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19화 (348/686)

9권 19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19)

“미미!”

섭주해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붉은색 잔상이 곧바로 옆의 벽면을 뚫어 버리며 뛰쳐나갔다.

혈룡조 한 수로 통나무 벽면을 짓뭉개고 뜯어 버리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먼저 미미가 나가고, 그녀의 뒤를 따라 조서인과 섭주해가 빠져나갔다.

불꽃이 지나간 건 그다음이었다.

후끈한 열기에 마지막으로 나온 섭주해의 등 뒤가 땀으로 젖었다.

‘뭐지? 폭음은 들렸는데?’

섭주해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악마의 혀처럼 그들의 등 뒤를 훑었던 열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이 뚫고 나온 통로에선 새카만 어둠만이 보인다.

‘일시적인 불꽃이었나? 터진 건 진짜였어. 그렇다면……!’

섭주해는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깥은 아직도 축제 분위기였다.

환호성을 내지르며 들떠 있던 관중들이 갑자기 귀빈석 아래의 벽면을 부수며 뛰쳐나온 그들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건물의 한쪽 구석에서 폭음이 들린 것과, 대미미가 벽을 뚫고 나온 시간은 거의 동시였다.

사람들이 폭발에 대해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큭!”

섭주해는 짧은 시간에 주변의 상황을 파악했다.

패배한 채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남위군이 갑자기 이를 악물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피슈슈슉!

물고기 비늘을 닮은 단검 여섯 개가 비스듬히 위로 솟구치고, 그 앞에서 승리의 여운에 취해 있던 소호가 황급히 그중 단검 두 개를 쳐 냈다.

여섯 개의 단검 중 두 개만이 소호에게 닿을 경로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안 돼.’

문제는 나머지 네 개였다.

그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가까이에 있는 소호는 보지 못했다.

“소호 형!”

비명처럼 내지른 외침이 소호에게 닿았다.

짧은 순간, 소호의 고개가 섭주해에게로 돌아갔다.

마주치는 시선.

섭주해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막아!

화아아악―.

소호의 몸에서 황금빛 휘광이 뿜어졌다.

기감(氣感)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그물처럼 뻗어나간 무형기가 뒤로 날아가는 단검의 기척을 잡아낸다.

파앗!

한 번의 도약으로 위로 훨훨 날아오르는 것은 불문의 신법인 일위도강이요, 소맷자락을 날개처럼 움직여 날아드는 단검을 부드럽게 막아 내는 움직임은 그 유명한 소림의 반선수였다.

섭주해는 소호가 가장 신뢰하는 동생, 그가 막으라고 한다면 막아야 한다.

이유는 나중에 생각해도 좋았다.

내치는 반선수로 다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의 단검이 빙그르르 도는 듯 유선형을 그리며 교묘하게 투로가 비틀어졌다.

‘놓친다? 아냐, 가능해.’

소호는 다급하게 몸을 비틀었다.

마치 전갈이 꼬리로 찌르듯, 등 뒤로 차올린 후방 각법이 아슬아슬하게 단검을 차올렸다.

티잉―.

튕겨 나간 어린단검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호는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려 중심을 잡은 뒤 사뿐히 내려섰다.

“휴우.”

심장이 두근거리지만 호흡은 차분했다. 소호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그걸 다 막아 내다니!”

주변에서 무인들이 감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미 다른 쪽으로 날아간 단검을 뛰어가서 막아 낸 셈이니 얼마나 대단한가.

소호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남위군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한눈에 전신을 담을 수 있는 거리에서 남위군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귀빈들을 노린 거야?”

소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흥.”

“도대체 왜? 네 단검이 통할 리가 없잖아?”

“…….”

남위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소호를 더욱 답답하게 했다.

어린단검?

속도가 대단하긴 했지만, 그런 단검 따위로 왕진을 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지금 귀빈석에 누가 있던가?

가면철왕 철우.

다른 누구도 아닌 무산학관의 관장인 그가 왕진이 단검에 맞게 가만히 내버려 두겠느냔 말이다.

“상관없다. 가면철왕이든, 신수든. 어차피 내가 할 일은 이제 없을 것 같은데.”

“뭐?”

“하하핫,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남위군은 광기마저 느껴지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의문을 느끼기도 전에, 상황은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상황을 알아챈 것은 소호에게서 잠시 눈을 뗀 한 명의 노인이었다.

“어엇!”

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불! 불이다! 불이 났어!”

화마(火魔)를 피하고 싶은 것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당연한 본능 아니던가.

그 노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시작으로, 화마에 대한 불안감은 관중들 모두에게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그들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한곳으로 꽂혔다.

섭주해와 대미미, 조서인이 동시에 튀어나왔던 일 층 벽면의 구멍을 시작으로 붉은색 화염이 활활 불타오른 것이다.

“불이다! 불이야! 불이 났어!”

“아이고, 세상에. 어쩌다가!”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구르는 관중들이 많아질수록 남위군의 미소가 짙어졌다.

“너……!”

소호는 남위군에게 캐물어 진상을 알고 싶었으나 그럴 만한 시간은 없었다.

문제의 귀빈석.

가면철왕 철우가 앉아 있던 곳의 천장에서도 의문의 백색 액체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것이다.

“……!”

그 모든 장면들이 소호에게는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천천히 보였다.

액체가 뿜어지는 모습이 귀빈석의 정면에서만 보였기 때문이다.

제자리에 앉아 있던 철우와 그 옆에서 검은색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왕진의 머리 위로는 아무도 방비해 주지 않고 있었다.

