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20화 (349/686)

9권 20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20)

“강호 무림을 혼란시키는 천하의 악적!”

“수많은 무림 문파를 학살한 왕진은 천벌을 받을 것이다!”

“오랜 전통의 화산파를 멸문시킨 자가 누구던가! 그런 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무산학관을 만들어 무림의 종주를 자처하는가?”

백검회의 사람들은 절규하듯이 외쳤다.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왕진의 악행을 성토하기 시작하는데, 그 안에 담긴 개인적인 원한들이 듣는 이의 뼈에 사무칠 정도였다.

“으음…….”

“이것 참…… 틀린 말은 아니니…….”

왕진이 무림 강호를 재편하겠답시고 흑시군을 이끌고 행한 일들을 모르는 자가 어디에 있던가.

지켜보던 무림의 협사들과 학생들은 난감한 상황에 빠져 버렸다.

즐거웠던 무산제전에서 백검회가 난장을 피우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나, 그들이 말하는 내용에는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도의가 있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약자가 어느 쪽인지는 명백한 상황.

도의와 협의를 숭상하는 무인들로서는 백검회를 함부로 핍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호 형!”

다급하게 옆으로 달려온 섭주해가 소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잊지 마세요. 우리의 목적은 무산제전을 무사히 끝내는 거예요. 다른 건 지금 중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소호는 남위군이 있었던 방향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지금 중요한 건,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는 거예요. 소호 형, 왕 태감이 당하면 무산학관은 화를 피해 가기 힘듭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사(皇師) 왕진이 무산제전에서 화를 입는다?

그 여파는 단지 흉수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런 상황을 막지 못한 무산학관에도 화가 미칠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으음.”

소호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스렸다.

백척간두의 상황.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계속해서 생각했다.

백검회의 인물들이 귀빈석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들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듯 보였다.

죽일 테면 죽여 보라는 듯이 오히려 가슴을 펴고 걸어갔다.

어찌할 것인가.

소호는 귀빈석의 왕진과 철우를 응시했다.

“그만! ……멈추시오.”

마치 사자처럼 위풍당당하던 방금 전의 모습을 어디로 갔을까.

철우는 기세가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들을 말렸다.

“왕 태감에 대한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자리는 그런 것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오. 일 년간 고생한 청년들이 자신의 성취를 보여 주는 제전인 바. 그대들은 부디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자리로 돌아가시오!”

철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검회 사람들이 소리쳤다.

“헛소리!”

“비겁자!”

“우리의 원한은 가라앉지 않는다!”

온건하게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나, 백검회 입장에선 기름에 불을 부은 격이었다.

“당신도 똑같다!”

“시대에 영합하는 비겁자!”

“불의를 모른 체하고, 황실의 인정을 받아 꿰찬 자리가 그리도 좋더냐!”

“불귀의 객이 된 화산파의 무인들이 저승에서 욕할 것이다!”

백검회 사람들의 아우성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철우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었지만, 그들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소호는 초패왕 가면 너머 그의 눈빛에서 억울함을 보았다.

‘그래, 철우 아저씨는 무림맹 사람이었지. 나름의 생각이 있을 텐데 그걸 알아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강경하게 대처할 수도 없고…… 힘드시겠네.’

철우를 대신해서 앞으로 나선 것은 의외로 학생들이었다.

현무방의 호걸들.

무산철공주를 제외하면 신력(身力) 제일인이라 불리는 전상이 현무방의 호걸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선 것이다.

지난 육 년의 세월은 안 그래도 거구였던 소년들을 장성한 호걸들로 바꾸어 놓았다.

곰 같은 체구에 사각으로 각진 턱. 그 위를 장익덕 같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다.

피부가 앳되어 보이지만 않았다면 누가 봐도 중년의 산적으로 볼 법한 외모의 청년들이 일제히 뛰어올라 백검회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만! 나는 현무방 방장 전상! 이 이상 우리 무산학관의 제전을 망치는 것은 두고 보지 않겠다!”

쿠웅!

