는 한 손에는 천장으로 이어진 긴 밧줄을, 다른 한 손에는 대나무 통으로 만들어진 화섭자를 들고 있었다.

“누구냐?”

조서인은 창을 겨누면서 으르렁거리듯이 물었다.

“나? 거기 있는 물건들을 설치한 사람이지. 아아! 거기, 거기. 움직이지 마. 무산학관의 귀하신 도련님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거기서 천장을 통해 이어진 이 밧줄에 불을 붙여 버릴 테니까. 참고로 밧줄에는 기름을 흠뻑 적셔 두었어. 불 붙는 건 금방이야.”

사내는 밧줄과 화섭자를 번갈아 보여 주며 그들에게 겁을 주었다.

밧줄에 불을 붙이면 천장을 통해 불꽃이 전달되어 기름과 화약으로 가득 찬 방에 불이 붙는다.

당연히 누구나 할 법한 추측이었다.

“백검회……!”

“정답이야, 도련님. 나는 그중에 칠검이라 불리지.”

“화공(火攻)이라. 하지만 그 위치에서 불이 붙으면 당신도 무사할 수는 없지 않겠소?”

섭주해는 조서인보다 더 앞으로 한 발 나아가며 말했다.

그의 논리는 명확했으나, 문제는 백검회의 칠검이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는 점에 있었다.

“그렇겠지. 저게 터지면 이 건물에 있는 사람은 다 타 죽을 테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소?”

“백검회에 대해 잘 모르는군, 도련님들. 천하의 악적 왕진을 죽일 수만 있다면 이 한 목숨이 아까우랴?”

칠검은 우국지사(憂國之士) 같은 결기를 보여 주었다.

“문제는 그쪽 분들도 나와 같은 각오가 되어 있냐는 것이지.”

하얀 가면 사이로 광기에 휩싸인 눈빛이 세 사람을 노려보았다.

섭주해는 뒤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기름과 화약, 그리고 백린탄이 보인다.

저기서 치솟는 화염?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고 한들 피륙은 사람의 것이니 불에 타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섭주해는 뒷짐을 진 채,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어때? 같이 죽어도 괜찮겠어?”

칠검이 놀리듯이 묻는 말에 섭주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힘들겠습니다. 당신이 하려는 일에 찬성할 수도 없고.”

“그렇겠지. 그 각오가 우리 백검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칠검. 우선은 일단 진정하고 그 화섭자를 내려놓는 게 어떻겠소?”

“안 되지. 그럼 나를 제압하려 할 것이잖아?”

칠검은 우둔하지 않았다.

그는 영리하게 눈을 빛내며 더더욱 화섭자에 불을 붙일 것처럼 위협했다.

“허튼수작 하지 마.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얼마…… 안 남았다고.”

칠검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는 바깥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나무 벽 너머로 관중들의 환호성과 아쉬움의 탄성이 번갈아 들려왔다.

조용한 창고 안이기에 더더욱 소리가 잘 들렸다.

섭주해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의 침묵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잠시 후, 환호성이 그쳤다.

속으로 셋을 셀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관중석에서 지금까지 중에 가장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무산학관 전체가 떠나갈 것 같은 소리였다.

천……공……!

천무공자!

관중들의 환호성은 곧 한 사람의 별호로 바뀌었다. 칠검의 기세가 변한 건 바로 그 순간이다.

칙!

칠검이 화섭자에 불을 붙여 댔다.

밧줄에 불이 붙는 것은 한순간.

섭주해가 몸을 낮췄다.

허리춤의 단검에 닿는 손.

섭주해의 눈에서 시퍼런 귀기(鬼氣)가 타올랐다.

칠검의 허리춤에 메여 있던 검이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저절로 허공에 떠올랐다.

쒜에엑!

칠검을 위협하듯 날아가는 검.

“어검술?”

안타까운 점은 칠검의 무공이 꽤나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그는 저절로 날아드는 검을 구궁신행의 보법으로 피하면서 밧줄에 불을 붙여 버렸다.

화르륵!

밧줄에 붙은 줄은 순식간에 천장으로 타고 올라갔다.

후우우웅―.

대미미 쪽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녀가 엉덩이가 발뒤꿈치에 닿을 만큼 쭈그려 앉길 잠시.

꽈아앙!

폭발하듯 펄쩍 뛰어오른 그녀가 천장에 손을 박아 넣었다. 아까 보여 준 관수의 수법이었다.

대미미는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상판을 그대로 뽑아 아래로 내리찍었다.

콰드드득!

꾸우웅!

천장이 뚫리니 이 층 바닥과 일 층 천장 사이에 빈 공간이 드러났다.

그 사이에 일(一)자로 연결된 밧줄이 드러나고, 새빨간 불꽃이 마치 재빠른 생쥐처럼 화약고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쒜에에엑―.

조서인의 장창이 번개처럼 날아가 밧줄을 잘라 냈다. 덜렁거리며 늘어진 밧줄에 붙은 불꽃은 더 이어지지 못 하고 짧은 줄에서 활활 타올랐다.

세 사람의 합격술로 이뤄 낸 성과였다.

불꽃은 결국 화약고까지 전달되지 못한 채 중간에 잘려 나갔다.

세 사람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미리 섭주해가 수신호로 뜻을 통일해 둔 덕분이었다.

“후후훗.”

칠검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반대쪽을 가리키며 웃었다.

“밧줄은 두 개로 연결되어 있어. 미안하지만 나와 함께 저승 길동무다, 도련님들.”

경악하는 세 사람.

그들의 온몸을 후려치듯 거센 폭음이 건물 반대쪽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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