백색 액체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소호는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소호기에, 귀빈석을 보는 순간 이미 계산은 모두 끝난 상태였다.

‘닿지 않아.’

오 장이 넘는 거리.

전력을 다한다 해도 신법으로 달려가서는 늦는다.

‘하지만 위에는 철우 아저씨가 있어.’

소호의 눈이 영리하게 빛났다. 그는 왼쪽 발을 앞으로 뻗으며 전질보(前迭步)를 선보였다.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온몸의 힘이 한쪽으로 쏠렸다.

허리를 회전시키고, 슬개골, 팔꿈치, 손목으로 육체의 모든 힘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내뻗는 손.

소호가 손에 쥐고 있던 박도의 손잡이를 놓는 순간, 커다란 박도가 마치 단검처럼 날아가 한 줄기 빛살이 되었다.

쒜에에엑―!

“……!”

귀빈석의 모두가 경악했다.

관중들이 불이 났다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과 거의 동시에 면전으로 칼이 날아온 것이다.

“흠!”

백전연마의 고수.

철우의 반응은 확실히 남달랐다.

그는 이미 소호가 던진 박도가 그들을 노리는 게 아니라 그들의 머리 위, 천장을 노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꾸우웅!

콰직!

앉은 자세 그대로 발을 한 번 구르니 귀빈석의 바닥을 받치던 나무판이 단번에 터져 나가며 반쯤 위로 솟구쳤다.

그는 크고 두툼한 손으로 나무판을 붙잡아 마치 몽둥이를 휘두르듯 머리 위를 강하게 쳐 냈다.

후와아앙―.

일수일풍(一手一風).

단 한 수에 커다란 바람이 생겨나니, 그야말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다.

거센 바람이 생겨났다. 철우의 머리에 닿으려던 백린액이 다시 위로 솟구쳤다.

“갈(喝)!”

거기에 더해 철우가 기합을 내지르자 소리가 사자후처럼 터져 나가며 백린액의 방향을 위로 바꿔 놓았다.

철우의 거친 머리카락이 뻣뻣하게 서자, 그야말로 울부짖는 사자 한 마리를 눈앞에 둔 듯하다.

대단한 위세, 막강한 기파였다.

주변에 있던 무공을 익히지 못한 귀빈들이 일제히 기절해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쒜에에에엑―.

퍼억!

소호가 내던진 박도는 위로 솟구친 백탁액과 함께 천장에 박혔다.

“……궁기.”

소호와 철우가 벌어 둔 찰나의 시간은 전황을 바꿔 놓았다.

왕진이 나직하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호명되자 어둠 속에서 한 발 앞으로 나오는 한 사람.

온몸을 검은색 천으로 칭칭 감은 거구의 사내가 위로 뛰어올라 하얗고 커다란 두 손으로 천장을 짚었다.

쩌저적―.

순식간에 귀빈실이 한겨울의 북방 대지 같은 냉기로 뒤덮였다.

하얀 서리와 푸른빛 냉기가 조화롭게 얽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스하아―.

얼굴을 감싼 검은색 천 너머로 하얀 입김이 흘러나오는 모습이 섬뜩하다.

빙백신장(氷魄神掌).

혼백조차 얼어붙는 북해빙궁의 신기가 궁기의 손에서 재현되었다.

위험천만한 백린액이 꽁꽁 얼어붙어 천정에 들러붙는다. 백린액뿐만이 아니라, 그 근처 천정 전체를 얼려 버릴 만큼 궁기의 음기(陰氣)는 강력했다.

쿠웅―.

왕진은 다시 바닥에 내려선 궁기에게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궁기. 밑에 불이 난 모양이에요. 가서 진화하는 것을 도와주세요.”

“……”

“문제가 있나요?”

궁기는 말없이 왕진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손가락으로 왕진을 가리키고 고개를 젓는다.

왕진만이 그의 뜻을 알아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여기에는 가면철왕 님이 계시니 괜찮습니다. 어서 가세요.”

왕진이 재차 권하자 궁기는 그제야 아래로 몸을 날렸다.

보이지 않는 건물 안. 막강한 기파가 연신 터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섭주해와 대미미, 조서인이 뛰쳐나왔던 구멍으로 뿌연 수증기와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번갈아 가며 뿜어졌다.

불길과 싸우는 궁기.

그야말로 신화 속 한 장면 같은 모습이 상상되어 괜스레 몸이 떨릴 지경이다.

‘대단하다.’

소호는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궁기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기묘할 정도로 뒤틀렸지만 강대한 내력.

신화 속의 인물처럼 기이하면서 신비로운 무공까지.

이상했다.

집을 활활 태우는 불꽃을 보면서 눈을 뗄 수 없듯이, 파멸적인 매력에 정신이 쏠리는 듯했다.

궁기를 보면서 유준이 말했던 ‘신수’라는 말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흉포함과 신성함을 동시에 지닌 막강한 힘의 상징.

그야말로 신(神)의 짐승(獸)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천하의 악적 왕진!”

“천벌을 받아라!”

바로 그 때, 관중들 사이에 평범하게 뒤섞여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백색 가면을 쓰고 단상 위로 솟구쳤다.

그들은 특별하지 않았다.

평범해 보이는 무인, 평범해 보이는 여인, 심지어 지팡이를 짚은 노인도 있었다.

그런 자들이 일제히 가면을 쓰고 왕진을 비난한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바.

소호는 일의 진위를 캐묻고자 뒤를 돌아보았는데, 이미 남위군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이런……!”

당황하는 소호.

그사이, 백검회 가면을 쓴 자들이 목소리를 더욱 크게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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