하나같이 떡 벌어진 어깨를 지닌 청년들이었다. 커다란 황색 무복에 은빛의 철 요대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전상이 사람의 팔뚝만큼 굵은 한 자루 철곤을 바닥에 내리치자, 그를 따르는 나머지 십걸(十傑)들이 동시에 내공을 실어 발을 굴렀다.

쿠웅! 쿠웅!

마치 거대한 북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고작 열한 명의 청년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대지를 떨치는 듯 웅장한 진동이 모두를 압도했다.

“흥!”

그러나 백검회 인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애송이들은 꺼져!”

“너희는 모른다! 이 마음을! 이 원한을!”

“너희가 뭘 안다고 나서나!”

쿠웅!

“모르는 것은 어느 쪽인가! 비겁하게 우리의 제전에 끼어들어서 무산학관을 망치지 마! 당신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당신들이 직접 말할 자리를 만들어 내! 황실에 할 말이 있으면 황실로 쳐들어가란 말이다!”

전상의 외침은 거침이 없었다.

감히 겁도 없이 황실로 쳐들어가라는 말을 하는데 망설임조차 없다.

철부지인가?

아니다.

그저, 호걸이요, 투박한 사내일 뿐이다.

직접 당사자에게 찾아가서 말하면 될 것을. 굳이 돌아가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꼴을 못 보는 정의의 외침이었다.

“멋지네요, 전상.”

“……철공주.”

성큼성큼 걸어와 그런 전상의 앞에 서는 자.

나머지 십걸들이 양옆으로 길을 비켜서서 존경의 뜻을 보였다.

커다란 꽃 문양이 새겨진 붉은색 비단 장포를 어깨에 걸친 여인.

대미미가 팔짱을 낀 채 백검회 인물들을 바라봤다.

“이 이상은 못 가요. 보내 주지 않을 거예요.”

조용하지만 단호한 말투.

당당하게 서 있는 장신의 몸에서는 함부로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은 패기가 뿜어진다.

백검회 사람들은 잠시 기가 눌렸지만, 곧이어 발악하듯 오히려 소리를 질렀다.

“철부지들이!”

“말로는 안 통한다! 일단 뚫고 가!”

“왕진을 끌어내!”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관중들 사이에서 점점 더 많은 백검회의 인물들이 가면을 쓴 채 뛰어올랐다.

“이렇게나 많았던가……!”

협사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백검회의 인물들은 벌써 백 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니 구경만 하러 왔던 사람들은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싸움이 벌어지고 피가 튀기라도 하면 아비규환의 상황이 될 것이다.

결국 철우가 다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만! 학관 내에서 싸움은 안 된다! 대미미! 현무방! 너희는 절대 다투지 말고 우선…….”

쿠우우웅―.

퍼엉!

“관장님!”

철우의 발밑에서 무언가가 퍽! 하고 터지더니 그의 발밑 나무판이 아래로 훅 꺼지며 텅 빈 공동을 만들어 냈다.

“……!”

안 그래도 일 층은 불타고 있던 상황이다. 뚫린 바닥을 통해 들어간 공기가 새빨간 화염이 되어 폭풍처럼 치솟았다.

철우는 덩치에 안 맞도록 날렵한 신법을 발휘해 앞으로 몸을 띄웠다.

휘리리릭―.

함정은 함정일 뿐.

철우에게는 해를 끼칠 수 없었다.

문제는 철우가 몸을 피하는 찰나의 순간에 귀빈석에는 왕진과 기절한 귀빈들만이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 점을 노렸던 것일까.

퍼엉!

콰지직!

다시 한 번 강한 폭발과 함께 이번엔 왕진의 바로 옆 나무판이 바닥부터 터지며 폭발했다.

치솟는 불길과 함께 나타난 자.

검은색 장포를 입고, 얼굴에는 흰색 가면을 쓴 장신의 사내였다.

마른 체구에 키가 컸고, 어깨는 넓어 골격은 컸다.

하얀색 가면 위, 음각으로 새겨진 칠(七)이라는 글자가 불길에 눌어붙어 더욱 크게 보였다.

“악저어억! 왕지이이인!”

온몸이 불타고 있기 때문일까.

더욱 소름끼치는 절규를 토해 내며 칠검이 왕진을 향해 뛰어들었다.

“칠검인가요.”

왕진은 검은색 천을 앞에 드리운 채, 아직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목숨을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는 거물이기 때문인가?

파라라락―.

마치 운명처럼, 왕진의 앞을 막아서는 자가 있었다.

새하얀 비단 무복에 비단 장포. 황금 자수가 놓인 영웅건을 쓴 무산제전의 주인공이었다.

바람처럼 나타나, 당연하다는 듯 천장에 꽂혀 있던 박도를 뽑아내 앞으로 겨누는 모습이 그림으로 그린 듯 자연스럽다.

키리링―.

자세는 중단(中丹).

기세는 차분하고, 두 눈에선 황금빛 영웅기가 번뜩인다.

“거기까지.”

장소호.

천무공자가 칠검을 막아선 것이다.

***

섭주해는 갑자기 번개라도 맞은 듯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조용히 이야기했다.

“소호 형, 위험해요. 막아야 합니다.”

푸른빛 귀기(鬼氣)를 번뜩이며 말하는 섭주해의 예측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점술(占術)에서 말하는 예지(叡智)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다만 그 예측은 듣는 이를 배려해 섬세하게 말해 주진 않는다. 예를 들면 북서쪽에 좋은 일이 있으니 찾아가 보라고만 말할 뿐, 북서쪽 십 리 길에 있는 나무꾼들의 초막에서 보물을 찾는다는 식으로는 말해 주지 않는 것이다.

‘위험하다? 막아야 한다?’

소호는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위험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백검회가 노리는 자.

무산학관에서 다치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자.

“왕진.”

소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아지랑이 같은 움직임.

살수계의 전설인 묵신의 신법으로 순식간에 대미미와 현무방 호걸들의 뒤로 이동했다.

왕진의 곁에는 철우가 서 있었지만, 소호는 계속해서 그리로 향했다.

섭주해의 말은 항상 맞다.

의심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쿠우우웅―.

퍼엉!

“……!”

아니나 다를까.

강한 폭발이 일어나 철우가 귀빈석에서 아래로 몸을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쉬이이익―.

소호는 폭발이 터지는 순간, 도리어 귀빈석으로 뛰어올랐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귀빈석에 쓰러져 있는 귀빈들의 숫자를 파악하고, 왕진을 향해 조용히 다가갔다.

퍼엉!

콰지직!

“악저어억! 왕지이이인!”

바닥 아래 불길 속에서 뛰쳐나오는 칠검의 모습은 지옥에서 기어 나오는 아귀 같아 보였다.

소호는 지금이 그가 나서야 할 순간임을 깨달았다.

고오오오―.

주변에서 색깔이 사라졌다.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 올리자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이 느려지는 듯했다.

소호는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서 순서대로 정리했다.

칠검을 가로막는 지점까지 남은 거리는 이 장(丈).

그 사이에 쓰러진 귀빈은 두 사람.

사용해야 할 무기는 천장에 박혀 있다.

“흡!”

바닥에 쓰러진 귀빈 둘을 발로 살짝 걷어차서 뒤로 밀어내고, 천장에 박혀 있는 박도를 움켜쥐며 자연스럽게 아래로 뽑았다.

화아악!

반 갑자 내공을 모두 끌어 올리니 전신에서 황금빛 서광이 서리는 듯하다.

중단의 자세를 취하고, 상대방과의 거리를 철저하게 조절했다.

광기 어린 모습으로 달려들던 칠검이 움찔 몸을 굳혔다.

소호는 절정에 올라선 고수 특유의 무형기를 단단하게 굳히고 있었다. 칠검은 함부로 달려들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거기까지.”

소호는 왕진을 다치게 둘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를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불길을 토하면서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린 팔검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소호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말했다.

“포기해요, 칠검.”

칠검은 그 말을 비웃었다.

침을 뱉고, 입속에서 손가락만 한 도자기병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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